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좋아하는 여자한테 누나라고 안 해요, 난.2017.09.04.
정한의 등에 업혀 건물 1층으로 내려왔다. 정차되어 있는 차 앞에 소현을 조심히 내려놓은 정한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타면 돼요.”
사모님도 아니고, 사람이 둘뿐인데 혼자 뒷좌석에 앉는 건 지나친 상전 대접이라 생각해 소현은 사양했다.
“조수석에는…….”
정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수석 창문이 위이이잉 내려갔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안녕.”
찬란한 금발이 인사를 건넸다.
“앤디?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놀면 뭐해. 우리 하니 따라왔지. 아침 드라이브도 할 겸.”
잔뜩 말랑해졌던 마음이 앤드류의 등장으로 하루 지난 인절미처럼 그만 딱딱해졌다.
그런데 아무 말이나 하는 금발의 껌딱지 대신 정한이 사정을 설명했다.
“앤디가 오늘 낮 비행기로 가는데, 아쉽다고 해서 왔어요. 은소현 씨랑 아침 한 끼 같이 먹는다고.”
“비행기? 어디 가요?”
껌딱지는 탐미재 직원이 아니었나? 출장이라도 가나?
“집에 가지.”
정한이 운전하여 출발한 차 안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집? 앤디 집이 어딘데요?”
“뉴욕. 거기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내 집이 있지. 물론 다른 데에도 있긴 한데 일일이 다 말해줄 순 없고. 잘 쉬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갈 거야.”
아, 직원이 아니라 정한의 친구인데 잠깐 다녀가는 길이었구나.
탐미재 고정이 아니었구나.
“너 웃어?”
앤드류가 재빨리 돌아보았고,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있던 소현은 딱 걸렸다.
“나 간다고 너 지금 좋아하는 거야? 설마? 진짜?”
“아니, 뭐, 꼭, 좋아서라기보다. ……아휴, 오늘따라 하늘이 참 맑아요.”
소현이 창밖을 보며 둘러대자 앤드류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미세먼지.”
“…….”
외국인에게 한국말로 또 밀렸다. 참담한 마음을 안고 소현은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래도 앤디한테는 이길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정한과 앤드류, 두 사람이 어쩌다가 나이와 인종을 초월한 친구 사이가 되었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 ◆ ◇
“북엇국이요?”
“그 집 북엇국을 먹고 가야 한국에 왔다 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앤드류가 반드시 가야 한다는 북엇국집은 소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공덕역 부근에 있었다. 서촌 탐미재로 가는 길에 들르면 되니 동선도 딱이다.
“앤디는 북엇국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한식 중에서.”
정한의 말에, 소현은 신기하단 얼굴로 앤드류를 보았다.
미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으로 꼽는 게 북엇국이라고? 보편적으로 언급하는 한식인 불고기, 김치, 잡채 등이 아니라?
흔하지는 않았다. 앤드류는 한국에 대한 경험도 많이 해보고 아는 것도 많은 게 분명했다.
“이 집, 여름에는 막국수도 해. 막국수에 북어채무침도 들어 있어서 진짜 맛있어. 여름에만 하는 거라 나 이거 꼭 먹고 가야 해.”
“앤디, 그럼 여름마다 한국에 오는 거예요?”
“아니.”
고개를 저은 앤드류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확한 답을 주었다.
“여름에만 오는 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오지.”
“……시도 때도 없이?”
“그러니까 다음에 오면 막국수는 못 먹는단 말이야. 막국수 시키면 북엇국도 주니까 일석이조지.”
일석이조도 알고 있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에 계속, 또 온다고?
여기에 연고가 있거나 중요한 업무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종일 탐미재에서 책만 보던 사람이다. 그런 앤드류가 정기적으로, 그것도 매우 자주 온다니 의아했다. 왜지?
물론 앤드류에 대한 호기심은 모두 정한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이런 친구를 둔 배경이 궁금하니까.
음식이 나오자 앤드류는 더 이상 말하기를 중단하고 즐거운 얼굴로 숟가락을 쥐었다. 세상 모든 기쁨은 지금 이 식탁에 있는 것처럼.
“은소현 씨, 들어요.”
정한이 웃으며 식사를 권했다.
차차 모든 걸 알게 될 거라는 듯 여유롭고 다정한 미소였다.
뉴요커가 소개한 공덕역 맛집에서의 아침식사는 생각보다 편안했고, 생각처럼 따뜻했다.
◇ ◆ ◇
탐미재로 돌아온 후 정한에게 전화가 왔다.
