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탐미하는 밤2017.09.08.
“좋아하는 여자한테 누나라고 안 해요, 난.”
이 남자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혹시 어디 가서 따로 멘트 과외를 받는 걸까, 그리고 거울 보며 연습하는 건 아닐까.
어린 여동생 쓰다듬듯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지는 행동에는, 죽어도 널 ‘누나’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네, 하지 말아요.”
소현 역시 못지않게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답을 했다.
“나도 서정한 씨한테 ‘누나’ 소리 듣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그가 ‘은소현 씨’라고 부르는 소리가 싫지 않았다.
나직한 음성에는 온기와 힘이 함께 실려 있었고, 정중하면서도 다정하게 들렸다. 왠지 모르게 존재 그 자체로 귀히 여겨진다는 느낌도 전해졌다.
은소현 씨, 은소현 씨. 몇 번이고 불리더라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앤디, 그럼 정리된 거죠? 나 은소현은 은소현이고, 앤디는 앤디고. 와, 심플하고 좋다. 사실 나보다 더 어린 정한 씨도 형이 아니라 앤디라고 부르는데, 나한테만 그러는 건 불공평해요.”
그 말에 앤드류가 웃음을 터트렸다.
“듣고 보니 그렇네. 영어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한국어 쓰면서 앤디, 앤디 하면 기분이 묘하단 말이야. 언제 한 번은, 술집에서 어떤 놈들이 낄낄거리면서 ‘양키새끼가, 뭘 쳐다봐.’ 하고 떠들더라고. 어린애들이었는데, 내가 한국어 전혀 모르는 줄 알고. 그때 하도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야, 너희 몇 년생이야.’ 했었지, 아마.”
정한이 이어 하는 말에 소현 역시 웃음이 팡 터졌다.
“진짜요? 아, 무슨 외국인이 몇 년생까지 따져요?”
“생년뿐 아니라 앤디는 띠랑 생시도 알죠. 나중에 결혼할 때는 아마 궁합도 보려고 할 거예요.”
자포자기한 듯 앤드류가 대꾸했다.
“그래, 나 작년에 집 살 때 풍수도 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만 멎어버릴 것만 같던 심장이, 오고 가는 농담 속에 다시 부지런히 뛰기 시작했다.
평화로웠다.
최근 들어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던 적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불과 하루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져버렸다.
소현은 탐미재 안 흩어지는 웃음 속에서 소박한 바람을 품에 안았다.
이 평온이 깨어지지 않기를.
이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그리하여 이 마음이, 이 행복이, 이 사랑이, 흔들림 없이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 ◇
앤드류는 뉴욕이 마치 옆 동네라도 되는 양 가뿐한 차림으로 혼자 떠났고, 정한 역시 늘 겪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배웅했다.
그리고 탐미재는 평소와 같이 느리게 돌아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하나, 저녁에 계획된 일정이었다.
“오늘 ‘탐미하는 밤’ 있는 날 맞죠?”
[탐미하는 밤 047- 랑푸노 술집 안에서]
탐미재에서 하태랑이 발견했던 포스터 속 안내.
‘포도주를 마시며 함께 그림 나누는 시간’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행사가 바로 오늘이었다.
열다섯 명 정원의 오붓한 모임.
“맞아요.”
“준비는 언제 해요?”
“이따 오후에 케이터링 업체에서 와인이랑 핑거푸드 세팅해줄 거고, 그 외엔 준비할 거 별로 없어요.”
소현은 오늘이야말로 자신이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을 도울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발목을 다치기 이전이었지만.
그런데 열다섯 명이나 오는 행사임에도 저렇게 여유로울 수가.
무엇이든 잘 해내려고 어떤 미팅이나 행사 전이면 늘 잔뜩 긴장했던 자신으로서는 정한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소현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은 듯 정한이 잔잔히 말했다.
“힘 빼도 돼요.”
“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구요.”
그는 말의 뜻을 이어 전했다.
