28화– 사랑 앞에 무너져2017.10.06.
라르고의 그림 앞에서 은소현이 쓰러졌다.
앤드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소현이 왜 여기 있는지, 동행한 저 남자는 누구인지, 쓰러진 이유는 무엇인지,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가장 의문스러운 건 은소현을 안은 남자의 존재였다.
그는 쉽게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날카롭고 강인하며 사나웠다.
하지만 은소현을 향한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는 듯 그녀를 꽉 안아 올린 남자가 갤러리를 나갔다.
소란스러웠던 내부는 다시 질서를 되찾았다.
앤드류는 서둘러 직원 한 명을 붙여 그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미국에서 여행객 신분으로 응급실을 이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자신의 갤러리에서 일이 생긴 만큼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은소현이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앤드류 자신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뭔가 있긴 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앤드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결국 조용한 계단 쪽으로 나와 정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으음, 왜?
서울이라면 한밤중일 시간. 정한은 자고 있던 모양이다.
그의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앤드류는 다짜고짜 물었다.
“한, 지금 어디야?”
- 어디긴, 내 방이지.
“너 진짜 서울이었어?”
정한과 은소현이 같이 와 있는 게 아니었다니. 그럼 그 남자는 누구지?
- 왜 그래, 뜬금없이. ……무슨 일 있어?
“은소현 지금 뉴욕에 있는 거 너도 아는 거야?”
- 응, 출장 갔어. 그런데 앤디, 설마 그 넓은 뉴욕에서 은소현 씨를 만난 거야? 어떻게?
정한은 잠이 깬 듯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물었고, 앤드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한은 진짜 몰랐구나.
앞뒤 없이 그녀가 쓰러졌다는 말부터 하면 걱정할 게 분명하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뉴욕과 서울인데, 단숨에 달려올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앤드류는 말하기가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직원을 따라가게 했으니 곧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섣불리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앤드류는 조금만 기다리기로 했다.
“은소현이 전시에 온 걸 봤어.”
- 어? 전시? 무슨, ……내 전시?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오라고 했잖아. 네가 와 있었으면 은소현을 다른 남자 품에 안겨 보내진 않았을 건데.
앤드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참았다.
은소현이 올 줄은 자신도 몰랐으니까. 세상 앞일 아무도 모른다더니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저번에 말한 그거 때문에 온 거야? 네 작품 주제로 탐미재에서 결혼식 기획한다는 얘기 말이야.”
- 뉴욕에서 갤러리까지 갔다면 그 일 때문이 맞을 거야.
“무슨 이런 인연이 다 있냐. 은소현은 너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 그러니까. 정말 신기하지.
은소현이 처음 탐미재에 온 이유마저 라르고 때문이라는 것도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라르고나 그의 그림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일 때문에 떠밀리듯 들어선 곳에서 재회를 하게 되다니.
그리고 탐미재에 와 라르고 화집을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조금씩 이쪽에 관심이 생기고 있다고도 했었고.
그렇게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이 그들을 세차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없이 넓은 세상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온 두 사람이 이렇게 다시 만나 사랑으로 향하는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 그럼 앤디, 은소현 씨랑 만났으면 지금 같이 있는 거야?
“아니, 만난 건 아니고 난 멀리서 보기만 했어. 음, 잠깐, 내가 이따 다시 전화할게.”
정한의 질문이 이어질 것 같아 앤드류는 바쁜 것처럼 서두르며 일단 전화를 끊었다.
은소현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부터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병원으로 동행하도록 함께 보낸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바로 연결이 안 되었고 잠시 후에야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일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었다.
『그 여자 왜 쓰러진 거야? 어떻게 됐어? 지금은 어디야, 병원에 있어?』
- 하나씩 할게요. 먼저, 쓰러진 이유는 과로래요. 그동안 무리해서 일한 모양이에요.
『갑자기 쓰러진 게 그냥 과로 때문이라고?』
- 그런데 아마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그때 제가 근처에 있어서 봤는데 갤러리에 있을 때 그 여자, 작품 앞에서 완전히 넋이 나간 것처럼 한참 동안 서 있었거든요. 그림 보고서 아무래도 어지럼증까지 겹친 것 같아요. 그동안 과로까지 했었다면 체력도 많이 떨어져 있을 테니까.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이야?』
- 네, 아마도.
프랑스 작가인 스탕달의 경험에서 비롯된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주(註): ‘적과 흑’의 저자인 프랑스의 스탕달(Stendhal)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레니(Guido Reni)의 작품인 ‘베아트리체 첸치’를 감상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함을 체험했던 것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였던 것에서 유래한 용어다.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뛰어난 미술품이나 예술품을 보고 순간적으로 느끼는 정신적 충동이나 흥분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스탕달 증후군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술작품을 보고 미약한 심장박동만 느껴도 일종의 스탕달 증후군이라 할 수 있었다.
어지러움과 울렁거림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 제가 그 얘기 전했더니 의사가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은 것과 맞물려서 쓰러지기까지 한 것 같다고.
