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23화 (23/52)

23화– 어둠 속을 헤매는 떠돌이별처럼2017.09.18.

류재언 대표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에 그의 회사는 들썩거렸다.

무쇠처럼 강해 보이던 류재언이 쓰러지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없었기에.

“실려 가실 분이 아닌데. 혹시 무슨 큰 병 생긴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해외 일정 연속으로 소화하면서 며칠씩 밤새우며 일할 땐 진짜 인간이 아니다 싶었는데, 대표님도 사람은 사람이었네.”

직원들이 이렇게 떠드는 것을 안다면, 수액 바늘을 꽂은 채로도 기어이 출근을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류재언은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제대로 누운 게 며칠 만인 듯 깊게 잠이 든 모습이었다.

쓰러지는 순간 옆에 있었던 소현은 발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통제도 삼엄하다는 이곳, 호텔 스위트룸만큼이나 고급스러운 VIP 병실 안이었다.

같이한 세월은 무시할 수 없었다.

소현은 류재언의 가족 주치의가 있는 병원이 어디인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고, 그의 비서에게 전화해 재언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전할 수도 있었다.

비서의 연락을 받은 재언의 어머니가 오기로 했다. 그 전까지 입원수속을 하고 병실을 지키는 동안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한때 결혼을 앞두었던 사이였음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죽도록 아파도 절대 내색 안 하던 애가, 얼마나 아팠길래.”

잠든 류재언의 얼굴을 보며 소현이 중얼거렸다.

의사는 분명 과로와 피로 누적일 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류재언은 마치 죽을병이라도 걸린 듯 힘들어하던 얼굴이었다.

“얘도 이제 엄살이 생겼나.”

다른 사람에게는 들키기 싫었는지, 그나마 만만한 자신을 비상계단까지 끌고 가서 아프다 털어놓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놈의 자존심 여전하네.

그때 소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병실 안에서, 그것도 환자 바로 옆에서 통화할 수는 없기에 얼른 침대 곁을 벗어났다. 이제는 목발도 없이 한 발로 무게중심을 두며 걷는 건 꽤 익숙해졌다.

소현은 침대 곁을 벗어나 응접실 쪽으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 잘 잤어요? 집이죠?

“아니요. 집에 갔다가 나왔어요.”

정한이었다. 소현은 대답하면서도 그저 좋아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휴대전화 액정에 뜬 이름만 봐도 좋았고, 전화를 받자마자 잘 잤냐고 물어오는 목소리도 참 좋았다.

누군가의 하루에 온전히 스며든 기분이 이렇게 좋은 줄 예전에는 전혀 몰랐다.

“사무실에 갔었거든요. 참, 탐미재 장소 허락해준 거, 고마워요.”

-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일은 아니지만, 그 말 하는 은소현 씨 얼굴 되게 보고 싶네요.

“네?”

- 지금 표정 엄청 귀여울 것 같아서.

말문이 막힌 소현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한은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 그런데 왜 혼자 갔어요? 나 깨우지.

“……어떻게 깨워요. 자고 있는데 미안하게.”

어스름한 빛이 스미던 새벽, 소현은 자신이 눈을 뜬 곳이 낯선 침대 위라는 사실에 문득 놀랐다.

그리고 옆에 앉은 채 엎드려 잠든 정한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고.

편하게 고쳐 잘 수 있도록 정한을 깨워야 할까 싶었지만, 일어나면 오히려 자신을 데려다주거나 챙겨준다고 할 것만 같았다.

괜히 그를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소현은 도저히 깨울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젯밤 어쩌다 잠이 들어버린 것도 부끄러웠고, 일어난 이상 대놓고 아침까지 버티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소현은 침대에서 살며시 내려왔다. 발에 닿는 러그 감촉이 참 보드라웠다.

그가 살고 있는 공간인 듯했다.

탐미재 안채에 이렇게 잘 꾸며진 생활공간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새롭고 신기해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주인이 자고 있으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탐미재를 나선 새벽이었다.

- ……은소현 씨, 밤새 웃더라구요.

“내가요? 밤새?”