“수영을 배울 때도 몸에 힘을 빼야 물에 뜰 수 있잖아요. 조금 편하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마음만 있다면요, 그 마음이 알아서 방향을 정해줄 거예요.”
흘러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떠다녀요.
자신을 몰아붙이면서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가장 소중한 건 자기 자신이니까.
“행사 때문에 준비하느라 시간을 지나치게 쓰고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았으면 난 이거 안 했을 거예요. 시작했더라도 아니다 싶었음 그만 뒀을 거고.”
돌아보면 소현은 어떤 일이든 주어진 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놓지 못해 계속 몰고 갔었다. 해야만 하고,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축나는 건 자신이었다. 몸도, 마음도.
“행사 전까지는 난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할 거예요. 은소현 씨도 그냥 오늘 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해요.”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말고.
그 어떤 것에도 부담 느끼지 말고.
◇ ◆ ◇
그날 저녁.
와인과 간편하게 집어 먹을 수 있는 치즈과일 꼬치, 그리고 한입 사이즈의 미니 버거, 컵케이크 등을 차려놓은 게 모든 준비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정한이나 소현은 손댈 필요도 없이 우렁각시 같은 케이터링 업체가 순식간에 차려두고 떠났다.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기본은 제대로 갖춘 세팅이었다. 특히 와인은 참여할 사람들이 넉넉히 마실 수 있는 양인 데다가 종류까지 다양했다.
“와인 엄청 많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와인이 주인공이니까요.”
레드 와인과 달리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은 얼음물이 든 통에 담가 칠링(chilling)을 해두는 정한의 모습에 소현은 감탄했다.
케이터링 업체에서 하지 않은 부분을 찾아 보완한 것이다. 세심하게.
“그런데 책방에서 술 마셔도 괜찮은 거예요? 법 이런 쪽으로는 문제없는지…….”
“네, 주류 판매가 가능한 일반음식점으로도 허가받았거든요. 지금은 아니지만 여기서 술도 팔 수 있어요.”
“은근히 치밀해…….”
알수록 흥미로운 남자였다.
“내가 그래요?”
“네, 그래요. 꼭 ‘아무것도 신경 안 써요.’ 그런 얼굴로 느긋하게 있는데,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니잖아요. 조용히 할 일은 또 다 해놓고 여유 부리는 건데 깜빡 속을 뻔했어요.”
마냥 노래만 불러대는 베짱이가 아니라, 미리 효율적으로 움직여 식량 창고를 잘 채워두고서 기타를 드는 베짱이 같았다.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것도 마음을 다해 즐길 수 있는 만큼만.
그렇기에 조급해할 필요도 없어 보였고, 함께 있는 사람마저 편안하게 했다.
“그런데, 좋아요. 그래서 더 보기 좋아요.”
물들고 싶어질 것 같아요.
그런 당신에게.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이렇게 은소현 씨랑 같이 있으니까 되게 좋네요.”
좋다는 말에 좋다는 말로 대답하는 것까지 좋았다.
점점 더.
좋은 부분이 많아지고 있었다.
◇ ◆ ◇
소현은 준비할 필요 없다던 정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탐미하는 밤’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까만 밤, 주황빛 불을 군데군데 밝힌 고즈넉한 탐미재에 미리 참가 신청을 한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포도주를 마시며 그림을 ‘보는’ 시간도 아니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아니고, 왜 그림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라 표현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마음껏 탐미재 안을 돌며 책들을 뒤적였다. 평소의 손님들이 그러하듯 판매를 위해 래핑이 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책도 자유로이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술’이 나온 그림 작품을 찾으면 ‘탐미하는 밤’ 게시판에 기록을 했다.
주제와 관련한 작품을 찾기 위해 책 사이에서 집중한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소현은 기분이 묘했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탐미재 안을 밝히고 있었다. 소현이 가진 예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는 다르게, 그들은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듯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 시간 동안 찾은 그림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하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한쪽 책장 앞으로 스크린을 내린 정한은 빔 프로젝터로 화면을 채웠고, 참여한 사람들이 기록한 그림들을 하나씩 찾아 띄웠다.
