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은은한 빛을 머금은 존재2017.09.11.
“우리, 와인 한잔할까요?”
탐미재에 좀 더 머물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정한이 와인을 권했고, 소현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리운전도 있고, 택시도 있으니 은소현 씨 집에 데려다주는 건 걱정하지 말아요.”
“네, 한 잔 주세요.”
투명한 잔에 맑은 루비 빛깔 와인이 채워졌다.
마음도 그득히 차올랐다.
붉은 술과 함께 운치 있는 밤이 깊어갔다.
◇ ◆ ◇
자연스럽게 시작된 이야기는 오늘의 ‘탐미하는 밤’에 대한 것이었다.
부쩍 관심이 높아진 소현이 물었다.
“앞으로 또 언제 해요? 주제는 매번 다르다면서요. 다음에 뭐 할지 궁금해요.”
“날짜는 비정기적이라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주제는 ‘내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이요?”
정한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네. 전에 어떤 손님이, 딸과 함께 오고 싶은데 조용한 곳이라 다른 손님들한테 방해가 될까 봐 망설여진다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여기가 아이들 데리고 쉽게 찾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긴 하죠.”
“그렇긴 해요.”
“그 얘기 듣고 SNS에서 수요조사를 해봤는데, 아이들 데리고 오고 싶다는 분들이 좀 있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생각 중이에요. 날 잡고 아예, 아이와 함께하는 밤을 준비해도 좋겠다 하구요.”
“그럼 아이들이랑 같이 보물찾기를 할 수 있겠네요?”
“보물찾기요?”
정한의 되물음에 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손님들이 그림 찾던 모습이 꼭 보물찾기하는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보물이라…….”
소현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한의 얼굴에는 특유의 말간 웃음이 곱게 퍼졌다.
붉은 보석 같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소현은 살짝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늦은 밤의 탐미재는 처음인데,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워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상 위 낮고 작은 테이블에는 촛불이 흔들흔들, 아롱거렸다.
“여기서 텐트치고 밤새 책 봐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텐트요?”
“네, 그 행사는 첫차가 다닐 때까지만. 딱 한밤의 깜짝행사처럼. 별거 안 하고 그냥 여기 있는 책만 볼 수 있어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요. 도시 속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마음 다 알겠다는 듯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텐트 치고 지새우는 ‘탐미하는 밤’, 좋은데요. 해보고 싶어요.”
“그냥 생각만 해봤어요. 그건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괜히 번거롭기만 할 거고.”
“번거로우면 번거로운 대로. 해보고 별로면 다음에 안 하면 되죠.”
기획 하나만으로도 소현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채워버린 수많은 준비사항들도 정한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쩜 그렇게 걱정이 없을까.
뭐든 애태우지 않는, 그의 여유 넘치는 태도에 소현의 마음도 잔잔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냥 느긋하기만 한 사람은 또 아니었다.
정한은 소현이 꺼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노트를 가져와 새로운 ‘탐미하는 밤’ 아이디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날을 잡을 듯한 기세다.
의외로 추진력 강한 면이 신선했다. 하긴, 그러니 이런 책방도 혼자 운영해나갈 수 있는 거겠지 싶다.
“와, 근데 그림 진짜 잘 그리네요.”
무심코 정한이 노트에 스케치하던 모습을 보고 있던 소현은 깜짝 놀랐다.
그는 순식간에 탐미재 정원을 그려내고 그 위로 아담한 텐트들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대략 몇 개의 텐트를 배치할 수 있는지, 그리고 동선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그림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슥슥 빠르게 그리는 것 같은데도 꽤 세세했다.
“아니에요. 그냥 대충인데.”
순간 정한이 멋쩍게 웃었다.
내내 속 깊은 어른 같던 정한이 지금만큼은 마치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현의 가슴이 또 쿵쿵 울렸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한참 오빠 같은가 싶더니 또 이럴 땐 영락없는 연하로 보였다. 귀여워 안아주고 싶을 만큼.
