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17화 (17/52)

17화– 어차피 감정이란 한낱 쓸모없는 것이니2017.08.28.

“감당할 자신 있어요?”

이 남자는 어쩜 이런 재주를 지녔을까. 별말이 아닌데도 마주 선 소현의 심장이 발 아래로 쿵 떨어졌다.

소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셔 오고, 모셔다 주고, 여기 와서는 일도 하지 말라는데.

이 무슨 호사인가.

게다가 그렇게 해서라도 탐미재에 계속 올 수 있게 해주니, 설득할 수 있는 기회까지 유지한 셈이다.

유리한 쪽은 무조건 소현이었다.

“나야 고맙지만, 서정한 씨만 괜히 번거로울 것 같은데 어떡해요.”

“좋아하는 사람 일인데 그게 뭐 번거로워요. 기쁘지.”

낮고 감미로운 음성이 바람처럼 선선히 머물다 사라졌다.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결코 잡을 수 없기에 아쉽기만 한 순간처럼.

“은소현 씨가 다쳐서 기쁘다는 건 아니에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아서 기쁘다는 거지.”

“이해했어요.”

그는 작은 부분조차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부연 설명했다.

서정한은 자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소현에게 어떠한 답을 강요하지도, 억지로 유도하지도 않는 남자였다. 다만 본인의 감정에 충실할 따름이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담백했다.

직접적인 표현도 거부감 들지 않았던 건 그래서인지 몰랐다.

숨겨진 뜻이 전혀 없으니까.

“이제 부담 갖지 말고, 감당해요, 그럼.”

그저 소현이 감당해야 할 몫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과 목적은 절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 시간 후로 그가 베풀 모든 친절과 배려에 대해 어떤 부담도 느끼지 말라는 것이다.

소현이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배려에 배려를 더한 마음이었다.

소현은 가슴이 벅찼다.

한국인의 강한 의지를 뒀다 어디에 쓰겠는가. 이런 남자를 감당할 때 써야지, 아낌없이.

◇ ◆ ◇

민 원장의 드레스 샵.

“마 팀장님, 오셨어요?”

“어, 우리 신부님 조금 늦으신대. 나 먼저 들어왔어, 더워서.”

“그래요? 가봉 세팅은 끝났는데. 잠깐 기다리실 동안 시원한 거 드릴까요?”

“그 전에 나 물어볼 거 있어.”

마진혜 팀장은 지난번 이곳에서 은소현과 마주쳤던 것을 기억했다. 벼르고 별렀던 궁금증을 해소할 시간이다.

“자기네 요즘, 어느 VIP 드레스 준비해?”

드레스 샵 실장에게 은근히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은소현이 담당하는 신부의 드레스를 민 원장이 직접 제작한다는 말을 들은 후로, 마진혜는 줄곧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신부가 누구길래. 얼마나 대단한 신부의 결혼식을 진행하길래.

그게 왜 하필 은소현 담당인지. 어떻게 하다가 그 결혼식을 맡게 된 건지.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알 만한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주변을 살짝 떠보았는데 별 소득은 없었다. 차애주 실장과 친한 다른 플래너들도 그것까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티를 내며 알아보고 다닐 수도 없고, 마진혜는 갈수록 더 답답하기만 했다.

“무슨 VIP요?”

“응? 자기도 몰라? 저번에 민 원장님이 누구 드레스 준비하신다고 하던데. 요즘에 웨딩 고객 안 받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

“아아. 원장님 고객!”

그제야 샵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진혜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그래, 자긴 알지? 누군데?”

“몰라요.”

“어?”

“정말 몰라요, 저희도. 그 결혼, 극비로 진행되는가 보더라고요. 원장님이 저희한테도 아직 얘기 안 해주셨어요. 디자인도 혼자 뽑으실 것 같던데요?”

마진혜는 인상을 팍 썼다.

아니, 이 사람들은 답답하지도 않은가. 얘길 안 해준다고 그걸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나? 마음만 먹으면 금방 알아낼 수도 있을 텐데.

“근데 그게 왜 궁금하세요?”

샵 실장의 되물음에 마진혜가 미리 준비한 말을 태연하게 둘러댔다.