이모로부터 걸려온 일상적인 통화인 듯 그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자 안채로 향했다.
앤드류는 공항으로 갈 시간을 앞두고 가방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기다렸다가 우리 하니가 내려주는 커피 마시고 가야지.”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있는 소현 근처로 온 앤드류는 막간을 이용해 또 책을 뒤적였다.
아직 손님들이 들어오기 전 시간, 고요한 아침의 탐미재.
불어드는 바람에 나무 이파리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퍼졌다. 앤티크 축음기에 얹어둔 LP판이 부지런히 돌아가고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낯익은 클래식 선율이 조용히 흘렀다.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오는 길에 막히는 도로 위에서 차창 밖으로 본 도시의 아침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다들 참…… 바쁘구나.’
일터로 급히 향하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면서 조그만 휴대전화 화면을 집중해 보고 있는 사람들. 어깨를 툭 부딪치고 가는 사람을 향해 인상을 쓰며 뭐라 중얼거리는 사람.
도시의 열기와 냉기는 혼란스럽게 뒤섞여 사람들 위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너른 바다 위에 방향을 잃은 작은 배들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사람들은 급히 움직였다.
하늘은 뿌옇고 바람은 뜨거웠다.
소현은 보았다. 액자처럼 갇힌 도시의 풍경화 속 그 어디쯤, 자신의 모습도 분명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 1초라도 빨리 움직이려 서두르고, 커피를 들고 통화를 하며 택시를 부르던 자신의 모습이.
지친 얼굴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자신의 모습이.
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정녕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던 자신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탐미재에 들어온 순간, 전혀 다른 세상에 흠뻑 빠져드는 기분을 느낀다.
힘들었지.
많이 지쳤지.
괜찮아, 이리 와.
속삭이듯 조용히 안아주며 폭 파묻히게 하는 공간이었다.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잠시 숨어들어 힘을 얻게 하는 휴식의 터.
탐미재는 그런 곳이었다.
“커피 줄까요?”
투명한 물방울이 깨끗한 바위 위로 또르르 구르는 느낌.
언제 들어도, 정한의 커피 줄까요, 하고 물어보는 소리는 참 보드랍고 따듯했다.
소현은 제 앞에 다가온 정한의 말간 얼굴을 올려보며 대답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커피 가져왔어요.”
탐미재에 매일 드나들기 시작한 후로 소현은 늘 보냉병에 자신이 마실 커피를 담아 왔다. 정한을 설득한다는 명목으로 오는 건데 커피까지 축낼 순 없었으니까. 하루에도 몇 잔씩 마셔대는 커피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셈이었다.
“내가 내려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안 돼요?”
안 되긴 왜 안 돼. 됩니다. 무조건 되죠.
정한의 음성과 눈빛은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소현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고, 그가 말했다.
“오늘은 따뜻한 커피로.”
늘 아이스커피만 마시는 소현이었다.
소현이 찬 음료만 마시는 걸 벌써 파악했는지, 정한은 콕 집어 따뜻한 커피를 권한 것이다.
“날이 아직 더워서…….”
사실 여름이라서가 아니라 소현은 겨울에도 얼음이 가득 찬 커피를 찾았다.
날씨나 온도와는 상관없이, 빨리 마실 수 있어 차가운 음료가 좋았다. 뜨거운 커피를 쏟아 허벅지를 데였던 경험도 미약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천천히 불어 마시면 맛있을 거예요. ……따뜻한 커피, 주고 싶어서 그래요.”
“주세요.”
그럼 당장 주세요. 서정한 씨가 주고 싶다면 줘야지. 어딜 내가 감히 거절을 하고 그럽니까.
그런 눈빛으로 마시라고 하면 따뜻한 커피가 아니라, 입천장까지 홀랑 다 까질 만큼 뜨거운 커피 백 잔도 마실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소현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서정한 씨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나도 따뜻한 걸로 주라.”
앤드류의 말에 정한은 미소로 답하고는 바 쪽으로 건너갔다.
바라보는 소현의 마음마저 평온해졌다.
“사람이 참 예쁘지?”
조용히 들려온 앤드류의 목소리.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하는 말이었지만, 정한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현은 수긍했다.
“네, 참 좋은 사람 같아요. ……어쩌다가 그런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어이없을 정도로.
아니, 부끄러울 정도였다.
마침내 책에서 눈을 뗀 앤드류가 소현을 보았다.
소현은 아직도 미안한 얼굴, 그리고 안타까운 얼굴에 한숨을 가득히 품고 있었다.
