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랑하는 마음은 그저 어리석고2017.09.15.
아무리 늦여름이라 해도 새벽이 되면 바깥공기는 추울 것 같았다. 이대로 소현을 평상 위에서 계속 재울 수가 없어 정한은 그녀를 안아들고 안채로 왔다.
소현을 공주님처럼 안고 선 채 정한은 소파와 침대 중 어디로 가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남자의 침대에 허락 없이 눕혔다고 소현이 언짢아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소파보다는 침대가 편할 것 같아 결국 그 위에 조심히 올렸다.
정한은 바닥에 앉아 침대에 팔을 얹고는 소현을 바라보았다.
탐미재를 결혼식 장소로 허락해준 것이 그렇게 좋았을까. 잠든 소현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배어 있었다.
자면서도 웃는 여자를 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정한은 결국 한참 동안 소현을 보고 또 보다가 침대 옆에 앉은 채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침대는 비어 있었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은 정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현을 찾았다.
꿈은 아니었겠지.
설마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지.
그러다 얌전한 글씨로 적힌 메모가 베개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신세 져서 미안하고, 재워줘서 고마워요. 집에 갔다가 오후에 다시 올게요.]
눈앞에서 사라진 소현이 그만 못 견디게 보고 싶어진 정한은 메모지를 손에 쥐고 하염없이 내려보았다.
잠깐도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듯, 그새 내려앉았던 심장이 이제야 쿵쿵 울렸다.
잠든 눈 아래 웃음기가 스미었던 그녀의 입가를 눈앞에 생생히 그릴 수도 있었다.
제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알까.
한없이 쓰다듬고 몇 번이나 입 맞추고 싶었던 내 마음은 알기나 할까.
참느라, 견디느라, 애타던 괴로움. 아마 모르겠지.
하지만 괴로운 밤마저 더없이 좋았음에, 정한의 새벽은 따듯한 기운으로 충만하였다.
탐미재에 화사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 ◆ ◇
다른 한 남자, 재언의 새벽은 차고 싸늘한 공기에 잠식당했다.
미약한 바람도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베었다.
같은 옷과 가방, 신발.
소현은 전날과 꼭 같은 차림으로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었다.
애써 깊은 생각은 몰아냈다. 그 어떤 예상도 도움이 되진 않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성과는 다르게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꽉 막히고 심장이 죄어져 마른 숨조차 내뱉어지질 않았다.
아픈 곳도 없는데 몸과 마음 가득히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상처는 한 번만 주세요. 두 번 아프게 하면 사람이 어떻게 견뎌요. 언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말 모르시는 거 아니죠?」
벌을 받는 것일까.
아프게 하고, 그 아픔을 모른 체했다고.
쓸데없는 감정에 인생을 낭비한다고 치부했던 지난 시간에 노여워한 신이 이내 벌을 내리는 것일까.
「……전, 언니가 이젠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거든요.」
나의 곁이, 그녀에게는 곧 불행이었던 걸까.
「류 대표님은 아마, 크게 후회하실 거예요.」
한없이 미숙하였던, 그래서 돌아볼 방법을 몰랐던 재언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하얀 재가 된 마음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흩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텅 비었다.
이 아픈 마음은 분명, 사랑이었다.
◇ ◆ ◇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도와달라고 했어.”
애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전에 출근했더니 평소와 다름없이 슈트를 말끔하게 빼입은 류재언이 사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뭐가 급해 이렇게 아침부터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웬일이시냐며 사무실 문을 여는데, 따라 들어와 하는 소리가 대뜸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뭐, 뭘요?”
한참 뻔뻔한 태도를 고수하더니 갑자기 사람이 왜 이래?
“내가, 은소현을.”
이런 얘기는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지 잔뜩 딱딱하게 굳어서는.
“은소현을.”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하려는 것처럼 힘겹게.
“……은소현을.”
버퍼링 걸린 동영상처럼 같은 구간만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말해버렸다.
멍하니 서서 류재언을 바라보던 애주의 입술에 서서히 웃음이 퍼졌다.
이내 애주는 싱긋 미소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쵸? 맞죠? 대표님 울 언니 좋아하는 거 맞죠?”
이제야 속이 후련한 듯 애주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좋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러냐구요. 좋아하는 걸 어떻게 숨겨요.”
“어떻게 도와줄 건지나 얘기하시죠.”
류재언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긴 다리를 꼬았다.
잠시 기분이 들떴던 애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저 남자, 저런 남자였지.
“저기요. 류재언 씨? 뭔가 착각을 하시는 모양인데요.”
갈 길이 먼 양반이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참으로 막막한 양반.
대표님 호칭도 날려버리고 애주는 정면으로 승부했다.
“자, 류재언 씨, 잘 들으세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도 모르시나 본데, 지금 약자에다 을은 바로 류재언 씨거든요?”
