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최대한 가볍게, 그리고 최대한 느릿하게2017.08.21.
“……네? ……어머니요?”
아들은커녕 시집도 안 갔다는 아주머니, 아니, 언니였는데.
그런 분을 어머니라니.
정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소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은소현 씨가 우리 다시 만나기로 한 전날 오아후로 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오히려 그의 말에는 웃음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소현이 일부러 일정을 바꾸면서까지 자신을 보러 왔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이 기쁘다는 듯.
3년 전 그날 보았으면 좋았을 표정이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그런 반응.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 없어진 기대였지만.
“그런데 어머니라니요. 서정한 씨 어머니라구요? 내가 본 상황, 들은 말, 아무튼 모든 게 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소현 역시 처음에는 모자지간이라 짐작했었다. 상식적인 유추였다.
하지만 그걸 전부 불식시킬 정도로 모든 정황이 두 사람의 애인 관계를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이제 와 다시 어머니라는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궁금한 건 다 얘기할게요.”
언제나처럼 정한은 분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소현은 가슴속이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이걸 드라마나 소설로 보는 상황이었다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상황들까지 모두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텐데.
처음부터 오해를 하지도, 마음이 엇갈리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정한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삶이고, 그러니까 인생이겠죠.
드라마도, 소설도 아니기에.
우리는 모든 걸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꼬인 부분은 찾아서 천천히 풀면 되고, 걸음이 서툴러 넘어지면 다시 털고 일어나면 되니까.
시작은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어요. 마음만 있다면.
“은소현 씨, 나는.”
“…….”
“매순간 후회 없이 살고 싶었어요.”
주변의 소음이 희미해지고.
“그런데 딱 한 번, 그날 은소현 씨를 잡지 못했던 건 후회했어요.”
그를 제외한 주위 풍경이 물에 풀어지는 잉크처럼 서서히 흐려졌다.
소현의 눈앞에는 오직 정한만 선명히 보였고, 정한의 음성만 똑똑히 들렸다.
“미안해요. 내가 잡지 못했어요.”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행여 오해가 있었다고 해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돌아선 소현을 원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소현에게 그는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였다.
혹시 별것도 아닌 걸로 오해했던 걸까 따끔거렸던 소현의 가슴을 가만히 달래주듯, 정한은 담담히 자신의 과오를 되짚었다.
“어떤 사정 때문에 은소현 씨 태도가 그렇게 바뀌었는지, 그때 바로 붙잡고 물어보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순간 ‘무엇’을 오해했는지,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서정한과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건, 키헤이에서 시간을 보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그저 서로에게 다가서고 싶었던 그 마음.
“그러니까…… 우선, 서퍼 동료들이요. 그 사람들은 서정한 씨에게 애인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건지…….”
“자신이 아는 것만 믿는 사람들은 목소리가 커요. 그게 전부인 줄 알아서.”
“그럼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건가요?”
“거짓말은 아니죠. 그 친구들은 내 어머니와 내가 연인 사이라고 믿었으니까.”
“……아니라고 말해도요?”
이에 정한은 숨을 낮게 내뱉고 대답했다.
“어떻게 해도 믿고 싶은 사람은 믿고, 절대 믿기 싫은 사람은 끝까지 안 믿는 거죠.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소현은 그때의 그들을 떠올렸다.
정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시종일관 장난을 치듯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들은 ‘믿기 싫은 사람’들이었다.
오직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
진실보다 훨씬 구미가 당기는 무언가에 기꺼이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
그래서였을까, 소현도 정한을 직접 본 후에 판단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다짐이 무너진 건 그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께 혹시 아들이 있으시냐고 여쭤보기도 했거든요. 사실 루시를 보고 아주머니가 서정한 씨 어머니는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는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들이 있겠냐고 하셨고, 옆에 동생분도 그렇다고 하셨어요. 그건 그럼 왜…….”
“어머니께서 편찮으세요.”
간단한 한마디였다.
정한의 말에 소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땐 은소현 씨한테 설명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처음 본 사이에 다짜고짜 어머니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부터 할 수는 없었으니까.”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없이 상처입고, 다시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를 반복해온 듯, 나긋한 바람 같은 정한의 음성은 강인한 힘까지 품고 있었다.
풍파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살아온 듯 마냥 맑고 밝은 사람으로만 보였는데.
