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감당할 자신 있어요?2017.08.25.
세찬 고백에 마음이 다 얼얼해지고 말았다.
「와요, ……나한테.」
무슨 정신으로 탐미재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소현은 익숙하지 않은 목발과 깁스보다도 정한의 존재가 더욱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더 이상 개쓰레기가 아니었고, 앞으로 새로 알아가야 할 것도 너무나 많았다. 설레면서도 두렵고, 벅차면서도 버겁기까지 했다.
천천히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리겠다는 남자.
지금 이게 현실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으니 말이다. 소현의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자꾸만 요동쳤다.
“다쳤는데 조퇴는 안 해?”
외국인의 유창한 한국어 솜씨에 새삼 놀란 소현이 자꾸만 흩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현실 직시.
그래, 여기는 탐미재다.
장소 대관을 허락받기 위해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다가 발목 부상을 당한 곳.
소현은 자신의 옆에 다가온 앤드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조퇴’라는 말까지 알아요?”
앤드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빳빳이 들고 대답했다.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네, 그렇죠. 없으시겠죠.”
앤드류가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책방 안에서 보는 책만 해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원서들이었는데, 대충 그림만 보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깨알 같은 글씨까지도 종일 정독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책방을 찾은 손님들 중에는 가끔 외국인도 있었는데, 앤드류와 대화하는 걸 들어보면 영어가 아닐 때도 있었다.
소현은 대충 그게 프랑스어와 일본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도 있었는데, 네덜란드어 혹은 스페인어가 아닐까 싶다.
책방 직원이 최소 5개 국어 추정이라니, 저 쓸데없는 고스펙의 고급인력은 대체 뭘까 싶다. 주인이나 직원이나 지나치게 한량 같은 점도 희한했다.
이곳 탐미재는 여러 모로 이상한 나라였다.
“근처에 제 신부님이 지나가다 들른다고 해서요. 좀 이따 여기서 보려고요.”
이소미 신부가 잠깐 오기로 했다. 아까 설거지를 하면서 애주와 통화로 그 얘기를 하다 이 사달이 났던 것이고.
원래는 앞에 있는 카페로 나가서 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이렇게 됐으니 부득이하게 책방 안에서 잠시 보기로 했고 정한에게도 허락을 구해둔 참이다.
이소미 신부만 다녀가고 나면 아무래도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봐야 할 듯싶었다.
“그래, 그거 좀 다쳤다고 금방 조퇴하고 집에 바로 가버리고 그러면 안 되지.”
앤드류의 말에 소현이 영문을 알 수 없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네?”
“사람은 모름지기 강한 의지가 있어야 돼.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 거 아니겠어?”
의미가 깊은 말도 좋지만 상대방도 이해 좀 시켜주면서 얘기했으면 좋겠다, 외국인이여.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너, 우리 하니한테 아직 여기 장소 빌리는 거 허락 못 받았잖아.”
앤드류는 목소리를 낮추며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고, 그제야 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정한은 아까 병원에서 돌아온 후 앤드류에게 붙잡혀 안채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지금은 책방에 책을 입고하러 찾아온 작가와 바 쪽에서 이야기하는 중이다.
앤드류는 고개를 쭉 빼어 정한의 동태를 살피고는, 대단한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한 얼굴로 소현에게 소곤거렸다.
“우리 하니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탐미재 대관까지 허락해줄 거라는 건 착각이야, 베이비.”
“그,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아까 안채에 들어가 정한에게 오늘 있었던 얘기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 둘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정한이 소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
아니, 정한을 닦달해 실토하게 했겠지만.
하지만 소현으로서는 그 감정을 장소 대관이랑 엮는 건 너무 앞서 나간 문제였다.
지금은 정한과 달라진 관계만으로도 혼란스러워 정리조차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앤드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 깊고 푸른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먼 곳을 응시했다.
“우리 하니가 사실 보기보다 호락호락한 남자는 아니거든.”
사차원을 훨씬 넘어 사십차원 어딘가에 홀로 떨어져 있는 외국인과의 일대일 대화가 이 순간 몹시도 버겁게 느껴졌다.
그냥 서정한과의 관계만 고민하면 안 되는 걸까.
아무래도 그건 사치인 모양이다.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닌, 탐미재니까.
“내가 겪어봐서 알지. 우리 하니는 원칙 하난 엄청 확실한 남자라서, 억지로 너한테 잘 보이려는 짓 따윈 하지도 않을 거야. 여길 빌려주지 않는다고 네가 우리 하니를 미워한다면, 하니는 아마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웃어버릴걸. 은근히 독해.”
“……대놓고 독한 거 아니에요?”