샤갈의 ‘와인잔을 든 이중 자화상 Double portrait au verre de vin’, 오노레 도미에의 ‘술 마시는 사람들 Buveurs’, 가브리엘 메취의 ‘폭음하는 여인 La Riboteuse’, 앙리 샤를 앙투안 바롱의 ‘술집의 풍경 Scène de cabaret’, 로트렉의 ‘숙취 La Buveuse Ou Gueule De Bois, 1889’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그림들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와인을 마시고, 누군가는 자신이 저 그림을 어느 책에서 찾았는지를 얘기했다.
누군가는 그림을 보고 느껴지는 바를 얘기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 화가의 또 다른 작품을 얘기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찾은 그림을 말하지 못하고 마냥 수줍어했다. 생각한 게 틀릴까 봐 말하기 좀 어렵다는 이에게 정한은 도닥이듯 말했다.
“정답은 없어요. 그림 감상이란 게 별거 있나요. 화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보단, 내 눈이 보고 내 마음이 느끼는 것에 더 신경 써요. 내가 좋자고 보는 그림이니까.”
하나의 그림을 두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졌다.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 자신의 힘든 상황을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인생이었다.
그림을 찾고 보고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했다.
질서가 없음에도 평화로웠다.
그 사이 소현은 손님들이 책을 보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탐미재의 뜻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근데 여기, 탐미재의 탐미 한자가 이게 맞나? 아닌 것 같은데.」
「원래 아니지. 보통 쓰는 탐미의 탐은 즐길 탐耽이잖아.」
「그치? 탐닉하다, 그럴 때 쓰는 탐이 아니지?」
「탐미재의 탐은 그 탐이 아니라, 찾을 탐探이지. 탐구하다 할 때 탐.」
소현은 내심 놀랐다.
사실 정한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을 때는 책방의 이름조차 곱게 보이질 않았었다.
‘탐미耽美’의 사전적 뜻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거기에 빠지거나 깊이 즐김’이다.
본인 하는 행동처럼 지어놨네, 하고 오해하기 딱 좋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다시 입간판과 내부에 적힌 탐미재 글씨를 보니 손님들의 말대로 한자가 전혀 달랐다.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탐미의 존재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눈을 가린 탓에 그걸 보지 못했을 뿐. 이제야 겨우 진실의 시야가 트였다.
「이 한자를 이렇게도 조합해서 쓰네. 넌 어떻게 알았어?」
「나 전에 인터넷에서 보고 특이해서 찾아봤었거든. 그래서 여기 와보고 싶었어. 퇴폐적이고 부정적인 느낌 주는 음을 쓰면서, 뜻은 대놓고 반전을 준 게 묘하잖아. 이런 행사도 독특하고. 책방 만든 사람 뭔가 근사하게 사는 것 같아. 재밌어.」
소현의 마음이 왠지 벅찼다.
서정한은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깊고도 너른 남자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집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라고.
소현은 고개를 저어 괜찮다고 하고는, 돌아서서 한 손으로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숨이 뜨거웠다. 설레고 또 설렜다.
달이 수줍게 밝은 밤, 별이 멀리 보이는 밤, 탐미하는 밤이었다.
◇ ◆ ◇
“어쩐 일이세요?”
퇴근하려던 재언은 사무실에 들어선 아버지 류태훈을 보고 멈춰 서서 물었다.
“애비한테 태도 하고는.”
류태훈은 쯧, 혀 차는 소리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며 소파에 앉았다.
“앉아라. 할 얘기가 있어서 왔으니.”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대배우 류태훈은 이곳에 없다. 온 국민이 아는 인자한 모습 대신 그가 아들 앞에서 드러내는 건 본래의 차가운 성정.
재언은 말없이 류태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꽤 늦은 시간이라 비서도 퇴근시켰기에 사무실 밖엔 아무도 없고 차를 내올 사람조차 없었다. 마주 앉은 부자 사이에 건조한 공기만 버석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류태훈은 툭 하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재언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낯선 여자들의 사진과 그들의 스펙을 정리한 서류가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의 저의를 알 수 있었다.