“모든 게 그 하나를 풀지 못해 전부 꼬여버렸던 거네요. 나도, 은소현 씨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걸로.”
잘못 끼운 단추의 시작점을 찾았다, 마침내.
하지만 차마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말은 꺼내지 못하여 그저 짐작만 한 채로 머뭇거리는데, 정한이 다시 말했다.
“어머니께서 공항에서 봤던 은소현 씨를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알아봤다니, 설마 편찮으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해봤겠네요.”
그랬다.
조금씩 핀트가 어긋나서 이상하다 느낄 때는 있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저마다 다르니 관여할 부분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저 아주머니의 사고방식이 조금 독특한 줄로만 알았다.
“‘초로기(初老期)치매’라고 해요.”
“아직 젊으신데…….”
짐작만 했던 부분을 확인하게 되니 안타까움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치매 중에서도 알츠하이머형, 또 그중 초로기치매예요. 젊은 치매라고도 하는.”
소현은 말라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무겁게 짓눌렸다.
그동안 자신의 오해가 너무도 어이없던 만큼, 딱 그만큼 무거웠다.
“치매가 발병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병인 것도 아니고, 환자마다 병증이나 상황도 제각기 다 달라요. 그만큼 드라마틱한 병도 없을 거예요, 아마.”
삶의 가장 아프고 슬픈 면을 모두 담고 있는, 각자의 드라마.
“우리 어머니가 보인 여러 병증 중 하나는, 인물오인.”
“그래서 아들인 서정한 씨를…….”
“아버지로 본 거죠. ……처음에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남편인 줄 알고 마음껏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그렇게 어머닌 그간 쌓였던 화를 다 푸셨어요.”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지만 얼마나 처절한 현실을 겪었을지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니까 그 기억마저 사라지고 어머닌 연애시절로 되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애인이라 한 거였네요.”
“……맞아요. 어머니가 젊고 행복했던 시절, 난 그때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아버지.”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정한의 음성은 너무도 평온했기에, 침묵은 서로의 마음을 조심히 두드렸다.
그는 자신이 모르던 시간 속에서 당황스러운 상황들에 놓였던 소현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이제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쳤어요? 내가 그쪽 같은 개쓰레기랑 계속 연락을 하게.」
정한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모른 채, 들뜬 가슴으로 약속장소에 나갔던 마지막 날을 기억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소현을 발견하고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을 때.
다음 날이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그녀를 한동안 볼 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때.
이전 데이트에서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연락처 묻는 것도 잊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정한은 소현에게 우선 전화번호부터 물었었다.
그때 소현이 전과 다르게 냉랭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던 것이다. 개쓰레기와 연락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비난에 정한은 당황했었다. 뭐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투로 쏘아붙였다면 바로 그게 무슨 소리냐며 대응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소현은 크게 상처 입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물이 그득히 차올라 쏟아지기 직전의 얼굴로, 그저 싸늘하게 내뱉을 뿐이었다.
열기 오른 눈빛과 차가운 말투의 격한 온도차.
그녀의 그런 얼굴을 마주하자니 머리가 새하얘지고 눈앞이 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오해로 시작됐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건 소현이 제게 가졌던 깊은 호감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과의 좋은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 거고, 결코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원치 않는 상처를 받고 말아 그토록 아픈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이, 정한에게는 그저 미안한 일이 되어버렸다.
「미안해요. 내가 잡지 못했어요. 어떤 사정 때문에 은소현 씨 태도가 그렇게 바뀌었는지, 그때 바로 붙잡고 물어보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어떻게든 붙잡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했다면 3년이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세상은 뜻한 대로만 쉬이 흘러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정한의 잡념을 차단시키듯 전화벨이 울렸었다.
소현의 뒤를 따라 나가려 했던 정한은, 그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모의 전화만큼은 반드시 받아야만 했기에.
좋지 않은 예감에 손끝이 떨렸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전화 너머 이모의 급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ㅡ 정한아……! 언니가 없어.