“어떻게 이렇게 금방 샤샤삭 그리지? 진짜 여기 탐미재네요? 이거 나무고, 여기 평상, 우리 앉아 있는 곳이고.”
소현은 정한의 그림을 마냥 신기한 눈빛으로 보며 감탄했다.
“와아, 신기하다. 왜 이렇게 잘 그리지?”
정한의 눈에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소현이 오히려 더 귀여웠다. 그림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스케치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이 노트 더 구경해도 돼요?”
실례일까 싶어 살살 묻는 태도도 귀여웠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 조심스러울까.
“봐요.”
얼마든지.
정한은 웃으며 자, 하고 노트를 소현에게 밀어주었다. 그 노트 안에는 탐미재에 대한 정한의 생각들이 스케치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와……. 여기가 전엔 이랬구나, 책장 위치를 바꾼 거네요? 어, 이거 평상, 서정한 씨가 목공소에서 맞춰 온 거였구나. 우와.”
그동안의 기록들을 그림으로 보며 소현은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정한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간 소현도 이곳으로 출퇴근하는 동안 탐미재에 대한 애정을 차곡차곡 쌓아온 것처럼 보였다.
앤드류가 잠시 다녀갈 때 외에는 늘 혼자 있었던 정한은 텅 비어 있던 마음이 갑자기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님들이 탐미재를 아끼고 좋아해주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혹시 나, 외로웠나. ……그랬던 걸까.
그때 소현이 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리고 아까 보니까 결혼에 관한 명화들도 많더라구요. 모아서 봐도 좋겠다는 생각 들었어요. 여기 와서 그림 보는 게 마음도 참 편안해지고 그러니까, 결혼 준비하는 예비 신랑신부님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획도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샘솟는 아이디어는 정한으로서도 새롭고 신기했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맞아요. 결혼 주제로 한 그림도 많고, 로맨틱한 명화들도 많으니까.”
“나 사실 마음이 가는 그림도 하나 찾았어요, 아까.”
“어떤 거예요?”
소현은 마시던 와인잔도 놓고 일어섰다. 서가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정한은 가만히 보다가 생각했다.
그림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이곳, 지금 이 순간에 있었다.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이 내려앉은 탐미재 안에 생기 넘치는 그녀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지.
정한은 한 손으로 가만히 턱을 괸 채로, 안쪽 서가에서 책을 찾는 소현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 밤, 말할 수 없이 참 좋았다.
“앗, 여기 있다.”
소현은 책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서 그림이 있던 페이지를 찾아 넘겼다.
명화를 소개한 국내 저자의 책 안에서 그녀는 찾아낸 그림을 내보였다.
“이거요. 이거예요. 화가의 신혼, 이라는 제목이네요.”
프레드릭 레이튼(Lord Frederick Leighton)의 그림이었다. 앉아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프레임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남자는 오른손에 연필을 쥐고 데생을 하는 듯한 모습이고, 여자는 안기듯 가깝게 앉아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을 다정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남자는 무언가를 그리는 중에도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림만으로도 모두 전해질 정도였다.
“너무 낭만적이고 아름다워요.”
책에 인쇄되어 있는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소현의 눈빛이 다감했다.
“원래 그림 잘 모르고, 예술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런 걸 보니 뭔가 조금씩 궁금해져요. 그림 한 장에 참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혹시 이 남자는 화가 본인일까요?”
“프레드릭 레이튼이 그린 자화상을 보면 인상착의가 비슷해서, 화가 본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긴 해요.”
“아……. 부인을 정말 사랑했나 봐요. 이런 그림을 다 그리고. 부인도 진짜 예뻐요.”
정한은 연신 그림 속 부부의 로맨틱한 모습에 감탄하는 소현에게 말했다.
“레이튼은 독신이었어요, 평생.”