“아니, 우리 신부님 중에 민 원장님 드레스 너무 입고 싶다고 하신 분이 계셔서. 원장님 혹시 이제 일반 고객도 받으시나 하고.”

“올해는 해외 일정도 많으시고 아마 안 되실 거예요.”

“그래, 뭐.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소현의 신부는 민 원장의 드레스를 입는다……?

검은 호기심은 증폭되었다.

이럴수록 더 궁금해 미칠 듯한데 말이다. 마진혜의 눈빛에 초조함이 드리워졌다.

“그럼 신부님 도착하시면 안내할게요. 잠깐 계세요.”

샵 실장은 마진혜 팀장이 대기하는 드레스 룸에서 빠져나왔다.

“어휴, 기가 다 빨리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복도를 걸어 나갔다.

마진혜는 분명 이전에 같은 회사에 있었던 은소현이 여기에 드나드는 걸 보고 저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괜히 아닌 척하며 돌려 묻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남의 신부가 뭘 입든 말든 지가 무슨 상관이래. 관심 좀 끄지, 뭐 그리 궁금해서 저렇게 꼬치꼬치. ……쯧쯧.”

상대가 누구든 주목받거나 대접받는 모습을 유독 못 견뎌했다. 마진혜는 지금 은소현이 VIP 신부로 인해 특별대우를 받으며 일을 진행한다고 생각했고.

“저러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마진혜 팀장이 식장 수준이나 준비 규모에 따라 신랑신부를 은근히 가려 받는다는 말이 아예 틀린 소리도 아닌 모양이었다.

업계에 그런 이들이 종종 있다.

고가의 샵 위주로만 돌며 준비하는 신부를 대동하면서 어찌나 본인 목에 힘을 세게 주시는지.

이곳에 온 후로 실장은 그런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마치 돈과 권력으로 나눈 급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가치도 함께 판단받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는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상대적 기준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변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해서 부족하다 느끼면 남의 머리채를 잡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으, 싫다.”

그런 사람들의 끝은 꼭 좋지 않았다. 주변을 망하게 하든, 혼자 망하든, 혹은 함께 망하든. 하여튼 조용할 날이 없는 건 분명했다.

그녀는 마진혜에게서 달아나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극비 결혼의 주인공이 누군지 행여나 알게 되더라도 그녀에게는 절대 이야기해주지 말아야겠다, 굳게 다짐하면서.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녀와 같은 혜안을 지닌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마진혜의 꾸며진 겉모습만을 보고 다가와, 별다른 경계심 없이 속을 다 내놓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마진혜는 그렇게 누군가를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덫을 놓을 테고.

드레스 룸 안에 혼자 앉아 제 신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진혜는 누구에게 가서 떠보면 될까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 ◇

- 언니, 다쳤다면서요!

애주의 음성이 휴대전화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 했다. 소현은 울려대는 전화를 비몽사몽 중에 겨우 찾아 받은 참이었다.

간신히 뜬 눈 사이로 창밖을 보니 이미 해가 지고 까만 밤이 찾아들었다.

“우움……, 지금 몇 시……?”

- 저녁이에요, 8시.

참 길고 긴 하루였다.

너무 많은 진실을 알게 된 날이고, 또 너무 많은 감정에 부딪힌 날이었다.

힘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건,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서정한이 차에 태워 빌라 앞에 데려다줄 때까지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는데.

긴장이 풀려서일까, 소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작은 2인용 소파에 무너지듯 쓰러져버렸었다.

- 해수 씨한테 들었어요. 얼마나 다친 거예요? 언니, 괜찮아요?

“응……, 가볍게 삐끗했어, 살짝 접질린 정도.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반깁스고.

고단했는지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 아무리 반깁스래도 더운데 답답하잖아요, 불편하고. 지금은 어디예요? 아직 책방이면 내가 갈까요?

“아니, 나 집에 들어왔어. 방금 잠들었다가 일어났는데. ……애주야, 근데 지금 너무 졸려서…….”

- 그래요, 집이면 됐어요. 언니, 일단 푹 자요.

