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26화 (26/52)

26화– 그는 아직 이별하지 못했기에2017.09.29.

자리로 돌아온 후 소현은 내내 말이 없었다. 대신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포크만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 소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한이 물었다.

“입에 잘 안 맞아요?”

“어? 아뇨. 맛있어요.”

황급히 대답하며 소현은 입속에 라자냐를 쏙 넣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아니다. 다만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많이 먹고,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또 시켜요.”

정한은 웃으며 소현의 접시에 음식을 하나둘 끊임없이 올려주었다.

마침내 소현이 입을 열었다.

“전남친 얘기……, 안 물어봐요?”

저쪽에서 나누고 온 대화가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에요.”

직장 상사였다던 마진혜 팀장인가 하는 여자는 소현이 거북해할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마 팀장은 대화를 마친 후에는 식사를 주문하지 않고 같이 온 친구와 함께 레스토랑을 나갔다.

시종일관 입으로는 친절한 척했지만, 표정이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몸에 깊이 배인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해져왔다.

“걱정했어요?”

“아니, 뭐. ……파혼까지 한 게 자랑은 아니니까요.”

“잘못도 아니죠.”

지나간 사랑에는 죄가 없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미안해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제게로 오는 걸음이 더딜까 봐.

아무런 부담 없이 나풀나풀 날아오기만을 바라기에.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아무런 근심 없이 활짝 피어나기만을 바라기에.

정한은 그녀의 등에 가벼운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삶의 어떤 부분도 소중하지 않은 면이 없으니 혹시 모를 걱정은 내려두었으면 했다.

그제야 방긋 웃는 소현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그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녀는 깜빡 잊은 걸까.

자신이 혹시 오해하거나 기분 상할까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하와이 하늘에서 소현이 털어내던 아픔을 가슴 가득 받아내고,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함께 낙하했었다.

심지어 마 팀장의 존재까지도, 정한은 그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 순간의 소현은 그렇게 고단했던 회사생활을 푸른 하늘에 훌훌 날려버리고, 약혼자와의 이별까지 시원하게 털어버렸다.

가족마저 곁에 없어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씩씩하게 맞서고자 했던 때, 소현의 곁에는 그가 있었다.

이렇게 인연이 이어질지 몰랐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탐미재 대관을 허락한 겁니까. 하루아침에.」

소현의 전 약혼자와 대면하는 일 역시 그땐 상상할 수 없었다.

조금 아까 정한이 소현을 데리러 집에 도착했을 때 건물 1층 계단에서 그 남자, 류재언과 마주했었다.

소현의 앞에서는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관하던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분위기로 벽에 기대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더니 탐미재 대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사납지만 아픔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정한은 직감했다.

류재언이 화집을 확인하겠다며 굳이 탐미재에 찾아와 소현과 마주 앉아 있었던 그때 이후로 다시 한 번, 그는 아직 이별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아파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탐미재에서 식을 진행하는 게, 그쪽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정한은 덤덤히 대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재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단 하나, 소현과 자신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냉철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꽤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깟 책방 하나로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잘 모르시네요.」

「…….」

「은소현 씨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에 류재언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가 허락한 게 아니라, 은소현 씨가 허락을 받은 거예요.」

「……무슨 소리.」

「말 그대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녀에 대한 호감을 구실로 억지로 허락해준 것이 아니었다.

소현이 전한 메시지가 닿았을 뿐이었다. 왜 꼭 탐미재여야 했는지, 그녀가 보인 간절함은 지극히 타당했었다. 정한이 생각을 바꿀 만큼.

「은소현 씨가 이 일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런 번지르르한 말로 순진한 여자 하나 꼬셔볼 생각인가 본데, 그쪽이 이렇게 집까지 찾아올 정도면 얘기 끝난 거 아닌가.」

류재언은 여유를 잃었다. 진심을 매도당한 정한이 오히려 차분한 태도로 일관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어차피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더구나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네깟 게 갑자기 나타나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내가 알 바 아니고, 은소현과 나는…….」

「약혼까지 했던 사이죠. 결혼을 세 달 앞두고 파혼을 했었고.」

정한은 류재언의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상처로 가득한 그의 눈을 가까이 바라보며, 정한이 말했다.

「파혼한 사이가 아니라, 나는 그쪽이 은소현 씨의 전남편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과거를 무기 삼아 뒤흔들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나직하게 던진 경고였다.

분노로 가득 차오르던 그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럴수록 스스로의 상처만 헤집을 뿐일 텐데.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아픔이었다.

“서정한 씨?”

정한은 소현의 부름을 그제야 인식했다.

“아, 네.”