“네? 정말요?”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에 소현은 깜짝 놀랐다.
출신 배경도 엄청난 데다 화가로서도 큰 성공을 이루었다는 레이튼이 평생토록 독신으로 산 것도 놀랍지만, 소현이 놀란 부분은 따로 있었다.
우아하고도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주로 그린 화가로 보였고, 마치 한 가정의 자상한 가장과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독신이었다는 점에 소현은 놀랐던 것이다.
정한이 찾아서 보여준 레이튼의 다른 그림들 속에서 ‘화가의 신혼’에 나온 여자의 얼굴을 종종 발견할 수도 있었다.
“모델이 같은 여자일 수도 있겠네요.”
사랑했던 여자일 수도 있고, 레이튼이 정한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여자라 볼 수도 있다.
전자라면, 그가 사랑한 여자와 현실에서 결혼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겠고.
만일 후자라면, 현실에 비해 본인의 이상향이 너무도 높기에 그는 제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을 그림으로만 남긴 것일 수도 있었다.
정한은 이야기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화가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는, 화가 본인만 알겠죠.”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겉으로 보이는 타인의 모습에 대해 무심히 떠드는 건 그저 우리의 오만일 뿐.
각자의 바다 속 깊은 물길은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겠죠.
그래서 사람은 외로워요.
아파할 필요도, 서러워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서.
“화가는 어떤 결혼을 꿈꿨을지……. 어쩌면 꿈꾸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소현은 흥미롭고도 한편 먹먹한 눈빛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어떤 확정도 의미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수많은 가능성 아래 상상하는 것뿐.
무엇이든 화가 본인의 몫이리라. 이로써 갇혀 있던 틀이 한층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의 결혼을 생각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생각에 젖어든 소현은 무릎을 끌어안고 밤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밤은, 하늘은, 달은, 또 붉은 포도주는.
끊임없이 마음을 건드리고 두드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안겨주었다. 참 고맙게도.
“내가 일을 시작한 건, 누군가의 일생에 너무도 중요한 ‘결혼’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엄청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어요. 실제로도 참 좋았구요. 생애 가장 빛나는 날, 가장 아름답게 치장한 날, 가장 주목을 받는 날,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그 엄청난 날에 전 늘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요.”
진심 어린 소현의 음성에 정한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로 인해 좀 더 편하고 좀 더 즐겁게 결혼 준비를 하셨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일했어요. 새날에 대한 기대로 빛나는 분들을 보면 옆에서 나까지 덩달아 반짝거리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물론 아닐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래왔어요.”
정한은 가슴이 아린 기분이었다.
「혼자여도 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잘 살 수 있어요!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마!」
3년 전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였다.
낙하산에 인생을 걸고 하늘에서 몸을 던지던 날, 정한은 그녀의 인생사를 모두 듣고 말았었다.
분명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데도, 그녀는 하늘 위에 아무도 없이 오직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부모를 잃고 스무 살부터 혼자 살며 이겨내 온 인생.
고달픈 인생사보다 훨씬 컸던 그리움.
10년을 외롭게 했던 약혼자와의 파혼.
힘들었던 일과 막막한 미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비행에서 정한은 소현의 모든 걸, 지나치게 많이 알아버렸었다.
그렇기에 땅에 안착한 후 밝은 표정으로 돌아보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 그랬구나.
다른 이를 빛나게 하는 일을 그리도 좋아했구나.
본인이 그토록 원해서, 그것도 즐기면서,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의 나날을 빛나게 하였으니, 저절로 반짝거리고 있었던 거구나.
‘덩달아’가 아니었다. 이미 소현은 스스로 은은한 빛을 머금은 존재였다. 그리고 정한의 눈에는 그 빛이 단번에 두 눈에, 가슴에, 그대로 박혀들었던 것이다.
