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멀고 아득하나 한없이 아름다운 별처럼2017.10.02.
소현이 뉴욕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경이었다.
짐을 옮겨준 포터가 나간 후 방에 혼자 남은 소현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휴대전화 화면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은 오전 11시.
“딱 하루 됐네.”
바로 어제 이 시간, 류재언에게 뉴욕행 티켓을 받고 불과 스물네 시간이 흘렀다.
당장 오후 비행기라서 소현은 집에 들러 간단한 짐만 챙겨 공항으로 향했고, 긴 비행을 거쳐 무사히 뉴욕에 도착했다.
“미리미리 좀 얘기해주지, 꼭 이렇게 갑자기 오게 만든다니까.”
새삼 류재언을 원망하며 중얼거렸다.
소현은 그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바쁘게 지내왔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뉴욕에 와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짐도 풀지 않은 채 소현은 서울 사무실에 있는 애주에게 휴대전화 메신저로 전화를 걸었다.
- 언니! 잘 도착했어요? 거긴 밤이죠?
발랄한 애주의 음성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호텔에 방금 들어왔어.”
- 그래도 류 대표님이 또 엄청 좋은 호텔 잡아줬어요? 지난번에도 호텔 무지 좋았다고 했잖아요.
“응, 좋긴 좋은데. 후우……, 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이러나 모르겠다.”
여유 없이 바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인지 매번 호텔만큼은 컨디션이 뛰어난 곳으로 신경 써주는 느낌이었다.
소현은 자신의 집보다 더 좋은 호텔방 안을 무심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통유리 밖으로는 뉴욕의 야경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뿐인가. 자신의 돈으로는 생전 꿈도 꾸지 못할 일등석 비행기 티켓도 류재언은 아무렇지 않게 준비해주었다.
애주는 뉴욕까지 일등석이라면 왕복 천만 원도 훨씬 넘을 거라며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그 말을 들은 소현은 빈속에 체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류재언에게 표를 변경해달라고 했는데 이코노미와 프레스티지가 만석이니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타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파티션까지 있는 편안한 침대식 좌석이, 일회용기가 아닌 고급스러운 식기에 코스별로 나오는 음식들이, 질 좋은 실내복과 화장품마저 세심하게 제공되는 서비스가, 소현은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다.
류재언은 사업을 하는 남자다. 공짜와는 거리가 먼 사람.
자신에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바라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소현으로서는 영 불편할 뿐이었다.
하긴, 그러니 이렇게 내키는 대로 불러내 일을 시키는 것이겠지만.
- 언니, 주말 지나서 온다고 했죠? 이번에는 시간 좀 있으니까 한국 올 때까진 일 생각하지 말구 조금이라도 쉬고 와요. 그런 곳에서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게 나중에 일에도 다 도움 되는 거잖아요. 마음 놓고 좀 놀아요. 놀아.
“너한테만 맡겨놓고 내가 어떻게…….”
- 일복 많은 사람은 정말 따로 있나 봐요. 언니가 어제 빠지고부터 일이 막 줄어든 거 있죠.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전해 들은 소현은 놀라 되물었다.
“일이 줄어?”
- 상담 잡힌 것도 몇 개 취소되고 샵 미팅 다음 주 이후로 미뤄진 것도 있어서 여유가 생기긴 했는데. 갑자기 희한하죠? 요즘 일이 너무 겹쳐서 정신없었는데.
“아, 그래도 다행이다. 너 혼자 있는데 계속 바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혹시 혼자 남은 애주가 고생할까 신경이 쓰였던 소현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일단 언니 올 때까진 블로그 관리만 하고 있어도 될 것 같아요. 어차피 곧 주말이기도 하고,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쉬겠어요?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전시 보는 일만 끝나면 언니도 숨 좀 돌리다 와요.
편히 쉬고 오라고 신신당부하는 애주와의 통화를 끝낸 소현은 의아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태랑의 결혼 준비 이외에는 제대로 진행하는 일이 없었다.
소현과 애주는 날마다 영업을 다니고 온라인 홈페이지와 블로그 관리를 하면서 홍보하는 게 전부였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바빠지더니 또 거짓말처럼 일이 줄었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일이야 많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많아지는 것이니 단순히 그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혼자 있으니까 생각만 많아지네.”