“그치? 독하지? 웃으면서 안 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나빠.”
뭘 받고 싶은데 못 받았던, 그런 처절한 경험이 앤드류에게도 있나 보다.
그는 제대로 감정이입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전 여기 장소 꼭 빌려야 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일단 이 문제는 서정한을 잘 아는 앤드류에게 상의하여 해결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라면 분명히 좋은 수가 있을…….
“더욱더 최선을 다해.”
……리가 없구나.
“그런 말은 나도 하겠네요.”
허탈했다. 돌팔이 의사 보듯 소현이 신뢰감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한번 믿어보라니까.”
“험한 세상, 누굴 함부로 믿어요.”
“그건 맞는 말이야. 내 조언 참고하는 건 알아서 판단해, 그럼.”
“그럼 계속 조언해보세요.”
기다렸다는 듯 앤드류가 말을 이었다.
“설마 다리 다쳤다고 우리 하니 설득하러 나오는 걸 중단할 생각은 아니겠지? 여기 책방 와서 일하는 거 말이야.”
그건 조금 고민 중이었다.
청소하고 책 정리하는 등 몸을 쓰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다친 다리로는 책방에 나와 있어도 민폐가 아닐까 걱정이었으니까.
그러나 소현의 속을 이미 간파했다는 듯 앤드류가 단번에 치고 나왔다.
“꾀부리지 말고 계속 나와. 설득을 하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봐야지, 아무리 천재지변이 생겨도. 사람이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 얘기였어.”
“우와, 천재지변이란 말도 알아요? ……가 아니라, 제가 발목을 다쳤으니 여기 나와봤자 괜히 방해만 될 것 같아서요.”
“그건 네 생각이고. 방해가 될지 도움이 될지, 아무튼 나와. 책방에 다리 안 쓰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조금 다쳤다고 그새 포기하려고? 너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야?”
앤드류는 악덕업주 뺨치는 자태로 소현의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우리 하니가 장소 허락해줄 때까지 열심히 계속 나와. 매일매일, 절대 빠지지 말고. 우리 하니는 성실한 걸 제일 좋아하니까.”
“……네에, 알았어요. 힘닿는 데까지 성실해볼게요. 조언 감사해요.”
소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툴게 목발을 짚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앤드류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계속 와야 정한이 원 없이 네 얼굴을 볼 수 있잖아.
너희 둘,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지.
앤드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기꺼이 오작교를 자처하였다. 온몸을 바쳐 다리를 놓은 까마귀와 까치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어쩌다가 다리를! 괜찮으세요?”
탐미재에 온 이소미 신부와 그녀의 친구 신해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소현의 발목을 걱정해주었다. 상대방에게 괜한 염려를 끼치는 것이 소현은 그저 민망하기만 했다.
“괜찮아요. 심한 거 아니고 살짝 삐끗한 정도라, 금방 깁스 풀 수 있대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여름이라 많이 답답하시겠어요.”
소현의 발목에 대한 걱정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이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탐미재의 분위기를 칭찬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이 책방 너무 좋네요. 이쪽도 자주 지나갔었는데 골목 안에 이런 곳이 다 있었다니.”
“서울 같지가 않아요, 여긴. 그렇다고 촌스러운 것도 아니고. 고풍스러운데 세련미 넘치는, 이건 뭐지? 암튼 분위기 너무 좋고 특이하네요.”
소현은 그녀들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가 샵 옮기려고 해서 여기 서촌도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오늘도 저 건너편 미술관 가까이에 자리 났다고 해서 같이 와봤는데, 결국 거기랑도 인연은 아니었나 봐요.”
“아, 그래서 신부님이랑 해수 씨 오늘 서촌에 왔던 거구나. 부동산 자리 알아보는 게 진짜 힘들죠. 고생 많았겠어요, 더운데.”
“네, 대표님 여기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가고 좋네요.”
소현은 거래하고 있는 수제케이크 샵 오너디자이너 신해수 대표의 소개로 친구인 이소미 신부까지 계약을 하게 되었다.
신해수의 케이크샵이 온라인에 오픈하여 주문도 별로 없던 초창기.
좀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웨딩케이크를 찾던 소현은 인터넷에서 신해수의 케이크를 발견했었다. 이거다 싶은 소현은 신해수의 작업장에 바로 찾아가 계약을 단행한 바 있었다.
두 여자 모두 맨땅에 헤딩하듯 각자 사업체를 처음 꾸려나가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맺은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졌다.
신해수와는 단순히 업무상 만난 사이였는데도 그토록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진행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추천해주다니, 소현은 그녀의 믿음이 무척 고마울 뿐이었다.