“응, 내가 내일 전화할게……. 만나면 해줄 얘기가 많…….”

서정한이 개쓰레기가 아니었다는 것도, 그때 하와이에서 보았던 모습들 이면에 실은 다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말해줘야 했다.

그는 변함없이 자신에게 너무나 따뜻한 남자라는 것도.

그래서 종일 혼란스럽게 요동치던 감정들도 모두…….

잠의 경계선에 오가던 소현은 결국 스륵스륵 눈을 감았다.

◇ ◆ ◇

한편, 이날 밤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 있던 류재언은 갑갑한 마음에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중요하지만 실은 무척 가기 싫은 자리였다. 한 영화감독이 주축이 된 술자리.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감독이 축하를 받겠다며 스스로 벌인 자리였는데, 평소 노는 것을 좋아하는 감독이라 그 규모가 대단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막강한 재력을 가진 여자 투자자가 오늘의 돈잔치 배후라는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ㅡ 류 대표, 이따 올 거지?

감독은 재언을 콕 찍어 파티에 꼭 오라고 했다. 확인전화까지 직접 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이 감독님, 전 다음에…….」

ㅡ 황채나 오디션 보게 할 거라며? 내 영화에 넣지 마? 류 대표 잘나가더니 점점 더 비싸게 굴고. 술 한번 사라고 해도 핑계 대면서 빠져나가기나 하고 말이야. 허,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해야 하나? 우리 입장이 바뀐 거 같지 않아?

악마 같은 재능 때문에 주변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감독이었다. 벌써부터 차기작을 바라보며 모여드는 이들만 해도 엄청났고.

재언 역시 당장 그 감독의 영화에 소속사 배우들이 기용되도록 힘을 써도 모자란 판이다. 그나마 재언의 회사 배우들의 이미지가 마음에 든다며 감독이 먼저 러브콜을 보내왔기에 조금 유리한 위치이긴 했다.

투자자, 제작사 간부, 유명배우들 할 것 없이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 그 자리에 재언은 결국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향락에 젖어 노는 자리에 거부감을 느끼니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했을 뿐.

파티 장소로 이동을 하기 전, 여유를 두고 사무실에서 나온 재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은소현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ㅡ 일어났어? 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애가, 그런 자리 다니느라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속 풀게 뭐라도 좀 사다 줄까?

「신경 쓰지 마.」

ㅡ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목소리도 안 좋네. 오늘은 주말인데 좀 쉴 거지? 방해 안 할 테니까 집에서 푹 쉬어. 너 그러다 몸 상하겠…….

「……끊자. 전화 그만해. 나 이미 일하러 나왔으니까.」

그때는 머릿속이 일로만 가득 차서 빈자리가 전혀 없었다.

재언에게는 은소현이 결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관심을 주지 않아도 은소현은 곁에 있으니까. 아무런 불평도, 타박도 없었으니까.

우직할 정도로 제 옆을 지키는 그녀를 두고 재언은 사랑을 할 필요도, 줄 필요도, 받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일에 빠져 성공가도를 달리다 돌아보니, 옆에는 그녀가 사라지고 없었다.

때가 되면 돌아오겠거니 했지만, 그건 재언의 착각이었다.

오늘 같은 날에 은소현이 있었다면, 그녀가 했을 법한 말들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종일 일하고 밤에 또 그런 자리 불려 나가면 넌 힘들어서 어쩌냐고. 잠은 언제 자고 내일 일은 어떻게 하냐고. 몸 축나는 거 아닌지. 속 아프지 않게 약 좀 먹고 가라고.

사람 귀찮게 하는 걱정을 하고 또 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무한반복 했을 것이다.

이젠 헤어진 마당에 그런 잔소리를 할 리가 없지만.

재언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은소현의 사무실 앞까지 왔다.

설마 잔소리가 듣고 싶어 여길 온 건 아니겠지 싶어 스스로를 한심하게 느끼려던 찰나.

크게 울려대는 차애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다쳤다면서요!”

늘 그렇듯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재언은 문 앞에 선 채, 안쪽에서 통화 중인 차애주를 바라보았다.

다쳐, 누가?

“어디예요? 아직 책방이면 지금 내가 갈까요?”