자꾸만 깊어지는 의구심을 애써 떨치며 소현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내일 라르고 전시회에 가기 전 보아두어야 할 자료들도 있고, 어서 시차적응을 해야 일도 할 수 있기에 그녀는 잡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주어진 일부터 잘 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소현은 조식을 먹기 위해 고층에 위치한 호텔 내 레스토랑에 올라왔다.
빌딩 숲 사이 자리 잡은 센트럴 파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자 비로소 뉴욕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매우 이른 시간이라 내부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적했다.
소현은 접시에 빵과 과일 등의 음식을 간단히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뭐 하고 있을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비행기 시간에 쫓겨 정한을 보지도 못하고 뉴욕에 왔기에, 소현은 시시때때로 그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 자리에서 기다리겠다던 정한이지만, 어쩜 이렇게까지 여유가 있을까 싶었다.
소현의 갑작스러운 출장 소식에도 아무렇지 않게 잘 다녀오라 말하던 사람.
그는 언제나처럼 시종일관 느긋하고 편안하기만 했다.
「난 괜찮아요. 돌아와서 보면 되죠.」
다정한 그의 음성에 서운함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조금 투정 부려도 좋으련만.
저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것조차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그는 늘 어른스럽고 사려 깊었다.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자신을 바라보고 또 기다려주는 정한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멀고 아득하나 한없이 아름다운 별처럼.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해 자신만 점점 안달이 나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정한을 며칠 못 봤다고 상사병이라도 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시골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장승처럼 끄떡도 안 할 텐데.
사랑에 빠진 상태라면 불도 좀 타올라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별생각을 다 하네. 배가 불렀지, 배가.’
소현은 스스로를 꾸짖으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달랬다.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면서도 열정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것도 지나친 욕심.
쓸데없는 생각 대신 정한의 목소리라도 들어볼까 하여 소현은 포크를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의 음성이 휴대전화를 통해 가만히 전해졌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온기마저도.
- 잘 잤어요?
그의 바다는 여전히 평온했다.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로 수면은 그저 잔잔하기만 했다.
“네, 아침 먹으러 왔어요.”
- 시차 때문에 힘들진 않구요?
“전혀 안 힘들어요.”
씩씩하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정한의 덕분이었다. 막상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은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래, 바랄 걸 바라야지. 타오를 불이 어디 있다고. 그런 쪽과는 아예 거리가 먼 사람인데.
- 바빠도 끼니 잘 챙기고, 너무 무리해서 다니지 말구요.
“그럴게요.”
이 남자의 색은 흰색, 푸른색, 초록색이다.
정한은 따스한 빛이고, 청명한 하늘이며, 드넓은 바다, 고요한 나무 그늘이었다.
잠시나마 그에게 없는 다른 색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느꼈다.
“서정한 씨가 전에 얘기했던 거 있잖아요. 올가을에 자전거 여행 간다고 한 거.”
- 아, 네.
“나 한국 돌아가면 같이, ……가도 돼요?”
그가 머물러 있다면 조금씩 다가가는 건 이쪽의 몫이다.
“같이 가고 싶어요, 나.”
한 발짝, 한 발짝.
소현은 이미 정한에게로 향해 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하지만 너무 적극적이라 당황했는지 정한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민망해진 소현이 테이블을 내려보며 괜히 중얼거렸다.
“끊겼나…….”
- 아니, 아니에요. 안 끊었어요.
“……아무래도 좀 그렇죠? 둘이서만 여행 가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쉽게 말했나 봐요. 나중에 우리 조금 더 친해지면 여행은 그때…….”
소현의 말을 끊으며 정한이 바로 치고 들어왔다.
- 소풍이 아니라 여행이에요.
“네?”
가라앉은 음성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 하루 만에 돌아오는 거 아니고, 며칠 걸릴 텐데. 그래도 같이 갈 수 있겠어요?
이미 알고 얘기한 거였는데.
정한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마음먹고 한 말이었는데.
“네, 그럼요. 갈 수 있죠.”
제안을 한 건 이쪽인데 오히려 정한이 재차 확답을 바라고 있었다.