“근데 여기, 아까 오기 전에 이름이 특이해서 검색해보니 SNS에서는 은근히 유명한 곳이었더라고요.”
소미 신부가 경외에 찬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이었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자료집이나 서적들도 엄청 많은데, 심지어 그걸 편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 여기 주인이. 그래서 미대생들이나 그쪽 업계 사람들도 희귀본 자료 참고하러 찾아오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라고 해서 놀랐어요.”
소현이 탐미재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런 이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예술책방 탐미재는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책을 보는 곳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책방’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일하는 사람들 말고, 진짜 주인은 아마 따로 있을 거란 얘기도 있더라구요.”
그건 처음 듣는 소문이다.
주인인 서정한 말고, 진짜 주인이 따로 있다고?
“책들이 하도 비싸서 그런가, 엄청난 재력가가 죽음을 앞두고 사회에 환원할 겸 만든 곳이라는 얘기도 있고, 예술책 수집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나중에 희귀본 박물관 만들 생각으로 터 잡는 중이라는 얘기도 있고. 그래서 미리 손님들 끌어서 인지도 쌓아놓으려고 여기 직원 면접 볼 때 얼굴 빡세게 봤다는 얘기도 있고, 뭐 탐미재에 대한 썰 은근 많더라고요. 그게 다 너무 많은 희귀본 때문인가 봐요.”
소현은 그렇게까지 자세히 찾아본 적은 없어 몰랐다.
사실 탐미재에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소성이라는 가치에만 짜릿한 관심을 보였고, 이를 토대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마음껏 양산해내었다.
희귀본을 모아둔 서가가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 소문 속 탐미재는 ‘열일’ 중이었다. 현실의 탐미재는 제자리에 머무른 채 이토록 느긋하게 존재하는데도.
“……표님. 은 대표님?”
“아, 네.”
생각에 빠져 있던 소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장소 섭외 계획이랑, 이후 일정표 정리해서 보내주신 거 오빠하고 같이 확인했었거든요. 오빠가 엄청 감탄하더라고요. 대표님 일 진짜 깔끔하게 잘하신다고.”
“아, 다행이에요. 신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아 참, 그리고 오빠가 저희 대학 때부터 같이 찍었던 사진들 예쁜 걸로 추리고 있대요. 결혼식 때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어, 신부님, 신랑님이랑 대학 때 만나셨어요? 생각보다 사귄 기간이 꽤 되셨네요? 지난번에 두 분 뵈니까 얼마 안 된 커플들보다 더 파릇파릇하던데.”
소미 신부와 신해수 대표는 소현보다 한 살 적은 서른 살이다.
“헤헤, 처음 사귄 건 스무 살 때였는데,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반복하면서 그렇게 이십 대를 다 보내고 여기까지 같이 온 거죠, 뭐.”
그리고 소미 신부는 신 대표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10년 전엔 내가 민성 오빠랑 이렇게 결혼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치.”
“진짜 신기해.”
“하긴, 네가 쌤이랑 결혼이 벌써 10년도 훨씬 넘었다니 새삼 그게 놀랍다.”
열아홉 살에 결혼한 신 대표가 나이 서른에 벌써 초등학생 남매의 엄마라니, 아무리 들어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사실이다.
소현의 눈에는 아직 애기처럼 뽀얀 볼이 귀엽기만 한데.
그러니 결혼이란 게 참 희한했다.
결혼이 어느 시점에 어떻게 찾아오는지에 따라 인생 후반부의 그림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소현의 첫 번째 그림은 먹색이었다.
파혼으로 중단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머지 인생 모두 먹색으로 물들 뻔했다.
소현은 힘겨운 결정이었지만 그걸 지워내 버리고 천연색으로 다시 그려가기로 했었다.
하늘은 하늘빛으로, 숲은 숲빛으로, 물은 물빛으로, 꽃은 꽃빛으로.
온전히 제 빛을 발하여 반짝거리는 삶을 누리기로, 소현은 스스로 결심했었다.
앞으로 살면서 결혼을 하게 될 수도, 어쩌면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어떤 그림을 그려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진다는 게 못내 중요했다.
후회 없이 그려나갈 붓은 이미 손에 쥐여져 있었다.
◇ ◆ ◇
“저렇게 일하는데 몸 상하지 않을까.”
걸음을 멈춰 선 정한이 바깥쪽 테이블에 앉은 소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잔뜩 걱정 어린 혼잣말을 듣고 앤드류가 바짝 다가붙었다.
“그러게 말이야. 엄청 상할 것 같다.”
소현을 찾아왔던 손님들은 조금 전에 돌아갔다.