「없다니?」
ㅡ 언니 어제 네가 사준 꽃 놓고 그리고 있었는데, 나 씻고 나오니까 없어졌어. 집 안 다 찾아봤는데 없어서 지금 바깥으로 나왔는데, ……없어, 아무 데도 없어. 어떡하니. 셀폰(cellphone)도 안 가지고 나가고, 가방이랑 지갑도 전부 다 그대로 있어. 어디 잠깐 나가도 꼼꼼하게 다 챙겨가는 사람인데……! 몸만 없어지고,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이모, 울지 말고 진정해. 내가 바로 갈게.」
소현을 놓친, 아니 놓아버린 날 저녁,
그날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붉게 물드는 석양 속으로 혼자 사라져버린 날이었다.
한참이나 미친 듯이 헤맨 끝에, 바닷가에 홀로 앉아 있던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버거운 일들이 이어졌다.
비교적 평화롭던 일상에 몰아닥친 파도는 금세 그를 집어삼키고 말았었다.
그때까지 배회증상은 없었던 어머니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며 맑은 얼굴로 집을 나섰다.
찾아서 데려오면 또 나가고, 계속 지켜보더라도 잠깐 사이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언니, 여기가 집이잖아. 언니 집. 어딜 가야한다는 거야, 대체.」
「내가 있던 곳.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거야. 너도 같이 갈래?」
그동안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되도록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틀렸다고 지적할수록 움츠려들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니 가능한 모든 걸 수용해주라 주치의는 말했었고, 이모와 정한은 무조건 그에 따랐었다.
그래서 아무리 정한의 어머니가 아무리 아들을 남편이라 부르고, 애인이라 불러도,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던 이모였는데.
그랬던 이모조차 목소리를 자주 높이게 될 정도로 어머니의 병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주치의는 회귀본능, 귀소본능을 바탕으로 한 석양증후군(일몰증후군, sundown syndrome)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증상에서 흔히 보이는 과격성이나 극도의 불안증은 어머니에게 없었다.
그저 높게 떠 있던 해가 하늘을 붉고 푸르게 물들이며 내려앉는 모습이 어머니의 마음을 흔들고, 이로 인해 본래 존재하였을 어딘가를 향해 자꾸만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여, 어머니는 수없이 정처 모를 발걸음을 옮겼다.
「정한아, 너 오늘은 안 나가도 돼?」
「응, 내가 있을 테니까 이모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차 키 여기.」
정한은 그런 어머니의 곁에 있기 위해,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서핑과 스카이다이빙 인스트럭터 일도 조금씩 더 줄여가다가 결국에는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연애시절의 기억마저 이내 삭제되었는지 더 이상 아들에게서 사랑하는 옛 애인이자 야속했던 남편의 모습을 찾지 않게 되었다.
정한을 보고도 낯선 표정으로 댁은 누구시냐 묻는 일이 많아졌다.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듯 쓸쓸한 표정을 자주 지었고, 또 자주 고요히 잠을 잤다. 때로는 홀로 울었고 노을이 지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멍하니 있다가도 여동생인 이모를 보기만 하면 맛있는 음식을 챙겨주려 했다. 동생을 위해 요리를 하고, 돈만 보면 자꾸 이모에게 쥐여주었다.
그것만이 생의 유일한 목적처럼 보였다.
「언니가 딱 스무 살 때쯤 저랬었는데. 타국에 이민 와 힘들게 살다가 엄마까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나한테는 하나뿐인 언니가 엄마나 다름없었지. 근데 언니도 내가 딸 같았나 봐. 자기도 고아가 된 건 마찬가지면서 동생인 내가 불쌍하다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챙겨주더라. 지금 생각하면 언니도 스무 살, 참 어린 나이였는데……. 정한아, 너희 엄마가 그랬어. 나한테는 언니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천사였어, 천사.」
지금도 그렇고.
덧붙여 중얼거리며 이모는 눈물을 닦아냈다.
어머니의 시절은 세월을 거슬러 한동안 스무 살에 머물렀다.
어머니의 시간은 그렇게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소현의 기억 속에는 루시를 쓰다듬으며 화사하게 웃던 그분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직 생생하기만 했다.
이를 떠올리자 순간 날카로운 것이 와서 박힌 듯 가슴속에 몹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현재는 어머니의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고 싶은데 그저 조심스럽기만 했다. 물어봐도 되려나.
그러나 정한은 그저 고민 하나 없는 얼굴로 가볍고도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소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묻고 싶었던 말에 대답을 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온 거예요.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 하셔서. 그리고 올해 봄에 어머니가 병원으로 들어가셨어요.”