“왜가 어디 있어, 오해도 할 만하니까 했겠지.”
앤드류는 어제 정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3년 전 마지막 날 만났을 때, 은소현 씨가 어제 뭐 했냐고 물어봤었어. 난 당연히 서핑을 했다고 했지. 그날 만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그거였으니까. ……내가 어머니랑 함께 있는 걸 은소현 씨가 봤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 ……하다못해 어머니와 식당에 갔었다는 얘기도 할 순 없었지.」
「그렇지. 하와이에서 볼 시간도 짧았을 텐데, 매일 함께 있는 어머니와 고작 밥 먹겠다고 데이트 안 한다는 걸, 누가 곧이곧대로 듣겠어? 핑계인 줄 알겠지. 그땐 어머니 상황을 다 얘기할 수도 없었을 테고.」
「그리고 난 아무렇지 않게 저한테 은소현 씨 전화번호가 없더라구요, 하고 번호를 물어봤는데. 그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자기가 두 눈으로 본 게 있는데.」
「너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겠네, 그 여잔.」
「그렇지. 그게 끝일 수밖에 없었지, 그땐.」
앤드류가 보기에는 정한도, 소현도, 누구의 탓을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잘못도 아니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어긋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한은 차라리 3년 후인 지금 다시 만난 게 더 잘된 일이라 했다.
「돌아보면, 그땐 제대로 만나기 힘들었을 것 같아. 게다가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했고.」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이후 정한의 어머니 병환은 급격히 안 좋아졌고, 그는 일상을 지속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정신없이 보냈으니까.
은소현과의 관계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이 의미가 있다.
「오히려 지금은 상황이 안정적이라 다행이지.」
나쁘게 생각하면 한없이 나쁘고, 좋게 생각하면 그저 좋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었다.
정한은 놓친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제 그녀에게 모두 쏟아붓기로 했다.
「게다가 은소현 씨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게 난 믿기지가 않아. ……앤디, 난 꿈꾸는 것 같아, 지금.」
짧은 인생, 강렬한 변주곡 속에서도 그는 중심을 잃지 않고 잘 견뎌내왔다.
강한 사람이다. 온유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속이 너무도 단단하고 한없이 강한 남자였다. 앤드류가 본 서정한은 그랬다.
“너도 스스로 탓할 필요 없어. 혹시 오해했던 걸 아쉬워하고 후회할 시간 있으면, 한이 얼마나 좋은 남자인가 그거에만 집중해. 한이 원하는 것도, 앞으로 네가 자길 좋아해줬으면 하는 거니까.”
앤드류의 말에 소현은 감탄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다. 혹여 모를 죄책감도 모두 부질없다고 다독여주는 듯했다.
“앤디도 신선 같은 말을 다 하네요.”
“그치, 이미지랑 좀 다르지?”
“네. 좋은 말도 많이 해주고. 고마워요.”
“한 옆에 있다 보면 그렇게 되나 봐. 나 어릴 때는 진짜 까칠했었는데. 살다 보니 세상에 복잡하게 생각할 건 하나도 없더라고.”
성격도, 외양도 전혀 다른 두 남자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평온한 분위기가 비슷하다 했더니 그게 다 마음이 통하는 사이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두 사람, 어떻게 친해졌어요?”
앤드류에 대한 호기심은 곧 정한에 대한 관심이었다.
“내가 좋다고 따라다녔어.”
“……둘의 러브스토리가 궁금한 건 아닌데.”
소현의 농담에 앤드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짜야. 우리 하니 보고 내가 첫눈에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다니까. 근데 말을 걸어도 잘 안 받아주길래 내가 그때부터 한국어를 공부했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한국어로 말 걸기 시작하니까 그제야 봐주더라고.”
“어떻게 지성이면 감천도 알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정도였어요? 생각보다 너무 절절한데요.”
어디까지 농담이고 어디부터 진담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소현의 반응을 즐기듯 애매하게 말하던 앤드류가 그제야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파리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어. 학교에서 한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었고.”
사실 처음에 앤드류가 반한 건 한이라는 남자가 아니었다. 한이 그린 그림이었지.
“당시에 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러 파리에 억지로 갔던 거거든. 대학 공부를 하기엔 늦은 나이였고. 그때까지는 대충 살았지, 뭐. 그래서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는데, 생긴 것도 다르고 조용하기만 한 동양인 남자애가 보이더라고. 피차 적응 못 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어린애 주제에 얼마나 고고해 보이던지. 그게 거의 8년 됐나? 한이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때였으니까. 아무튼 꽤 됐네.”