- 정말 같이 갈 거죠? 약속할 수 있어요?
“아, 네, 야, 약속할게요.”
그제야 정한의 웃음기 섞인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 ……좋다, 벌써. 생각만 해도.
혼잣말인지 전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읊조림.
그 안에 설렘과 기대가 빼곡하게 차올랐다.
정한뿐 아니라 소현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래요. 나도 좋아, 벌써. 생각만 해도.
- 일 잘하고 돌아와요. 기다릴게요.
기다림이 조금 즐거워졌다. 앞으로 함께할 시간 덕분에.
- 일은 오늘부터 바쁘겠네요.
“네. 그래도 오늘 일정만 빡빡하니까 괜찮아요.”
- 그쪽에서 결혼하는 사람이나 업체 만나는 거예요?
워낙 정신없던 탓에 소현은 뉴욕에 어떤 일로 왔는지 구체적인 얘기도 하지 못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제이 라르고의 특별전을 보러 온 사실을 자세히 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정한도 라르고를 알고 있으니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았다. 라르고 작품을 볼 때의 조언을 구할 수도 있겠고. 그런데 그때였다.
“아아, 그런 건 아니구요. 여기 전시를 보려는…… 건데…….”
순간 소현의 말이 느려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그녀의 시야에 저 멀리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기 때문이다.
큰 키에 쭉 뻗은 다리, 심플한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남자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소현과 눈이 마주쳤다.
휴대전화 건너에서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정한이 소현을 불렀다.
- ……은소현 씨?
“아아, 다시 전화할게요.”
갑작스러운 등장에 할 말을 잃은 소현은 더 이상 무언가를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정한과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끝낸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의아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어쩐 일이야?”
예고도 없이 나타난 류재언에게 건넨 첫마디다. 여기가 서울도 아니고, 뉴욕 한복판 호텔 레스토랑인데.
물론 그가 제공한 호텔이고, 일정도 모두 공유하고 있기에 이곳을 알고 왔다는 사실이 놀라운 건 아니었다.
다만 류재언이 뉴욕에 있을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너 싱가포르 일정 있어서 간 거 아니었어?”
그날, 소현의 출국보다 이르게 그가 먼저 공항으로 출발했었다. 당연히 지금 싱가포르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갔다가 방금 온 거야.”
“여기로?”
“그래.”
류재언은 아무렇지 않게 소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웨이트리스가 채워주고 간 커피 잔을 들었다.
그의 남자다우면서도 길게 뻗은 손가락은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무심하게도.
“설마 너 전시회 보러 온 거야? 라르고 작품 하나 보러 뉴욕까지, 피곤하지 않아? 진짜 대단하다, 너.”
소현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류재언이 말했다.
“나랑 같이 움직여. 여기 있는 동안.”
“응? 현지 관계자 붙여준다며.”
“취소시켰어. 내가 와서.”
소현은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실무에 깊이 개입하는 스타일이 아닌 걸로 아는데 최근 들어 류재언은 자꾸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하는 방식이 점점 바뀌는 것인가.
하나하나 자신의 손이 닿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병이라도 걸렸나.
누가 안내하고 설명하든 상관없지만 류재언은 좀 다르다. 그는 여전히 소현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싫어?”
류재언의 물음에 소현은 자세를 고쳐 앉고 대답했다.
“싫은 건 아니고. 넌 좀 불편하지, 사실.”
“……불편?”
싫다는 말보다 불편하다는 그 말이 더 거슬리는 듯했다.
“일을 해야 하고 빚도 갚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같이 있지만, 우리 사이가 편한 건 아니잖아.”
류재언의 눈에 따끔한 빛이 스친 건 착각이었을까.
“뭐, 일하러 왔으니까 일이나 하면 되지만. 그럼 이따 로비에서 만나. 몇 시에 볼까? 예정대로 여기서 바로 갤러리로 갈 거지?”
낮은 한숨을 머금은 류재언의 입술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흐음, 11시쯤 출발하자. 그 대단하다는 라르고 작품들, 나도 네 덕분에 볼 수 있겠다. 살면서 그런 대작도 내 눈으로 다 직접 보고 신기하네. 그럼 로비에서 11시에 봐.”