책방이라 하는 걸 보니 역시 은소현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집이면 됐어요. 언니, 일단 푹 자요.”

어딜 얼마나 다친 것인지 통화 내용으로는 알 수 없었다. 차애주는 전화를 끊었고, 그러고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책상 위 휴대전화를 쳐다보았다.

“휴우. 언니가 그 책방에 가 있을 때부터 괜히 불안하더라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재언은 밤늦게까지 은소현이 사무실에 있을 때가 많아 오늘도 혹시나 하고 왔던 마음을 차갑게 거두어버렸다.

귀찮아, 신경 쓰지 마, 그만해, 비서랑 상의해.

그가 줄기차게 보였던 모습들이었다.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은소현은 감당할 수 없는 빚에 허덕이다 못 견뎌 제게 오면 그뿐이다.

어차피 감정이란 한낱 쓸모없는 것이니, 그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순간순간 변해버리는 나약한 감정 따위에 휘둘려봤자 무슨 득이 있다고.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

그냥 깔끔하게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끝인 일이다. 여기에 어떤 감정도 끼어들 틈은 없다.

어차피 은소현은 사무실에 있지도 않은데 여기 더 있어봐야 뭐하나 싶어 재언은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그는 몇 발짝 가지 못해 우뚝 멈추어 섰다.

뭘까.

이유를 모르겠지만 가슴속이 불로 지진 듯 확 뜨거워졌다.

결국 다시 돌아선 재언은 은소현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류 대표님?”

퇴근하기 위해 가방을 챙겨 일어서던 차애주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저것 물으면 언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며 성가시게 굴게 분명한 여자였다. 그래서 말을 섞고 싶지 않았었는데, 이젠 별수 없게 됐다.

“은소현은…….”

“언니 여기 없어요. 요즘 탐미재에서 출퇴근하잖아요.”

“왜 다쳤습니까?”

“들으셨어요? 언니가 발목을 살짝 접질려서 반깁스를 했다는데요, 심하진 않대요. 병문안 가시려고 하는구나.”

심하지 않다는 건 다행이었다.

“죽을병도 아닌데 병문안은 무슨.”

“류 대표님, 말을 참 정떨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으세요.”

차애주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일침을 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궁금했던 걸 하나 더 묻기로 했다.

“은소현과 책방 주인이, 일전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찝찝했었다.

차애주도 지난번에 얘기하기를, 두 사람 사이의 기운이 이상하지 않냐고 했었다. 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재언도 봤다면 못 느꼈을 리 없다고.

그렇긴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파혼 후 은소현이 어떤 남자와도 접점이 없었다는 걸 재언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기분 탓이리라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본 책방 주인과 별일이 있었을 리 없지 않은가.

“두 사람, 만났었죠.”

“언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었는지 아시면, 아마 놀라실걸요. 그리고 만난 것도 만난 건데요, 둘이 썸을 아주 아주 심하게 탔었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그게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거든요.”

뭘 타.

썸을 타?

아주 아주 심하게 타?

재언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차애주 씨, 자세히 얘기해요. 빙빙 돌리지 말고.”

“저도 이 얘기를 류 대표님께 자세히 해드리고 싶긴 한데요. 류 대표님이 언니에 대한 마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한, 저도 드릴 말씀은 별로 없어요.”

차애주가 강한 어조로 하는 말에 재언은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는 가슴속이 뜨겁더니, 지금은 머리가 울린다.

“류 대표님이 소현 언니 아직 좋아하시는 것 같고, 그래서 가능하면 저도 두 분 사이 잘되게 밀어드리고 싶긴 했는데요. 대표님이 그렇게 뻣뻣하게 나오시면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요? 순서가 좀 잘못된 거 같지 않아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파혼까지 했던 사이에, 다시 잘되길 바란다면 뭔가 달라진 게 있어야죠.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언니한테 어떻게 잘해주겠어요?”

“…….”

“상처는 한 번만 주세요. 두 번 아프게 하면 사람이 어떻게 견뎌요. 언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말 모르시는 거 아니죠? ……전, 언니가 이젠 좀 행복해졌으면 좋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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