- 장소 대관 약속 받은 거, ……정말 좋았나 봐요.

“아…… 진짜 좋았나 보다. 창피해. 그걸 밤새 봤어요?”

- 예뻐서.

간결한 대답에 소현의 뺨이 또 붉어졌다.

“왠지 창피해서 빨리 나오고 싶더라니…….”

- 아침밥도 해주고, 내가 데려다주려고 했었는데.

“아우, 아니에요. 괜찮아요.”

- 다음에는 먼저 가지 말아요.

소현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이건 또 무슨 뜻이야. 다음엔 먼저 가지 말라니.

이렇게 헷갈리게 말하면 나 막 내 마음대로 생각해버릴 건데, 하면서 괜히 속으로 헛된 꿈을 꿔보는데 정한이 어떻게 알았는지 덧붙여 말했다.

- 나랑 꼭 아침도 같이 먹어요.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소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는 노골적인 표현보다, 같이 아침 먹자는 말이 훨씬 더 설렜다.

숨은 뜻이야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제부터 소현에게 있어 아침밥은 무조건 설렘으로 각인되었다.

통화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에너지도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 오늘 탐미재는 안 열어요. 어머니한테 가는 날이거든요.

“아, 그랬구나. 오후에 내가 탐미재로 가려고 했었는데.”

- 그럴까 봐 미리 얘기하는 거예요. 병원 다녀오면 저녁쯤 되니까 내가 은소현 씨 동네로 갈게요.

“아니, 뭐, 멀리 갔다 오면 피곤하잖아요. 꼭 안 봐도 괜찮은데…….”

- 내가 안 괜찮은데. 그냥 기다리고 있어요.

“그럴게요.”

어떻게든 얼굴을 보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져 소현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요.”

- 얘기해요.

“오늘 가면 내 안부는 전할 수 없겠지만……, 내 몫으로 손 한 번만 잡아주세요.”

정한의 어머니 얘기였다.

소현의 기억 속에도 그녀의 천진한 미소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지금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이 또 한 번 기적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인연의 힘은 참 강했다.

- 그럴게요. 기뻐하실 거예요.

정한은 무척이나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그때, 낯익지만 굉장히 오랜만인 음성이 들려왔다.

“소현이구나.”

고개를 돌린 소현의 시야에 류재언의 어머니, 나미정 교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 ◆ ◇

“들었단다. 재언이 건물에서 요즘 사무실 쓰고 있다면서.”

소현은 정한과의 통화를 끝내고 바로 나 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형식적인 안부인사 끝에 들은 말에 그만 면목이 없어졌다.

헤어진 마당에 아들과 이렇게까지 엮여 있는 여자를 어느 부모가 좋아할까 싶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아니, 교수님.”

파혼 후 첫 대면이었다.

3년이나 흘렀건만 툭 치면 아직도 ‘어머님’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버릇으로 남아 있었다. 낭패스러워 소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나 교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죄송하긴. 네가 죄송해할 일이 뭐 있니. 사무실 필요해서 구해 쓰는 걸 가지고.”

한때 시어머니가 될 뻔했던 그녀는 기억처럼 상냥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재언이랑 안 보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그 얘기 듣고 사실 놀랐었거든. 그래서 말 꺼낸 거지, 너한테 뭐라 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교수님’ 소리 서운해, 그냥 전처럼 ‘어머님’이라고 해줘. 갑자기 바꾸고 그러면 낯설고 적응 안 돼.”

“아, 네……. 잘 지내셨죠? 아버님도요.”

“그럼. 우리야 늘 잘 지내지. 문제가 없는 게 제일 문제잖니.”

물론 소현도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나미정 교수와 류태훈 부부의 일상은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재언이 쓰러졌다고 네가 병원에 데려온 거 보니까, 내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나 교수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재언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땐 사실 이른 나이라고 생각해서 좀 탐탁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는데, 막상 널 소개받고 보니까 참 마음에 들었었거든. 인상도 좋고 싹싹하고 바르고……. 내가 너 정말 예뻐했던 거, 너도 알지?”