정한이 보았던 그대로, 그녀는 삶을 진지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가 반했던 순간 그대로, 여전히 소현을 사랑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날의 다이빙으로, 마른 줄기처럼 지쳐가던 당시 정한의 힘든 마음에도 빛이 들고 생기가 돌았었기에.
정한에게도 소현은 빛이었다.
“그러다가 회사……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사업체 하나 차리고 맨땅에 헤딩하려니 너무 힘든 거예요. 큰 회사 다니면서 월급만 받을 때는 몰랐던 부분도 참 많았고. 그런데 잘했다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어요. 좀 더 신랑신부님이 꿈꾸고 원하던 결혼에 가깝게 다가갔을 때. 안 그래도 빛나는 인생에 조금 더 빛을 더해준 기분이 들어서, 이 일을 하길 정말 잘했다……, 수없이 느끼고 그랬어요.”
더디고 어려운 길이지만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의 기쁨들.
소현은 아직 나아가는 중이었다.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들이 있어서, 사실 신랑신부님 원하는 결혼식을 맞출 수 없을 때가 많기는 해요.”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신부인 하태랑은 탐미재에서의 결혼식을 원했고, 장소 섭외는 쉽지 않으니 그 사이에서 느낄 소현의 고충을 정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현은 막무가내로 떼를 쓰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탐미재에 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해내며 뜻을 전하고 있을 뿐.
사랑을 받는 입장이 되어서도, 소현은 단 한 번도 우위를 선점하려는 오만을 보이지 않았다. 정한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결코 그걸 무기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소현은 그저 내가 정말 그 사랑을 받아도 되나요, 하는 얼굴로 매번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에 띄게 수줍어지는 두 뺨을 보고 있으면 정한의 마음마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 정도 좋아하면, 탐미재 빌려줘도 되지 않아, 솔직히?」
앤드류조차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깰 수 없는 자신의 원칙이 정한에게는 분명 존재했었다.
탐미재는 ‘이용’당할 수 없다.
그리고 소현은 암묵적으로 그 원칙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마 조금 더 노력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신부를 차선의 방법으로 설득하겠지.
그러나 재촉 없이 머물렀기 때문일까. 정한은 점차 그 진심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배우 이미지를 위해 탐미재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님을.
하태랑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스타이기에 앞서, 아름다운 날을 꿈꾸는 한 명의 예비 신부임을.
그날의 주인공이 될 예비 신부가 그토록 원하는 결혼식 장소가 바로 이곳임을.
오로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소현은 이렇게 제 곁에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 또한 그녀의 신념이었음을 정한도 점차 알게 되었고 이내 마음이 열려갔다.
그런 이유라면 원칙을 깨지 않을 수 있다. 침범당하지 않고, 이용당하지 않는 선이었다.
생각이 바뀐 건 모두 은소현의 진정 어린 눈빛과 태도 덕분이었다.
“은소현 씨.”
빈 와인병들이 두 사람의 깊었던 대화를 대신하는 시간.
잠이 밀려오는 듯 무릎을 안고 얼굴을 살짝 묻고 있던 소현이 깜빡깜빡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탐미재에서 하태랑 씨 결혼식, 준비해요.”
허락이 떨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소현은 천천히 되물었다.
“어? 어어? ……진짜요?”
“네, 진짜.”
쏟아지는 잠과의 몽연한 사투 속에서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만 역부족인 모습이었다.
“……진짜죠? 무르기 없어요……. 허락했어요, 정말…….”
소현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악착같이 약속을 받아내려 하지만 팔에는 어째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 것 같다.
이 여자의 주사는, 잠드는 거구나.
“약소옥……. 응? 도장, 도장…….”
소현은 손을 약하게 허우적거렸다.
잠들어버리기 전에 얼른 확신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다가간 정한은 소현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순간 소현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사르르 퍼지더니, 눈을 감는 동시에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평상에 어깨가 쿵 부딪히겠다 싶어 정한은 재빨리 손을 넣어 소현의 몸을 받쳤다.