정리할 게 남은 듯 소현은 노트북을 펴고 잠시 일하는 중이었다. 금방 집에 가서 쉴 것처럼 얘기하더니, 생각난 건 바로바로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그래도 은소현이 여기 오래 있으면 얼굴도 더 볼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니야?”
앤드류의 말에 정한이 바로 대답했다.
“맞아.”
당연한 소리는 해서 뭐하냐는 듯 깔끔하게.
더불어 아쉬움도 함께였다.
“그런데 다쳤으니 내일부터는 나오기 힘들겠지. 당분간은 좀 쉬어야 할 테니까.”
“하하, 과연 그럴까. 의지의 한국인인데.”
“무슨 소리야.”
“넌 아무 걱정 말고 네 책임감이나 차질 없이 준비해.”
앤드류는 점점 더 모를 말만 해댔다. 입꼬리를 씰룩대면서 무척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꿍꿍이 있지?”
“……음?”
“앤디, 자꾸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말자. 의지, 책임감, 차질까지 모르는 게 없으면서.”
정한의 불만 어린 음성에 앤드류는 태초의 형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안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내가 형은 맞는 것 같다.”
“……아, 손 치워. 어휘력이 또 얼마나 는 거야? 이쯤 되면 대단한 게 아니라 무섭다고.”
“이제 그만 인정하고 형이라고 해.”
“미국인이 왜 자꾸 형, 동생은 따지는 건데, 대체.”
한편, 소현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겨 일어섰다. 숄더백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목발을 짚어 정한이 있는 안쪽 서가까지 걸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전 이만 가볼게요.”
정한이 돌아보았다. 그리고 돌아본 정한의 어깨 너머 앤드류도 한 시야에 보였다.
앤드류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의지’라고 했다. 똑똑히.
아까 그가 했던 말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꾀부리지 말고 계속 나와. 설득을 하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봐야지, 아무리 천재지변이 생겨도. 사람이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 얘기였어.」
인사가 틀려먹었다는 신호다. 의지가 전혀 안 보였다는 거지.
소현은 얼른 고쳐 말했다.
“지금은 이만 가보지만, 내일도 다시 온다는 말이죠. 저 내일 아침에도 일찍 올게요. 일찍, 아주 일찍.”
소현의 말에 매우 흡족한 듯 앤드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앞에 선 정한은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내일 아침에도 온다니요. 은소현 씨, 그 발목으로 어떻게 여길 또 나오려구요. 움직이기도 힘들어하면서.”
책방 주인 당사자의 저 반응을 보자니 순간 이게 아닌가 싶었다.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신경만 쓰이게 하고 역시 방해만 될 뿐이려나. 그건 정말 사양하고 싶다. 누구에게도 폐 안 끼치고 살고 싶은 인생인데.
「우리 하니가 장소 허락해줄 때까지 열심히 계속 나와. 매일매일, 절대 빠지지 말고. 우리 하니는 성실한 걸 제일 좋아하니까.」
정한의 뒤에 선 앤드류가 눈을 부릅뜨고 소현을 쳐다보았다.
알았으면 맡은 바 소임을 다해라, 어서.
소현은 앤드류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책방에 나와 있는 게 서정한 씨한테 많이 불편할까요? 신경 안 쓰이게 잘할 수 있는데. 오늘 하루 목발 써봤더니 이제 좀 익숙해지려고도 하구요. 내일은 아마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안 다친 거나 마찬가지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나야 은소현 씨 나오는 게 좋죠.”
앗, 뭐가 이렇게 쉬워.
하지만 생각해보니 쉬운 게 당연했다.
“안 보면 보고 싶을 텐데.”
상황에 휩쓸려 자꾸 잊게 되는데 이 남자, 나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 좋자고 은소현 씨 더 아프게 할 수 없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걸 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발목 최대한 안 쓰고 쉬어야 빨리 낫는다고 하지 않았나.”
이러면 더욱더 할 말이 없어지는데.
소현은 이토록 달콤한 철벽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진짜 할 말 없게 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꿀은 그 다음에 더 먹고 말았다. 입술이 딱 붙어버리도록.
“그래도 정 와야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한다면.”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쿵쿵 울리는 게 누구의 심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은소현 씨 여기 와서 내 허락 없이는 청소도, 책 정리도, 짐 옮기는 것도 다 하지 말아요. 그냥 앉아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달콤한 철벽이 무너지며 꿀이 강을 이루어 흐르는데 거부가 웬 말일까.
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은소현 씨 집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갈 거예요. 아침저녁으로 매일.”
정한은 어떤 거센 폭우도 전부 품어낼 것만 같은, 깊고도 너른 바다 같았다.
“나 그렇게 은소현 씨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길 건데.”
“…….”
“감당할 자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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