가끔씩 어머니는 기억이 돌아올 때도 있었다. 정한을 알아보기도 하고, 현재 상황을 스스로 짐작하기도 했다.
한국에 온 것도, 병원에 들어간 것도 모두 어머니 본인의 의지였다.
“알츠하이머 환자도 65세가 안 되는 분들은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더라구요. 연로하신 분 위주의 요양병원만 많아서. 다행히 지금 계신 곳이 마음에 드신지 아주 잘 지내고 계세요. 이모도 병원 근처에 살면서 자주 들여다봐주시고.”
짙은 초록이 스민 숲 속 계곡의 맑은 물처럼 더없이 청아한 그의 미소.
눈부신 미소가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몹시 슬퍼서 소현은 그만 먹먹해졌다.
괜찮을 리 없을 텐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만 있었다.
환자나 가족 모두 얼마나 힘들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직접 겪어보지 않아 막연하긴 해도, 그 무게를 가벼이 여길 순 없었다.
미소가 보인다고 그 미소가 전부는 아님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너머 존재하는 진실에 소현의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은소현 씨, 이제 다시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해요, 나.”
지금 이 이야기는 정한의 미안하단 말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소현이 받아들이기에 그저 과분하기만 했던 사과는 그걸로 끝이었던 모양이다.
“그럴 일 안 만들어요.”
“…….”
“은소현 씨한테, 미안한 사람으로만 남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을 거라는 말로 또 다른 시작을 알렸다.
살랑살랑 어디선가 훈풍이 부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늦여름의 커피전문점, 열띤 숨결을 식히며 돌고 있는 에어컨의 서늘한 냉기마저 다정히 감싸주는 포근한 바람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이상, 그럴 일 없어요.”
그에게 있어 여자는 그때도, 지금도, 은소현 하나였다.
“은소현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에 대해 아직 의심이 들면 의심하고, 믿음이 안 가면 안 믿어도 돼요. 나에 대해 지난 3년간 쭉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고, 우리 아직 서로 모르는 것도 많은데, ……지금 잠깐 얘기했다고 해서 갑자기 마음이 바뀔 거란 기대는 안 해요. 그건 내 욕심이니까. 어쩌면 부담스러워 더 밀어내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고.”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처한 상황과 감정의 사이에 품어낸 치열한 고민.
상대의 마음이 항상 내 마음과 꼭 같을 거란 생각은 어리석고, 기대는 크게 품을수록 상처 역시 커질 수 있기에.
최대한 가볍게. 그리고 최대한 느릿하게.
“그러니 은소현 씨 마음 가는 대로 해요.”
그 무엇도 거스르지 말아요.
당신을 해치면서까지 당신을 얻고 싶진 않아요.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나로 인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내겐 그뿐이에요.
“은소현 씨 하고픈 대로 다 해요.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가장 모호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고백이었다.
이토록 설레는 모순이 있을까.
아플 정도로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며 소현이 천천히 물었다.
“서정한 씨 원하는 건 뭔데요……?”
“내 감정 숨기지 않는 것. ……난 그런 거 못 하고. 아니, 안 해요.”
더없이 솔직하고 깔끔했다. 빙빙 돌리지도 않고 흔들림도 없었다.
“그동안은 기회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은소현 씨가 내 앞에 있으니 이제 됐어요. 짝사랑이라 해도 아예 볼 수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짝사랑.
그가 규정지은 본인의 감정과 상황은 ‘짝사랑’이었다.
……내가 이 남자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소현의 머릿속이 그만 아찔해졌다.
“그때와는 상황도 달라지고 은소현 씨 마음도 다르겠죠. 난 정신없이 살다가, 그래서 놓쳐버렸던 내 마음도 이제야 겨우 알았어요.”
고백을 한 자는 너무도 태연했고, 고백을 받은 자만 혼이 쏙 빠져나갔다.
“은소현 씨는 지금부터 시작해요.”
“…….”
“서두르지 말고.”
재촉 없이.
“절대 급하게 생각하지도 말구요.”
천천히 다독이면서.
“이렇게 돌고 돌아 어렵게 만난 사람, 난 이제 쉽게 안 놓을 테니, 은소현 씨는 그래도 괜찮은지 끝까지 잘 생각해보고.”
환히 부서지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
그가 부드럽고도 매혹적인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말했다.
“와요,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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