“그래서 내가, 무릎 꿇고 도와달라고 빌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저한테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목에 힘주실 필요까진 없잖아요. 앞일을 도모하시려거든 그 태도부터 고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류재언의 눈빛을 보면서, 애주는 아무래도 저 남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는 류 대표님 직원도 아니구요, 대표님한테 빚진 것도 없구요, 그냥 우리 소현 언니 따르고 사랑하는 동생일 뿐이거든요. 그러니 대표님, 아니, 류재언 씨? 제 도움 받고 싶으시면 그 목에 힘부터 빼세요. 아무래도 그게 제일 먼저 도와드려야 할 일 같아 보이네요.”
그냥 뒀다가는 소현에게 가서 ‘내가 널 좋아하게 됐으니, 너도 날 다시 좋아하도록 해.’라고 요구나 해댈 게 뻔했다.
그건 소현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이다. 애주는 소현이 다시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다.
애주는 부모의 애정과 관심 속에서, 그리고 남자친구와의 몇 번의 연애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도 겪고 평범한 행복도 느껴왔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소현이 아픈 손가락처럼 늘 마음 쓰이곤 했었다.
부모를 잃어서.
그리고 애인이 곁에 있긴 해도 정작 마음을 나누지는 못해서.
그렇게 소현은 늘 혼자나 다름없는 이십 대를 보내왔었다.
내가 뭐 어린앤가, 괜찮아.
애주의 걱정에 소현은 그렇게 말했었다.
어린 시절도 아닌, 성인이 될 즈음부터 겪게 된 일들이라 누구에게도 마음껏 꺼내놓지 못했을 그 아픔이 오히려 소현을 더 외롭게 했을 터였다.
겉으로 밝은 모습을 보이고, 혼자 울었을 소현을 헤아릴 때마다 마냥 안타까웠다.
애주는 소현 역시 평범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생애 가득 사랑을 촘촘히 채우며 살아가길 바랐다.
아픔이나 외로움은, 지금까지 홀로 달려온 시간으로 충분할 테니까.
“좀 굽히셔도 돼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좀 약해지셔도 된다구요.”
그 말에 류재언의 눈빛이 깊어졌다.
생각이 많아지는 듯 미간을 약하게 찡그리기도 했다.
애주는 그래도 류재언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큰 성과라 생각하며 어떻게든 열심히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월의 힘은 너무도 강한 물결이기에.
거스를 수 없는 인연이라 이리도 가까이 있는 것이라 믿었기에.
애주는 류재언이 각성만 하고 나면 두 사람의 사랑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뜻밖의 복병을 애주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요동치는 파고가 한껏 높아지고 있음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애주야, 나 왔어!”
소현의 목소리가 사무실 문 쪽에서 들려왔다.
“언니! 어떻게 왔어요? 다리는 좀 괜찮아요? 오늘은 내가 탐미재에 가볼까 했었는데!”
애주는 벌떡 일어나 소현에게로 다가갔다.
“어휴, 나 하나도 안 아파.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극진하게 반기는 애주가 무안한 듯 소현은 손을 내저었다.
“류재언, 넌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그리곤 재언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재언은 그저 소현의 아래위를 훑듯이 바라볼 뿐이다. 제 옷차림을 뚫어질 듯 쳐다보는 시선에 소현은 불퉁하게 내뱉었다.
“얘가 왜 스캔을 하고 그래.”
소현은 새벽에 집에 들어가 서둘러 갈아입고 나온 원피스가 혹시 뒤집혀 있기라도 한 건 아닐까 얼른 내려보았다.
“멀쩡하기만 하네, 또 무슨 생트집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서.”
자신의 겉모습에 하자가 전혀 없음을 확인한 소현은 당당하게 소파로 가서 앉았다.
“됐고. 암튼 류재언 여기 온 김에 말할 거 있어. 같이 듣고 가.”
“뭔데요?”
애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했다.
막상 말하려니 기쁜 듯 소현은 잠시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요? 얼른 얘기해요.”
“있잖아. ……결혼식.”
“결혼식?”
“해도 된대!”
“네?”
“탐미재! 하태랑! 장소 대관해준대!”
놀란 애주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꺄악,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소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 고생했어요! 어흑, 어떡해. 너무너무 고생했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감격한 목소리였다.
그간 소현이 탐미재에 드나들며 그 꼿꼿한 주인을 설득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기에 기쁨은 더욱 크기만 했다.
두 여자가 얼싸안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재언이 입을 열었다.
“허락은 언제 받았지?”
소현이 여전히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어젯밤! 따끈따끈한 소식이지?”
재언은 소현의 답을 읊조리듯 되뇌었다.
“어젯밤이라…….”
알 수 없는 통증이 또 한 번 가슴을 스쳤다.