평소의 날 선 슈트 차림이 아니라서 그런지 류재언의 분위기가 오늘따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째 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주식이 떨어졌나.
아니면 직원이 속을 썩이나.
어떤 문제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소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다 먹었어. 먼저 내려갈게.”
선을 그으며 멀어지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류재언이 그제야 긴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는 걸 소현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 ◆ ◇
전시가 진행되고 이틀째 날이라 전날보다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더 이상 새 작품이 나오지 않고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제이 라르고가 이미 사망했다거나, 몹쓸 병에 걸렸다거나, 난잡한 사생활을 즐기는 이라는 온갖 루머가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그러면서도 전시 시작 후 밀려드는 취재와 갤러리의 관람객들, 업계 관계자들을 보면서 앤드류는 라르고의 높은 화제성을 체감했다.
아마 당분간 이어질 특별전 기간 중 이곳의 많은 작품들이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려나갈 것이 분명하다.
앤드류는 작품을 사고파는 이였지만, 그는 그런 행위 또한 예술의 한 축을 담당한다고 믿었다. 온 마음을 다해 작품을 대하는 것이 앤드류의 진심이었고, 정한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선뜻 작품의 운용을 앤드류에게 일임했다.
다만 정한은 그렇게 벌게 된 돈이 자신의 그릇을 채우고도 지나치게 넘친다고 생각했다.
「책방을 연다고? 갑자기 무슨 책방?」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한국에 들어간 정한이 책방을 열겠다고 했을 땐 황당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곧 앤드류는 알게 되었다.
정한에게 있어 책방은 사람이 가진 자그마한 그릇을 채우고 넘쳐버린 물을 한없이 품어낼 바다였다.
정한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들, 혹은 지나치게 비싼 책들, 다양한 작품들을 책방에 채워갔다. 누구든 와서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미대생들이 다녀갔고, 젊은 시절 화가를 꿈꾸었던 명예퇴직자가 다녀갔다.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춘기 딸을 데리고 어느 어머니가 다녀갔고, 낭만을 잃어버리고 살던 부부가 다녀갔다.
사람들의 숨결이 묻고 손길이 묻은 책들이 고이 쌓여갔다.
책을 팔기 위해 만든 책방이 아니라, 책을 나누기 위해 만든 책방.
정한이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곳, 탐미재였다.
그렇기에 앤드류는 겉으론 어서 새 작품을 달라고 조르지만 실상은 가까이에서 본 그의 여유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작업을 독촉하는 건 그저 정한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한 구실일 뿐, 제이 라르고로서의 정한이 아닌 인간 서정한을 마음 깊이 아끼는 것이 앤드류의 진심이기도 했다.
이제 탐미재는, 세계 각국을 바쁘게 돌면서 일하느라 지치고 고단한 앤드류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었다.
한국으로 달려가 며칠이고 탐미재의 낡은 서가 사이에 틀어박혀 보물상자 뒤지듯 책을 찾아내 보고 있노라면 그보다 더 달콤한 시간은 없다고 느껴졌다.
라르고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니 탐미재가 떠오르며 막연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때다. 갤러리 안, 앤드류의 눈에 멀리 한 동양인 여자가 보였다.
“어……?”
은소현이었다.
밤하늘의 공간. 가로 3.5미터에 달하는 꽤 큰 사이즈의 그림 앞에서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뭐야, 그렇게 안 온다더니 왔잖아.”
정한이 은소현을 데리고 온 거라 생각했다.
앤드류는 씨익 웃으며 소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올 거면서 안 온다고 튕기긴, 결국 왔으면서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앤드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라르고의 그림 앞에서 한 발짝 뒷걸음치던 은소현이 휘청거렸다.
“왜, 왜 저래? 어어어?”
앤드류가 놀란 얼굴로 얼른 다가가려는데,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달려오더니 막 쓰러지던 은소현의 몸을 빠르게 받쳐 안았다.
세상 더없이 절실하고도 간절한 움직임이었다.
사람이 쓰러졌다며 웅성거리는 상황 속에서 앤드류의 눈에 들어온 건, 은소현을 안고 있는 남자였다.
정한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애타는 얼굴로 은소현을 안고 있는 남자, 정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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