『그럼 지금은 어디야, 병원?』
- 아직 깨어난 건 아닌데 호텔로 옮긴대요. 여기보다는 더 편하게 쉴 수 있다고.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 다행이죠, 제가 지켜보는 것 말고는 별로 도울 게 없을 정도로 애인이 이쪽에 아주 빠삭하더라고요. 그런데 부자인가,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호텔로 의사까지 따로 부를 모양이에요.
그 남자에게는 돕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했다. 이곳에 연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돈이 많은 건지 몰라도 남자는 단순한 여행객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그 남자가 애인이래?』
- 그래 보였어요.
앤드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심각한 상황이 아닌 건 다행인데, 주변에서 애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은소현의 옆에 붙어 보호하는 남자가 있다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와중에 직원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덧붙였다.
- 여자가 라르고 그림 앞에서 스탕달로 쓰러졌다고 홍보할까요? 관심 좀 끌 것 같은데.
『아니, 하지 마.』
앤드류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렇게 이용하는 걸 정한은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은소현인데.
정한에게 그녀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앤드류는 직원의 제안을 수용할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정한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직원과의 통화를 끝낸 앤드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기 어려운 얘기지만 해야만 했다.
애인이 누구인지, 은소현의 옆자리에 누가 있어야 하는지, 이제 정한 자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였다.
◇ ◆ ◇
ㅡ 아니, 만난 건 아니고 난 멀리서 보기만 했어. 음, 잠깐, 내가 이따 다시 전화할게.
앤드류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한은 잠이 싹 달아나 침대에서 일어섰다. 서성이면서 휴대전화만 바라보다가 먼저 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안 받네. ……왜 안 받지.”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여러 번 다시 통화를 연결해도 마찬가지였다. 메신저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으로도 응답이 없기에 일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때 앤드류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어, 얘기해. 무슨 일이야?”
재촉하듯 물었다. 정한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다급해졌다.
- 은소현이 쓰러졌고…….
“뭐?”
안 좋은 예감은 빗겨가질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가 정신을 놓을 때도, ……한 번도 어긋나본 적이 없었다. 이런 불안한 마음은.
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소현이 쓰러졌냐고 묻는 정한의 가슴이 죄어져 뻐근했다.
- 진정해, 큰일은 아니야. 안정하면 금방 나아진다고 했대.
안심을 시키는 앤드류의 목소리도 소용없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소현이 쓰러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한은 충분히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서정한 씨, 신선 알아요, 신선?」
「알죠.」
「가끔 보면 꼭 신선 같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허허, 웃으면서 그게 다 인생이니라, 할 것 같거든요.」
「내가 그래요?」
「네, 서정한 씨가요.」
소현이 탐미재로 매일 출퇴근하던 어느 날, 그렇게 말했었다.
다양한 손님들을 대하면서도 늘 여유를 잃지 않고, 감정의 높낮이가 항상 일정한 정한을 보면서 소현은 감탄 반, 놀림 반으로 신선 같다 말했었다.
하지만 정한도 사람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
사랑하는 여자의 혼절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져 소리를 높이는, 그저 보통의 남자.
“자세히 얘기해. 대체 무슨 일이냐고!”
- 일단 마음을 좀 가라앉혀. 한, 흥분하지 말고.
안타까운 듯 달래주는 앤드류의 음성이 간절하기까지 했다.
뉴욕과 서울의 물리적 거리야 당연히 멀겠지만, 심리적 거리는 가깝기만 했었다. 옆 동네 오가듯 툭하면 다녀가는 앤드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뉴욕이 우주 저 끝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정한은 숨이 다 막혔다.
앤드류가 긴 한숨 끝에 전한 이야기는 그의 가슴을 더욱 세게 내리쳤다.
- 후우……, 은소현과 같이 온 남자가 있어.
“남자?”
- 응, 갤러리에 같이 왔다가 은소현이 쓰러지니까 데리고 갔어. 크리스한테 병원에 따라가라고 보냈었거든. 그래서 들었는데…….
소현이 과로와 피로누적으로 기력이 떨어져 있는 데다가 작품을 보고 스탕달까지 겹쳐 결국 쓰러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애인이라 생각될 정도로 가까이에서 소현을 보호하는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
병원에서 나와 호텔로 옮겨갔다는 이야기.
앤드류는 그쪽 상황에 대해 아주 상세히 전해주었다. 정한의 눈앞에도 그려질 정도로.
갤러리에서 소현과 함께 있었다는 남자는 류재언일 것이다.
그가 맡긴 일 때문에 뉴욕에 가 있는 것이니, 애인이라 생각될 만큼 가까워 보인 남자가 함께 있었다면 류재언 말고는 답이 없었다.
“일단 알았어.”
- 어떻게 할 거야?
“가야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바로 터져 나온 대답이었다.
간결하고 깔끔한 답에 앤드류가 시원하다는 듯 후련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 그렇지? 역시 네가 와야겠지?
“당연히.”
