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18화 (18/52)

18화– 크게 후회하실 거예요.2017.09.01.

“류 대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청담동의 VIP 클럽.

초대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한 보안 아래 층 전체가 분리되었고, 그 안에서는 비밀스러운 파티가 한창 벌어지는 중이다.

늘 그렇듯 재언은 필요한 인물들과 교류할 뿐, 이런 자리에는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나쁜 말이 돌지 않는 건 그의 유려한 처신 덕분이었다.

얻을 건 제대로 얻고, 내줄 건 알아서 먼저 내주는 식으로 재언은 상대가 민망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맞춰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감독이나 투자자가 앞에서 무슨 말을 하든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닙니다.”

결국 시끄럽게 판이 벌어지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로 피신이라도 할 요량이었는데.

여기까지 따라온 누군가가 재언의 빈 잔에 위스키를 채워주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보니까 근심이라도 있는 것 같던데.”

오늘의 물주라던 여자였다. 상속받은 유산을 가지고 놀이를 하듯 이쪽 업계에서 여기저기 투자하며 대단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여자, 리나 윤.

이 감독이 처음 인사를 시켜줄 때부터 여자는 은근한 눈짓을 했었다.

“이런 자리까지 와서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뭐 그렇게 걱정이 많을까, 류 대표는?”

붉은 입술이 억지로 꾸민 아름다움을 뽐내며 움직였다.

순간 재언의 속에서 토기가 치솟았다.

“내가 듣기론 류 대표, 사람이 참 완벽하고 빈틈이 없다고 하던데, 오늘 보니까 그런 것도 아니네. 인사한 사람한테 돌아서서 또 처음 뵙겠다고 하질 않나, 술이 있는데도 같은 술을 또 시키질 않나. 누가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무슨 얘길 하는지도 모르고.”

리나 윤은 한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나른한 표정으로 재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하도 류재언, 류재언, 하니까. 내가 류 대표 너무 궁금해서 이 감독한테 좀 소개시켜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막상 보니까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이 감독이 왜 그렇게 재언에게 오늘 이 자리에 꼭 오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리나 윤은 재언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매우 노골적인 눈빛도 함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류 대표, 훨씬 귀엽잖아.”

추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불순한 시선에 재언은 진심으로 역겨움을 느꼈다.

“무슨 고민인지 얘기 좀 해봐, 회사 경영 문제인가? 투자자 더 필요해? 아니면 혹시 여자 문제? 어느 쪽이라도 내가 도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관리한 흔적이 역력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쯤이었다.

초면에 대뜸 말부터 놓은 리나 윤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평생 타인을 자신의 발아래 깔고 살아온 여자였다.

당장 눈앞의 이 여잘 쫓아내주기만 한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감사 표시를 하고 싶을 만큼 재언은 지금의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재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이 감독 무리였다. 눈이 마주치자 술잔을 들어 보이며 마치 건투를 빈다는 듯 짓궂게 웃기까지 했다.

재언으로서는 사람들 속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며 살아왔고, 그래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재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리나 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멀리서 보던 이 감독 역시 안심한 듯 돌아섰다. 소기의 목적을 다한 이 감독은 홀가분하게 즐길 일만 남았겠지.

“먼저 한 잔 하시죠.”

재언은 리나 윤의 잔을 채워주었다.

“역시 뭘 말하는지 파악이 빠르네. 여긴 너무 시끄러워서 둘만 있을 수 있는 데로 옮기고 싶은데. 이것만 마시고 가서 류 대표 고민이 뭔지 좀 들어볼까?”

리나 윤은 재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온더록 잔을 부드럽게 돌리다 입가에 가져갔다. 달그락거리던 얼음 소리가 이내 멎었다.

술을 삼킨 리나 윤은 아까보다 훨씬 나른한 눈길로 재언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마주 보던 재언은 그녀에게 손짓했다. 리나 윤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재언의 허벅지에 손을 슬그머니 올리며 팔짱을 끼는 리나 윤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서도 유독 은밀한 자리.

재언은 옆에 붙어 앉은 리나 윤을 감싸듯 카우치 뒤쪽으로 팔을 올려 걸쳤다. 그리고 얼굴을 옆으로 내려 리나 윤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살짝 내리감은 재언의 눈, 깎은 듯 미끄러운 콧날이 도드라졌다.

아찔하게 앉은 두 남녀의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파티였다.

“류 대표, 거침없네. 난 이런 거 좋아.”