“음……, 나 사실, 아직 말 안 한 거 있는데요.”

“얘기해요.”

“……전남친이 류재언이에요. 몇 번 봤죠? 탐미재에 왔었던 그 류재언 대표요.”

소현은 침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얼른 이어 말했다.

“그런데 다 끝난 사이는 맞아요. 지금은 아무 감정 없고, 그냥 일로만 엮여 있는 거예요. 파혼했다고 해도 그게 벌써 3년 전이고, 이제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절대.”

그 말을 하는 소현의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간절하기까지 했다.

정한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소현 씨, 혹시 내가 오해할까 봐 해주는 말이에요, 그거?”

“어, 네……. 그렇죠.”

“이제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겠다.”

“뭐, 뭘요?”

“은소현 씨 말의 속뜻이요.”

마음을 들킨 듯 소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착각이 아니라는 건 정한도 알고 있었다.

소현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이토록 과거에 대해 신경 쓰고 류재언의 이야기를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라고.

더 이상 짝사랑이 아니라, 이미 오고 가는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정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소현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 알면서.”

소현은 곤란한 듯 약간의 불퉁함을 섞어 말했다.

“서정한 씨도 그렇게 내 마음 다 알면서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하면?”

“오라는 말은 들었는데…… 언제 가야 좋은지 타이밍 잡기가 영 힘들잖아요, 내가.”

순간 정한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현을 보며 정한이 주먹을 말아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눈가 가득한 웃음을 지우지는 못했다.

“흠. ……미안해요, 갑자기 웃어서.”

“농담 아닌데요.”

소현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출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서정한 씨랑 내 마음이 별로 다르지 않은데. 그렇게 다 알면서 이러는 거, 혹시 썸만 타고 싶은 건 아니죠? 아, 근데 왜 자꾸 웃어요?”

“너무 귀여워서.”

“그런 말로 돌리지 말고 얘기해봐요. 나 이제 오해도 다 풀렸고…….”

“며칠 만에 정말로 내가 좋아졌어요?”

그 말에 소현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결연한 눈빛으로 다짐하듯 대답했다.

“처음부터 좋았어요, 쭉.”

고백이었다.

소현의 입으로 처음 듣는 말.

“그러니까 나 언제 가면 될까요?”

◇ ◆ ◇

소현을 집에 데려다주고 탐미재로 돌아온 후, 정한은 빈 평상에 누웠다.

긴 하루였다.

어머니는 일어서는 자신에게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고.

소현의 전약혼자는 그깟 책방 하나로 수작을 부린다고 자신을 비난했으며.

……소현은 사실 처음부터 좋았다는 말로 제 심장을 두드렸다.

수없이 이어지는 만남과 상처 속에서 오직 위안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미소뿐이었다.

그렇기에 정한은 당장이라도 소현을 안고 싶었다.

조심스레 제게 화답하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힘껏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현은 감정이 넘쳤다. 스스로 보호할 막은 만들어둘 겨를도 없이 달려드는 아기사자 같았다.

서툴고, 순수하며, 아름다웠다.

애타는 마음을 누르며 정한은 겨우 대답했다.

「나야 너무 기쁘지만, 서두르면 은소현 씨가 힘들어요.」

쫓기듯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단 며칠 만에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어떤 틀에 무작정 가두지 않아도 돼요.

「무책임하게 썸만 타자는 거 아니고, 내 마음이 달라질 것도 아니에요. 난 계속 여기 있으니 걱정 말고 편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난.」

정한은 보다 멀리 가고 싶었다.

당장 끓어오르는 열망에 취하기보다 서로의 안온한 품에 기대어 한없이 오래, 또 멀리 가고 싶었다.

그녀를 곁에 묶어두고 싶은 욕심보다는,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컸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곁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오라고 해놓고 너무 여유 있는 거 아니에요? 후회할 텐데. 내가 아주 아주 늦게 갈 수도 있잖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얼마든지.」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는다. 조바심으로 다가오지 않아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말했다.

더디게 오더라도 모두 참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걸음이 아무리 늦을지라도, 그 길의 끝이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두 손을 맞잡았을 때 마음을 가득 채우는 간절함이 전해진다면, 그걸로 됐다.

그래서 정한은 재촉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역시 거짓말이겠지만, 자신의 바람보다는 그녀의 안식이 우선이었다.

적어도 그때의 정한은 그랬다.

그렇게 말없이 밤하늘만 올려다보아도 좋았다.

가득 차오른 달이 소현 같고, 반짝이는 별이 소현 같았다.

아주 오랜만에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붓질을 한다면 견딜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전화가 왔다. 앤드류였다.

“……귀신이네.”