스무 살의 서정한이라니.
지금도 뽀송하고 투명한 이미지인데, 세상에, 그땐 얼마나 더…….
게다가 낯선 외국인들 사이에서 주눅들지 않고 홀로 고고한 빛을 발하는 정한의 모습,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 미술사학 공부요?”
괜히 이런 책방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의외지? 넌 하와이에서 처음 봤으니까.”
“네, 서핑하고 스카이다이빙하는 것만 봐서, 그쪽으로는 상상도 못 했어요.”
유유자적 살아가는 한량인 줄로만 알았다.
역시 세상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할 게 아니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한 오해에 사로잡혀 정한에 대한 모든 걸 삐뚤게 보고 말았다. 또다시 소현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소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돌아볼 줄 알았다. 앞으로 나아갈 힘은 거기 있었다.
정한이 소현을 믿고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기다릴 만한 여자라서. 그녀 역시 그런 눈빛을 흔들림 없이 보여주니까.
거리가 가까워지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내가 한을 정말 좋아해. 그런데 꼭 섹슈얼한 사랑만 사랑이 아니잖아. 인간 대 인간으로 좋아하는 것도 사랑이지. 재능이나 인격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고. 그런 범위에서 생각하면 나는 한을 사랑해.”
앤드류의 말에 소현은 수긍하며 끄덕였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 앤드류가 정한을 생각하는 것도, 순수하게 매료된 마음 그 자체이리라.
그만큼 서정한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난 오해하지 마. 내가 우리 하니를 미친 듯이 좋아한다고는 해도 널 긴장하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누, 누가 긴장해요? 이제는 오해 안 한다구요. 앤디랑 서정한 씨 사이, 장난으로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
시작하기도 전에 큰 산을 넘은 기분이었다.
소현은 굳게 마음먹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혼자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론 내리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잠깐의 인연으로 끝내도 되는 사이가, 이제는 아니니까.
지금 눈앞에 닥친 만남에 그녀 역시 충실하기로 깊이 다짐했다.
“그런데 너, 나한테 초면에 반말한다고 뭐라 하지 않았어? 여기 동방예의지국이라며. 그럼 너도 예의를 지켜야지.”
소현이 불만을 제기하든 말든 여태 잘도 반말을 고수해온 양반이 훅 치고 들어왔다.
“전 예의 있게 존댓말 쓰고 있었잖아요.”
“당연하지. 내가 너보다 나이 많잖아.”
한국 패치가 제대로 끝난 외국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소현은 제 눈으로 보는 중이다.
“너 나보다 나이도 안 많으면서, 말끝마다 앤디, 앤디, 이름을 막 부르고.”
“아니, 미국에서 온 사람이 무슨 나이를 따지고 그래요…….”
“앤디, 앤디 하지 말고 호칭도 동방예의지국답게 예의 있게 정리하자고.”
그놈의 앤디, 앤디가 한국어 실력이 지나치게 뛰어난 걸 안 이상,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했어야 했는데. 격의 없이 은근히 가까워진 게 화근이었다.
“지금 설마…… 오빠라고 부르라는 건 아니죠?”
“그렇지. 그러면 되겠네. 내가 니 친구는 아니니까.”
“에이, 왜 이러세요. 서정한 씨도 저보다 어린데 꼬박꼬박 은소현 씨, 은소현 씨, 하고 이름 부르잖아요. 누나라고도 안 하고. 난 그런 걸로 뭐라고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관대한 나한테 왜 이래요?
심지어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에게 오빠라고 부르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이 무슨 코미디인가.
자기네 나라엔 그런 거 없으면서 로마에 왔다고 악착같이 로마법을 따르겠다는, 저 적응력 만렙의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때, 따뜻한 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로 놓였다.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올리니 서정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커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것보다 은소현 씨.”
“네?”
“나한테 누나 소리가 듣고 싶어요?”
아, 또 얘기가 그렇게 되나.
“앤디가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그러려면 서정한 씨도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겠냐는 뭐 그런 거죠. 나이를 따지자면.”
“나이가 무슨 상관인데요.”
장난스럽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정한이 한 발짝 소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앉아 있는 소현은 고개를 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한은 조심히 손을 뻗었고, 소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허튼 기대 하지 마요.”
그의 목소리가 나풀나풀 내려와 소현의 머리 위로 살며시 닿았다.
보드랍게, 굉장히 귀여운 것을 어루만지듯 가만히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소현은 간신히 숨을 삼켰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누나라고 안 해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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