“어엇…….”
폭, 하니 한 팔 안에 들어왔다.
작고 말랑말랑한 뭉치 하나가 품속에 쏙 들어온 것 같았다.
쌔근쌔근.
아기처럼 잠든 소현이 연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안겨들어 몸을 웅크렸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하나.
정한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내려 소현을 바라보았다.
“후우…….”
한숨이 스미었다.
“……너무하네.”
좋아하는 여자를 품에 안고, 내리 지새울 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달이 깊이 저물고 나뭇잎은 밤바람에 춤을 추었다.
정한의 한숨이 까만 하늘에 한 번, 잠든 소현의 미소에 또 한 번, 말랑거리는 몸의 여린 감촉에 또 한 번.
자꾸만 자꾸만 깊어가는 밤이었다.
◇ ◆ ◇
새벽이었다.
그때까지 내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재언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짙은 회색 톤을 주조로 꾸민 모던한 침실은 한밤중인 듯 어둡기만 했다.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전면 통유리창을 가리고 있던 암막커튼이 양옆으로 스르르 벌어지며 새벽빛이 들어왔다.
창가에 서서 건물 숲 위로 동이 트는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던 재언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제 아침이었다.
전날 밤, 이 감독의 파티에서 나와 은소현의 집 앞에 갔었다. 왜 대리운전 기사에게 난데없이 은소현의 집 주소를 읊었던 건지 자신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불러내지도 못할 사람을 밖에서만 바라보는 게 스스로도 견딜 수 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은소현이 다쳤다는 말을 들어 줄곧 신경이 쓰였던 걸까. 그깟 다친 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마음과 행동이 달랐다. 결국 어제 아침, 재언은 출근하는 은소현을 차에 태우려고 다시 그 집 앞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본 건,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골목 한쪽에서 차를 세운 채 은소현의 집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웬 차가 한 대 와서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분명 탐미재 주인이었다.
‘저 사람이 왜……?’
탐미재 주인이 건물 계단을 날듯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탐미재 그 자식이 은소현을 업고 내려왔다.
뒷좌석에 그녀를 태우고 사라지는 그놈의 차를 재언은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기분이 대체 뭔가 싶었다.
「류 대표님……? 이거 결재 안 해주셨는데…….」
「전화 주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아까부터 김 대표님이……. 지금 전화 연결할까요?」
야속하게도 일은 많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늘 그렇듯 너무도 정신없는 시간들이 흘러갔고, 그러는 중에도 은소현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기에 재언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들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 저녁에는 아버지가 사무실에 찾아와 원치 않는 결혼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그중에 하나 적당히 골라.」
「한심한 놈. 이제 회사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겠다, 어차피 하게 될 결혼 질질 끌지 말고 해치우란 말이야.」
사랑 없는 결혼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은소현이 아닌 다른 여자와 그런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는 물론 가슴까지 터질 것만 같았다.
은소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없어 그대로 밤을 지새운 재언은 결국 출근 준비도 하지 않고서 새벽녘 집을 나섰다.
평소 운전기사에게 운전을 맡긴 채 이동시간에도 뒷좌석에서 수없이 많은 업무를 처리했던 재언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 직접 운전대를 잡은 재언은 지체 없이 은소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새벽을 달려온 그는 그녀의 집 건너 놀이터 앞에 차를 세웠다. 재언은 한숨을 내쉬며 운전대를 꽉 잡은 채 고개 숙여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고, 어떻게 알아내야 하는지조차 깜깜하기만 했다.
“미친놈……, 미친 새끼. 나 지금 뭐하자는 건데…….”
중얼거리던 재언이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며 정차했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내렸다.
반깁스한 발로 힘겹게 걸음을 옮겨 건물로 들어가는 여자는 분명 은소현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야 할 사람이, 반대로 집으로 막 들어가는 중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제 아침 출근할 때와 완전히 똑같은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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