“언니, 진짜 너무 잘됐어요. 하태랑 씨도 정말 좋아하겠다! 그런데 그 주인, 절대 허락 안 해줄 것 같더니 어떻게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대요?”
“글쎄……?”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소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보고야 말았다.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워진 재언은 벌떡 일어섰다.
“왜 일어나? 할 얘기 아직 많은데. 하태랑 씨 미팅 일정도 잡아야 하고, 내가 당분간은 탐미재에 가서 주인한테 장소에 관한 얘기도 좀 듣고, 식 진행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상의도 디테일하게 해야 하…….”
“담당자와 상의해. 내가 실무까지 관여할 시간 없어.”
소현의 말문을 막으며 재언이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현의 어깨 너머 뒤에 있던 애주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X자를 그렸다.
‘그따위 태도는 절대 안 된다니까요!’
애주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재언은 이미 튀어나온 말과 태도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찌 첫술에 배부를까. 달리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재언은 평소처럼 차갑게 돌아서고 말았다.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할 때마다 가슴을 베는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그의 일갈에도 이력이 난 듯 소현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임 실장님이랑 상의하면서 일단 준비 진행하고 있을게!”
햇살처럼 따사로운 음성에 재언은 무너질 듯 아팠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소현과 애주가 기쁜 목소리로 탐미재 대관에 대해 나누는 대화가 새어나왔지만, 재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젯밤 혹시 어디에 있었냐고, 누구와 함께 있었냐고, 묻고 싶은 제 마음이 너무도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남자와 밤을 보냈다면.
만약 생각하는 게 맞다 해도 대체 뭘 어쩔 텐가.
소현이 원해서 스스로 결정한 일을 간섭할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이제는 화를 낼 수도, 추궁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친구도, 애인도, 결혼도 다 그만두자고 했었고, 모든 관계를 정리하며 자신을 놓아버렸었다.
인정하지 못한 그는 다시 제 곁으로 소현을 끌어들였으나, 그녀는 이미 멀리 떠나 있었다.
이제야 현실이 눈에 보였다.
은소현을 좋아한다고 인정해버리자 모든 게 제대로 보였다.
그때였다.
“너 아직 안 내려갔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소현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재언은 제가 꼼짝도 못 하고 밖에 내내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참했다.
자신의 꼴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사랑이란 게, 이토록 비참한 거라면.
……그동안 너는 어떻게 내 옆에 머물고 있었니. 은소현, 너는 그 시절 어떻게 나를 견디고 사랑했던 거야. 어떻게…….
“류재언?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말없이 서 있는 재언을, 소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적막한 복도.
사무실 안쪽에서 차애주가 어느 신부와 통화하는 소리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언은 소현의 손목을 잡았다.
“어엇.”
소현은 반깁스한 발에 힘을 뺀 채 다른 발로 통통 튀듯 깃털처럼 가볍게 이끌려 왔다.
탑층에 위치한 사무실이라 비상계단은 유난히 호젓했다.
계단 위 한쪽 벽에 소현을 세운 재언은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두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소현의 피부가 이리 맑았는지, 눈동자가 이리 검고 아름다웠는지, 콧날이 이리 진주처럼 어여뻤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난날이 애처로웠다.
“얘가 왜 이래? 혹시 너 어디 아파?”
소현은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른 재언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볼 뿐이다.
바꿔 얘기하면, 자신은 그녀에게 이제 어떠한 긴장도, 설렘도 줄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했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소현이 느꼈을 비참함과 외로움이 부메랑처럼 제게 돌아와 아프게 박혀들었다.
“……그래, 아파.”
나직하게 내뱉었을 때, 비로소 소현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높이 들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리 크게 앓아도 아프단 소리 한번 해본 적 없던 재언이기에, 소현은 그제야 당황을 했다.
“류재언, 너 진짜 왜 이래? 어디가 아픈데?”
자신에게로 온전히 향해 있는 이 순간 소현의 눈빛이 좋았다.
그 밤, 누구와 함께 보냈든, 어디서 보냈든, 어떻게 보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 아무 일 없었다 해도 그저 누군가와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실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너절한 질투에 불과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저 어리석고, 예측할 수 없는 풍랑에 뒤흔들릴 만큼 너무도 약했다.
“열나는 거 아니야? 류재언, 병원 가야 될 것 같은데?”
자신의 이마를 짚는 소현의 손이 차가웠다. 아니, 제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운 걸 몰랐다.
재언은 벽을 짚은 채 몸을 숙여 소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타들어가는 건 뜨거운 이마가 아니라, 여전히 가슴이었다.
찢기고 헤쳐지는 괴로움에 재언은 애타게 구원을 바랐다.
“은소현. 아파서 미칠 것 같다, 나…….”
핑글, 눈앞이 돌았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세상이 거세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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