“……그럼요. 알죠.”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가다 만날 일이 있으면 나 교수는 살갑게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는 했었다.

류재언은 외아들이라 나 교수 부부에게는 딸이 없었고, 소현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면 소현은 그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예쁨 받는 며느리이자 딸이 되어야지 다짐하기도 했었다.

하늘에 있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채우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파혼을 해서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난 우리가 가족이 될 줄 알았는데.”

아무리 오랜 친구 사이였다지만, 막상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반대가 심할 거라 생각했었다.

류재언에 비해 조건이 심하게 기우는 소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거니 했다. 하지만 의외로 부모는 선선히 허락을 했었다.

모든 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인연이 끊어진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니.”

“어머님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나 교수는 손을 뻗어 소현의 두 손을 잡았다.

“소현아.”

지금도 그랬다.

자신의 존재가 아들의 창창한 앞길을 막는다며 불쾌해하지나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결국 인연은 다시 맺어지게 되어 있나 봐. 너희가 이렇게 같이 있는 걸 보면.”

너무도 친절하고도 호의적인 태도였다.

“웬만하면 재언이가 일찍 결혼해서 안정 찾고 일하면 좋겠다고, 재언이 아버지랑 나랑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 재언이 아버지는 선이라도 보게 하려는 모양인데 걔가 그런 거 좋아할 애도 아니잖니. 이제는 너도 옆에 있고.”

하지만 소현은 나 교수가 덥석 잡은 손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제 손을 빼내었다.

친절을 ‘베풀던’ 나 교수의 눈에 잠시 당황스러운 빛이 스쳤지만, 시선을 내리고 있던 소현은 이를 보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재언이와 저 그런 사이 아닙니다.”

순간 날카로운 침묵이 공기를 갈랐다.

“서로 마음 두고 있는 사이도 아니고, 결혼으로 다시 발전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에요.”

힘겹지만 소현은 그의 어머니 앞에서 다시금 단언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혹시 모를 가능성도, 전혀 없어요.”

잠시 침묵을 유지한 나 교수가 천천히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재언이 옆에 가까이 있는 이유는 뭐였니?”

“……제가 돈을 빌렸어요. 처음에는 다른 곳에 사무실을 얻으려고 했었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재언이가 도와줬고 지금 사무실도 내준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빚을 진 거죠. 어머님, 재언이 제 채권자구요, 제 임대인이에요. 저 다른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렇게 재언이한테 도움 받고 있었던 건데. 오해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랬구나. 아는 사이끼리 도와줄 수도 있는 거긴 하지. 네가 죄송할 게 뭐 있니.”

아쉬운 듯 나 교수가 덧붙였다.

“그런데 정말 가능성 없는 거니?”

“네. 제가 얼른 빚 갚고 사라져주는 게 재언이 인생에 도움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류재언이 결혼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니 더더욱 그랬다.

앞으로 결혼해야 할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전 약혼자가 주변에서 맴도는 꼴이 얼마나 기분 나쁠까.

소현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나 교수가 희미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재언이가 정말 많이 서운하게 했었구나.”

“네?”

“아니다.”

나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미나 전에 잠깐 들른 거라 난 이만 가봐야겠다.”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나 교수를 소현이 조심히 불렀다.

“그런데 어머님.”

“응?”

“재언이 안 보고 가세요……?”

“아.”

돌아본 나 교수가 찡긋 웃었다.

“내 정신 좀 봐.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아들 병문안 와서 아들도 안 보고 그냥 갈 뻔했네.”

나 교수는 소파를 지나쳐 침대가 있는 병실 쪽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소현은 이질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냥한 미소와 태도는 여전했으나 어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태도 사이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 ◆ ◇

“말도 안 돼…….”

애주는 충격에 휩싸였다.

류재언에 이어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은 자신 차례인 것 같았다.

“언니, 나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예요……?”

어지러웠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류재언의 병원에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소현이 할 말이 있다며 전해준 이야기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치, 놀랍지?”

하와이에서 생긴 사건의 전말, 탐미재에서 소현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경위, 정한의 느리지만 확실한 고백까지.