소현을 위해 기다린다고 했지, 그 자리를 누구에게 내어주고 뺏기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전화를 끊은 정한은 여권부터 챙겼다.
어떻게 다시 만난 사람인데, 어떻게 다시 찾은 사랑인데.
공항으로 가기 위해 급히 움직이는 정한은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듯 숨이 차올랐다.
여유를 잃었다, 완전히.
사랑 앞에 느긋할 수는 없었다.
1분이라도, 아니, 1초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지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죽어도 소현의 옆이었다.
◇ ◆ ◇
목에 세찬 가시가 돋아나 침을 삼키는 것조차 괴로웠다.
재언은 침대에 파묻히듯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은소현의 옆을 한시도 떠나지 못했다.
그녀를 담고 있는 눈에도 가시가 박힌 것처럼 재언은 보는 내내 괴로웠다.
그에게는 이렇게 순간순간이 모두 괴로움이었다.
쓰러질 정도로 그동안 그렇게 힘이 들었나. 지친 기색도 없이 씩씩하게 움직이던 은소현이었는데. 몰랐는데……, 전혀 몰랐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흐름으로 상황을 만들어가면서도 정작 은소현이 어떨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바쁘면, 그렇게 시간이 없으면, 그러면 서정한인지 하는 놈에게 신경을 쓸 여력조차 없겠지, 그것만 생각했었다.
어리석었다. 이기적이고, 한심했다.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은소현의 모든 시간을 제 손에 놓고 움직였다.
바쁜 일정들 사이에 이렇게 멀리 뉴욕에 오는 일까지 만들면, 그리고 여기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 그러면 자신의 뜻대로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죽은 듯 깊이 잠이 든 모습이라니.
가뜩이나 체력이 약해져 있는 은소현에게 갑작스러운 뉴욕행은 크게 무리가 된 게 분명했다.
그녀를 지켜보는 재언의 가슴이 참혹하게 찢겨나가 아픔으로 물들었다.
모든 건, 다 자신 때문이다.
은소현을 다시 제 곁으로 돌리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한없이 어리석은 자신 때문이었다.
「걔가 고아인 거? 난 상관없어. 오히려 잘된 것도 있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스토리텔링이 되잖니. 그런 애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는 것 자체가.」
어머니는 은소현과의 결혼을 기꺼이 반기며 말했었다.
「반대 하나 없이 데려와 내가 딸처럼 대해주는 거 생각해봐. 그림 나쁘지 않지? 하나뿐인 아들이 오래 사귀고 사랑한 여자고, 그러니 그것 말고 조건이나 배경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되니까.」
잘 짜인 각본 속에 은소현의 역할도 새로 생겼었다.
친절하고 자상한 시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운 좋은 신데렐라 며느리.
불행한 과거를 잊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은소현을 며느리가 아닌 딸처럼 각별히 대해주는 모습은 그의 부모에게는 더없이 탐나는 그림이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대단히 자애로운 이미지까지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은소현은, 자신을 예비 며느리로 기쁘게 맞이해주는 재언의 부모에게 감동했었다.
그런 은소현을 보며 재언은 처음으로 결혼하기로 한 걸 후회하기도 했었다.
그저 은소현이라면 모두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기에 결심했던 결혼이었다. 그녀까지 상처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인지 몰랐었다.
설마 은소현에게까지 그럴 줄은,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었기에.
결국 파혼을 말하는 은소현을 그냥 놓아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차라리 그게 더 잘됐다는 듯, 떠나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미안하다.”
처음이었다.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고 꾹꾹 눌러두었던 건지.
비로소 미안하다는 말을 처음으로 내뱉은 그 순간, 재언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단번에 터져 나왔다.
알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걸,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게 미안하다는 말로는 다 풀 수 없는 걸 알아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외면했었다.
“미안해……, 미안해, 소현아. 미안해.”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진심마저 감춘 채 차갑게 대했던 건가.
모든 것이 무너졌다.
막상 떠나보내니 은소현이 없는 삶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녀를 놓아버린 마음도 사랑이었고, 다시 되돌리려 하는 마음도 사랑이라는 걸, 너무도 늦게 알아버려서.
그런 게 사랑인지, 평생 모르고만 살아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몰라서.
사랑 앞에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가시가 돋아나 뜨고 감는 것마저 괴롭던 그의 눈에 회한이 깊게 얼룩졌다. 그득히 들어차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재언은 은소현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작았나. 이렇게 여렸나. 이렇게…… 예뻤나.
재언의 손이 떨렸다.
후드득, 후회가 맺혀 떨어졌다.
곁에 있는 게 당연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존재의 소중함을 일찍 깨닫지 못한 대가는 너무나 크고 아팠다.
너를 힘들게 한 벌을 받으라면 그렇게 할게. 네가 죽으라면 그냥 죽을게. 너를 아프게 한 죄를 묻는다면 지옥에라도 갈게.
너를 잃어야 하는 것만 빼고, ……뭐든지 다 할게.
그러니 제발, ……그러니까 소현아. 나 좀 봐. 다시 조금만 봐줘. 나를, ……소현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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