가빠지는 리나 윤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그렇게 남들 보기에 문제 될 것 없는 장면을 연출한 채, 재언은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마셨으면 이제 그만 꺼져. 아니면 닥치든가.”

뜻밖의 말에 벼락을 맞은 듯 리나 윤의 몸이 굳었다.

이어서 냅다 소리를 지르려고 ‘뭐?’의 미음까지 뻥긋거리던 리나 윤은 순간 수치심에 입을 닫아버렸다.

이런 자리에서 증거도 없이 혼자 들은 말에 난리라도 쳤다간 우스운 꼴이 될 게 뻔했다.

이를 예견한 듯 재언은 남은 말을 천천히 그녀의 귀에 내뱉었다.

“네 돈에 관심 없어. 네 몸에는 더더욱 관심 없고.”

“…….”

“그러니까 그딴 추한 수작질, 딴 놈한테 가서 해.”

기분 더럽게 하지 말고.

손끝을 부들부들 떠는 리나 윤을 두고, 재언은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염증 나는 파티장을 나서려는데 이 감독이 달려왔다.

“류 대표, 혼자 가려고? 이제 재밌어질 텐데 왜 벌써 가고 그래. 둘이 분위기도 좋더니……?”

리나 윤이 말은 못 하고 이 감독과 재언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에 재언은 이 감독을 향해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막상 얘기해보니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어? 아니, 류 대표가 왜…….”

이 감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거나 말거나 재언은 다시 리나 윤 쪽으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뵐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그럼.”

자신에게 있어 역겨운 여자라는 걸 알리지 않고도 재언은 리나 윤을 깨끗하게 쳐낼 수 있었다.

리나 윤은 분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류재언에게 매몰차게 까인 여자로, 웃음거리로 남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란 걸 그녀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 ◆ ◇

“류 대표님, 다 왔습니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재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차 안.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슬쩍 밖을 두리번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재언을 모시는 기사의 퇴근 후, 밤 스케줄이 있을 때만 대리운전을 하러 오는 남자였다.

업체에서 믿을 만한 사람으로 까다롭게 골라 보냈기에 재언은 고정적으로 그를 호출하여 운전을 부탁해왔다.

그렇게 재언을 대신하여 밤 운전을 한 적이 많았던 남자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언제나처럼, 집으로 모실까요, 하는 말에 재언이 읊은 주소는 낯선 동네 주택가였다.

밤이 아득히 깊었다.

새벽 3시.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분명 술 냄새가 많이 났지만, 재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다가 재언을 돌아보며 다시 말을 건넸다.

“……혹시 다시 집에 가시려거든 언제든 저 부르세요. 술 깼다고 바로 운전하지 마시고. 음주 측정하면 아침이라도 수치 높게 나올 수 있거든요.”

이 동네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푹 잘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운전해서 집에 돌아가야 함을 걱정해 한 말이었다.

그래놓고도 재언이 가차 없이 쳐낼까 긴장하긴 했었다. 그동안 남자가 겪은 바로, 류재언은 교양이 있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지만 선을 넘는 관심에는 무정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침묵하던 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떠난 후, 재언은 다시 눈을 감았다.

고요한 차 안에 한숨 소리가 짙게 깔렸다.

새벽 3시에 이게 무슨 짓인지.

자신답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집이 아닌,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은소현의 집 주소를 내뱉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이곳에 도착해 차 안에 앉아 있으니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보려고 온 것도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도 아니다. 왜 왔는지 자신도 궁금해질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대단한 시간낭비에 헛웃음이 나왔다.

“미친…….”

스스로를 욕하며 재언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늦여름 밤공기가 생각보다 상쾌했다. 열대야에 시달리던 여름은 흘러가고 있었지만, 왜인지 재언의 가슴 깊은 곳은 자꾸만 뜨겁게 달아올라 몹시 숨이 막혔다.

「파혼까지 했던 사이에, 다시 잘되길 바란다면 뭔가 달라진 게 있어야죠.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언니한테 어떻게 잘해주겠어요?」

차애주는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말했었다.

「일 때문에 몇 가지 물어본 걸 가지고, 차애주 씨는 소설을 쓰시는군요. 그 소설, 재미없으니 그만하시죠.」

이에 차애주는 안됐다는 듯 고개를 약하게 젓고는 다부지게 말했다.

「류 대표님은 아마, 크게 후회하실 거예요.」

재언은 비소를 머금은 채 그럴 일 없을 거라 단언했다. 쓸데없는 걱정 할 시간에 맡은 일이나 하라고 충고까지 곁들여서.