그중 가장 충격인 건 개쓰레기는 개쓰레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을 단번에 뒤집어 받아들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믿고 있는 정황이 있는 이상, 그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 언니가 설마…….’

속은 건 아니겠지!

속고 또 속고, 다시 속고, 뭐가 진짜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미아가 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소현의 반응과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미아가 된 건 애주 본인인 듯했다.

그만큼 애주는 사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니, 진짜 너무 너무 잘됐어요!”

일단 축하부터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하와이에서 오해를 하기 직전까지는 한이라는 그 남자와 소현과의 만남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애주였던가.

두 사람이 정말 잘되었으면 좋겠다며 소현을 열심히 응원하고 밀어주었었다.

이제 오해를 말끔히 씻고 다시 시작할 단계에 들어섰다는데 애주도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는 바로 류재언 대표 때문이었다.

애주는 그가 마음에 크게 걸렸다.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찾아와서, 소현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도와달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성격에 그 정도면 무릎 꿇고 읍소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정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류재언, 진심인 것 같던데…….

“언니.”

애주는 소현의 어깨를 잡고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언니는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와이 있을 때와 달라졌어요, 아님 같아요?”

두 사람이 사귄다는 얘길 명확히 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소현의 생각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담담하게 얘기를 털어놓던 소현의 얼굴에 순간 사르르 미소가 번졌다.

“……더 좋은 것 같아.”

“더?”

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 그 자체였다.

“돌이켜 보니까, 서정한이 한국에 나타났을 때부터 사실은 좋았던 것 같아. 그때의 충격이 너무 심해서 좋아하면 안 된다, 나 스스로 자꾸 제어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긴, 정말 미치도록 싫었다면 탐미재 근처에도 가지 않았겠지.

그러면서도 위험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애써 조심하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좋아하는 이에게 향하는 마음을 억지로 가로막는 건 참으로 어려웠을 테니.

누구나 그렇듯.

“그런데 이렇게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되니까, 이젠 제어를 하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고……, 꿈만 같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게 믿기지가 않고, 신기하고 그래.”

“아…….”

“그래서 그때보다 더 좋아. 하와이에서 봤을 때보다.”

여행지에서 잠깐 스치듯 만난 것이 아니라, 이제 서로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게 되었으니 안정감까지 더해졌다.

“언니…….”

소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애주가 팔을 벌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애주가 가장 바랐던 모습, 소현의 웃는 얼굴이 진심으로 예뻐 보였다.

울컥하니 코끝이 찡해지고 괜히 감정이 올라왔다.

“언니 행복하게 웃는 거 보니까 너무 좋다. 잘됐어요, 진짜.”

사랑에도 알맞은 시간이 있기에.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예정된 아픔.

사랑을 깨닫고, 고통을 깨닫고, 행복을 깨닫고, 고독을 깨닫고.

그리하여 모두의 인생은 여러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 ◇

그 시간.

병실 창가에 선 류재언은 말없이 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깨워요. 자고 있는데 미안하게.」

정신이 들었을 때 병실 안 응접실 쪽에서 들려온 건 은소현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 진짜 좋았나 보다. 창피해. 그걸 밤새 봤어요?」

「그랬구나. 오후에 내가 탐미재로 가려고 했었는데.」

누구와의 대화인지 너무도 분명했다. 결국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을 연이어 듣고 말았다. 어젯밤, 누구와 밤새 함께 있었는지까지.

그뿐인가. 어머니가 오신 후 은소현이 했던 말들.

「어머님, 죄송하지만 재언이와 저 그런 사이 아닙니다.」

「제가 얼른 빚 갚고 사라져주는 게 재언이 인생에 도움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이 재언의 가슴을 헤집었다.

결국 재언은 병실에서 하루도 채 쉬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대로 갇혀 있을 수가 없었다.

휴대전화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건조한 눈빛으로 밖을 바라보며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가야 할 곳이 있으나 제 자리가 아니라 하니 재언의 마음은 그저 고통으로 물들었다.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떠돌이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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