- 왜? 내 생각 하고 있었어? 아니면 혹시! 작업해? 설마?

하는 건 아니고, 하고 싶다 생각만 했는데도 어떻게 알고.

“아니.”

- 사랑에 빠져서 뭐에 쓰나. 그 설레는 마음을 예술로 승화하란 말이야. 작업을 하라고, 작업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도 싹 사라지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앤드류 요정은 현재 뉴욕이었다.

정한은 화제를 바꾸었다.

“준비는 잘되어가고?”

- 그래. 주인공 없는 전시, 아주 잘 돌아가지. 새 작품이 몇 년째 안 나오는데도 전시 소식에 여전히 관심폭발이네. 여기저기서 난리야.

예술가의 작품을 여러 산업과 매칭하며 수익과 가치를 올리는 쪽에 공을 들이는 앤드류 베이커와는 다르게, 그의 아버지는 전통적인 아트 딜러의 역할을 고수했다.

다만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베이커 부자의 견해는 일치했다.

앤드류의 권유로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갔던 정한은 그 부자에게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어머니 때문에 다시 하와이로 돌아갈 때까지 뉴욕생활이 이어졌었다.

잠깐일 줄 알았던 하와이 체류는 뜻하지 않은 어머니 병환으로 길어졌고, 작품활동을 오랫동안 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베이커 부자는 아직 제이 라르고의 작업실을 뉴욕에 그대로 남겨두고 있었다. 언제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활동을 중단한 라르고의 지난 작품들이 현재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앤드류 베이커의 노력도 큰 역할을 차지했다.

- 그래서 한, 이번에도 진짜 안 올 거야?

베이커의 대형 화랑에서 오랜만에 열리는 라르고 특별전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참여, 그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작업한 결과물을 주제로 했다.

전시 이전부터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많은 셀러브리티까지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앤드류답게 화제성을 겸비한 기획이었다.

“아직도 그 얘기야?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라니까.”

- 못 오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겠지.

“정확하네.”

어차피 제이 라르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전시에 꼭 있어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앤드류는 정한이 직접 와서 봐주기를 늘 바랐다.

하지만 정한은 굳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조르듯 오라고 말하는 앤드류를 모른 척해왔다.

- 남의 작품도 아닌데 그렇게 물러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나라면 머리에 얹고 다닐 텐데. 내 거라고 자랑하면서. 우리 하니는 어디서 도 닦고 내려왔나?

평생을 타국에서 이방인처럼 살아왔던 시간들.

지나친 관심도 받아봤고, 지나친 외면도 받아봤다.

더 이상 성가신 세상 속에서 구경거리로 살고 싶진 않았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라르고에 대해 온갖 소문과 루머까지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정한은 스스로를 내세워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리는 게 좋아 그렸을 뿐, 이대로 누리는 평온이 명성과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할 뿐.

그뿐이었다.

삶을 어떻게 증명해낼 수가 있을까.

그저 살아가는 게, 전부인데.

“나중에 사진이나 보내줘. 구경하게.”

- 알았다, 알았어.

그럼에도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축복임을 알고 있다.

앤드류와의 일상적인 통화를 끝내는 정한의 표정은 어둠 속에서도 맑고 환했다.

이모의 말처럼, 딱 지금처럼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다.

참 좋은 날들이었다.

◇ ◆ ◇

“상담이 또 있어?”

“네, 바로 가을에 식 올리는 신부님이라 미룰 수가 없대요.”

일이 밀려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소현과 애주는 의아해할 사이도 없이 눈앞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태랑의 식 준비도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실무를 담당하는 임 실장이 아닌 류재언과의 미팅이 자주 잡혔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워낙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라 직접 관리하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 사이 소현은 발목이 회복되어 반깁스를 풀었다. 그래도 정한은 아침마다 집에 와서 사무실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소현은 그의 차에서 매번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고, 따로 데이트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탐미재 나무 그늘을 바라보며 정한이 내려주는 커피 한 잔 마시는 순간이 간절해지던 날.

바쁜 일상 속에서 류재언이 프린트된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아침저녁으로 사무실로 불러 내리던 그였기에 아무 생각 없이 소현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뉴욕행 비행기 전자항공권과 호텔 바우처, 화랑 및 전시 안내, 일정표 등이었다.

“이게 뭐야, 나 뉴욕 가?”

“이번에 베이커 갤러리에서 제이 라르고 특별전이 있어.”

화집을 구해오라며 하루아침에 소현을 뉴욕으로, 파리로 내보냈던 류재언이었다.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거기까지 가야 해? 언젠데?”

“내일.”

차갑고 격한 풍랑이 저 멀리부터 몰아쳐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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