“요즘 내가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아드님 결혼 언제 합니까, 류 대표님은 결혼 안 합니까, 파혼했다던데 아직 결혼 소식은 없습니까, ……이따위 질문들이다.”
남자 나이 서른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 결혼 독촉을 받을 때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파혼의 경험이 있으나 아직까지 미혼인 젊은 경영인의 사생활에, 세상은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관심은 모조리 유명인 부모에게로 향하고 있었으니, 류태훈이 결국 스트레스가 심한 얼굴로 찾아와 봉투를 던진 것이었다.
“어차피 결혼할 거면, 그중에 하나 적당히 골라.”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한심한 놈. 일찌감치 결혼도 하려고 했던 놈이 이제 와 새삼 독신주의자가 된 것도 아닐 테고. 이제 회사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겠다, 어차피 하게 될 결혼 질질 끌지 말고 해치우란 말이야.”
그렇게 한 결혼, 아버지와 어머니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같은 길을 가라 하였다.
재언의 눈에는 보였다. 아버지는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하지만 재언은 자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미친 듯이 사랑하지 않아도 필요하면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이 말하는 사랑이 실제 존재하는 감정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재언은 익숙하지 않았다.
옆에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던가. 그런 말이 와 닿지도 않았다.
그냥 은소현이라면 다 이해해줄 것 같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땐 그랬다.
「결혼하자.」
「……결혼?」
「농담 같으면 이달에 약혼 먼저 진행해. 그리고 내년쯤 결혼하는 걸로 하고.」
「너 지금 나랑 결혼하자고 했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피곤해.」
안정을 바랐다.
은소현과의 길고 밋밋했던 연애를 이쯤에서 정리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결혼식 석 달 전에, 파혼을 당했다.
“같은 얘기 반복하게 하지 마라.”
이제야 알았다.
자신이 싫어했던 부모에게서 벗어나려 은소현과의 결혼을 결심했지만, 결국 제가 그녀에게 보여준 건 그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류재언이 보고 들은 세상의 전부였기에.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어디 너만의 문제야! 그깟 결혼 문제 하나로 부모 일까지 이리 번잡스럽게 만들면서! 가는 곳마다 네놈 자식 결혼 얘기로 질문이 마를 날이 없어!”
대번에 류태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재언은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여 꺼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당신이 편하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씁쓸하고도 참담했다.
“제 결혼이니.”
“…….”
“제 뜻대로.”
재언은 봉투에 사진과 서류들을 다시 쏟아 넣었다. 그리고 류태훈 앞에 정중히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때에 하겠습니다.”
필요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결혼.
그가 찾을 답은 하나였다.
◇ ◆ ◇
“생각보다 좋았어요, 정말.”
소현이 웃으며 하는 말에 정한은 흐트러진 책들을 제자리에 꽂다가 돌아보았다.
“생각은 어땠는데요?”
“음, 어려울 것 같았죠.”
‘탐미하는 밤’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다시 고요해진 탐미재에 앉아 있으니 지난 시간들에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제법 선선함을 머금은 늦여름 밤바람이 조용한 정원을 가득히 메웠다.
“그런데 그림 찾고 이야기 나누는 분들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그림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진 않더라고요.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찾으니 재미있을 것 같고요.”
무엇이 숨어 있는지 그림 속을 살피는 게 꽤 흥미롭기도 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도 있었고, 마치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그림도 있었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밤이 늦었으니 정한이 집에 빨리 데려다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소현은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사실 여운이 서린 탐미재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곳에 숨겨진 보물들이 소현을 가만히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 중정의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정한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밤이 더 깊지 않았으면.
그래서 조금만 더 여기 머물 수만 있었으면.
그런 바람을 속으로 차곡차곡 쌓고 있을 때였다.
“은소현 씨.”
정한이 한쪽에 치워둔 와인을 들어 보였다.
“우리, 와인 한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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