하지만 파티 내내 누군가 작은 퍼즐 조각들을 완전히 뒤섞어둔 것처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혼란을 겪으며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기도 했다.

급기야 같잖은 돈과 몸을 무기로 치근덕거리는 여자와 말까지 섞고 났더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갑갑해졌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와버린 것이다.

차애주의 말이 마치 중독성 있는 후크송의 후렴구처럼 귓가에서 쉴 새 없이 맴돌았다.

크게 후회하실 거예요. 크게 후회하실 거예요. 크게 후회하실 거예요…….

남들 앞에서는 바늘구멍만큼도 틈을 보이지 않던 재언은 자신의 차에 손을 얹으며 겨우 몸을 지탱했다.

기사가 차를 정차한 곳은 놀이터 옆이었다. 맞은편 슈퍼 건물 3층이 은소현의 집이었다.

「요즘에는 애들이 놀이터에서 잘 안 노나 봐. 떠드는 소리가 크게 안 들려. 거실에서 내다보면 놀이터가 바로 보이거든? 근데 가끔 봐도 막 뛰어다니는 애들이 별로 없고 텅 비어 있을 때가 많다니까.」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잘 떠들던 은소현이었다.

덕분에 원하지 않아도 은소현의 동네 사정이 어떤지 재언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때는 분명 관심이 없어 대충 흘려들었는데, 왜 아직 수년 전의 이야기까지 생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재언은 차에 기대선 채 고개를 들어 슈퍼 건물 3층을 올려보았다.

새벽 3시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은소현의 집 거실에선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 어제 또 거실 소파에서 잠든 거 있지. 잠깐만 누웠다가 방에 들어가야지 해놓고 꼭 잠이 푹 들어버린다니까. 불도 다 켜놓고 자는 바람에 새벽에 눈떴다가 깜짝 놀랐어. 나중에 결혼해서 혹시 나 그러고 자고 있으면 너무 구박하진 마, 응?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래도 고치긴 해야겠다……. 노력해볼게.」

또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을 은소현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잠들었네.’ 하고 부랴부랴 거실 전등을 끄는 모습까지도.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에는 생기마저 돌았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3층 거실 창의 불빛을 재언은 한참 동안 바라다보았다.

무엇이 이곳으로 자신을 이끌었는지, 원했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달이 참 크고 밝았다. 하지만 눈물로 가득 차 부풀어 오른 것처럼 슬픈 빛을 은은하게 퍼뜨리고 있었다.

결국 재언은 차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다시 기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차창 밖으로 위를 쳐다보았을 때였다.

거실 창을 열고 은소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창문에 보안필름 코팅이 되어 있어 바깥에서는 차 안이 보일 리 없는데도, 재언은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걸 깨닫고서야 한심한 스스로를 탓하며 다시 은소현의 집 쪽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재언의 널뛰는 감정이 무색하게도, 은소현은 아래쪽에 어떤 차가 와 있는지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다만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볼 뿐.

“웃네…….”

입가에는 엷고 따뜻한 미소까지 배어 있었다.

꿈을 꾸듯 설레고 벅찬 얼굴로, 그녀가 웃고 있었다.

그날 밤.

같은 곳에서 서로 달리 바라본 밤하늘.

류재언의 달은 처연히 울었고,

은소현의 달에는 빛이 흘렀다. 몹시도 아름답고 그윽한 빛이.

◇ ◆ ◇

[집 앞입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천천히 준비하고 끝나면 전화해요. 올라갈게요.]

집 앞과 탐미재를 오가는 서정한의 초밀착 케어 서비스가 어제 퇴근길부터 시작되었다.

소현은 정한의 문자를 확인하고 거울을 보며 상태를 체크했다.

어제 이른 저녁 집에 들어와 거실에서 기절하듯 쓰러지고, 새벽에 다시 깰 때까지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방에 있는 침대로 가서 또 아침까지 푹 잤다. 그렇게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다른 날보다 피부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가장 신경 쓰이는 눈가 주름에도 아이크림을 열심히 발라주었다.

“이걸로는 택도 없겠지. 그래도 이게 플라시보 효과인가, 마음은 편하네. 그러면 됐지 뭐. 가는 세월을 내 힘으로 어쩌겠어.”

아무리 약속시간보다 이르다 해도 사람을 밖에서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소현은 얼른 준비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걸었다. 생각해보니 첫 통화였다.

“준비 끝났어요.”

막상 전화를 하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끝났으니 데리러 오라 말하는 것도 좀 웃기고, 그렇다고 전화하라고 했는데 기어이 혼자 내려가면 그것도 좀 그렇고.

- 지금 올라갈게요. 계단 내려오지 말고 그냥 있어요.

대접받는 게 익숙하진 않았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운지 몰라 소현은 온몸이 간지러웠다. 그냥 챙겨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건가.

“네, 이따 봐요.”

- 끊게요?

용건이 끝났으니까 전화 끊는 게 왜……?

“그럼요?”

- 나 올라갈 때까지만 통화해요.

……바로 지금 만날 거 아닌가. 하지만 잠깐의 공백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정한은 통화를 이어갔다.

- 잘 잤어요?

아침부터 지나친 호강이다.

정한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고이 담아낸 것만으로도 휴대전화는 오늘의 제 몫을 다했다. 바로 칼퇴근 시켜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기만 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덩어리가 오늘 아침 어쩜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게 느껴질 수가 있냔 말이다.

“네, 잘 잤어요. 엄청 푹.”

- ……난 못 잤어요.

“왜요?”

- 좋아서 잘 수가 있어야지.

딩동.

뭐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소현은 반깁스한 다리를 이끌고 한 손에 목발을 짚은 채 열심히 현관으로 나아갔다. 문을 열자 공기를 시원하게 물들이며 밀려드는 향기.

깨끗한 티셔츠를 입은 남자의 가슴팍과 목 언저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열린 문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있는 정한이 눈에 보였다.

전화 속 목소리만 최선을 다하는 줄 알았더니. 이 남자의 얼굴, 아침부터 어쩜 이렇게 성실할까. 제 몫을 다하는 이목구비를 보기만 해도 가슴 뿌듯했다.

“은소현 씨 보러 올 생각에 좋아서 잘 수가 없었어요.”

순수하게 미적 관점에서 그의 얼굴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정한은 통화로 하던 말을 이어서 했을 뿐이지만, 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대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그저 비현실적이었다.

소현은 달콤하게 밀려든 해일에 아찔해졌다.

“이제 은소현 씨가 날 더 이상 나쁜 놈으로 보지도 않을 거고, 앞으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 거니까. ……새삼 신기하고 믿기지가 않더라구요.”

말을 마친 정한은 소현이 메고 있던 정장용 가죽 백팩을 조심히 내려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오게끔 메었다. 그가 소현의 가방을 메자 꼭 어린이 가방처럼 작게만 보였다.

그리고 든든한 등을 내보이며 앉았다.

“업혀요. 내려가게.”

어제도 업힌 채로 올라왔었다. 승강기가 없는 작은 상가 건물이라 3층까지 계단을 이용해야 하기에 정한이 문 앞까지 기어이 업고 올라왔던 것이다.

됐어요, 괜찮아요, 안 돼요, 그냥 업혀요. ……실랑이는 어제 지겹도록 했다. 더 하면 아마 정한도 지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반항은 곱게 접어두고 소현은 정한의 등에 포옥 업혔다.

새삼 걱정스러웠다. 이러다 발로 땅을 딛고 걷는 법을 아예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집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은데.”

“네?”

“은소현 씨가 날 집까지 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정도만 하는 거예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정한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집 밖으로 나오면 내 말 들어줘요. 지금처럼 이렇게.”

“아, 네. ……그게, 몸은 편해서 좋은데, 사실 마음이 안 편해요. 괜히 미안하고. 아침에도 이렇게 일찍 데리러 오니까.”

감당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남은 계단을 내려가는 정한의 걸음이 정성스러웠다. 귀한 것을 등에 업은 듯 매우 조심스럽기도 했다.

“은소현 씨가 언제 넘어와주나 기다리면서, 수작 거는 거예요, 나.”

그가 말했다.

나도 바라는 게 있어 하는 일이니 당신이 미안해할 건 없다고.

“그리고 넘어온 다음에는, 훨씬 더 잘해줄 건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눈앞 가득 펼쳐진 무지개도 충분히 예쁜데, 산 너머 무지개는 훨씬 커다랗고 아름답다고.

“그러니까 은소현 씨, 궁금해지면 얘기해요. 언제든지.”

마음이 생기면 함께 가자고.

“난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언제라도 산 너머 무지개를 보러.

당신의 손을 잡고 기꺼이 데려가겠다고.

그렇게 그가 한마디 한마디 정성을 다해 말했다.

함께하는 출근길, 꽤 아름다웠다.

어제와 같은 태양이 떠올랐고, 어제와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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