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업을까요, 안을까요.2017.08.11.
“예를 들면, 데이트 열 번에 장소 허락. 어때?”
앤드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한이 웃음 띤 얼굴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별로.”
“왜? 왜 별로야? 좋잖아. 데이트하면서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아보고, 지금은 왜 싫어하는지도 물어보고, 네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보여주면 되는데. 그게 왜 별로야?”
이렇게 좋은 방법을 왜 마다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열쇠는 이쪽에서 쥐고 있는데, 왜 안에서 두드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그냥 열고 들어가면 편할 텐데.
“앤디 같으면 완전 싫어하는 사람이 뭐 하나 줄 테니까 다짜고짜 데이트하자고 하면, 기분 좋겠어?”
장난기 어렸지만 어딘가 쓸쓸한 음성이었다.
“조건이나 앞세워서 사람 휘두르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진심뿐이라 믿었다.
정한은 잊을 수 없었다.
은소현에게 반했던 순간, 그녀의 마음 또한 저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던, 그 수줍은 눈망울.
잘못 놓고 간 팁을 핑계로 용기 내어 차에 뛰어올랐을 때, 이미 대답은 들은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홍조로 물들어 있던, 그 예쁜 두 볼.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그 귀여운 움직임 하나하나.
「아아, 왜 자꾸 웃어요?」
「귀엽잖아요.」
참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
어느새 시야에 온통 그녀의 모습만 가득 차오르던 때.
그래서 결국 붉게 여문 꽃잎을 어루만져 열듯 조심스레 입술을 맞추던 순간까지.
거부하기는커녕 자신의 허리를 가만히 안고서 열띠게 번져가는 키스를 기꺼이 받아들이던 그녀.
마음과 마음이 닿았었다.
분명히 기적.
살아가는 동안 또 겪을 수 있을지 모를, 감사한 기적이었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런 건.”
앤드류가 한숨을 쉬면서 바 테이블 위에 푹 엎어졌다.
“알지. 그래도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려고.”
너한테 그런 사람 처음이잖아.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정한이 웃으며 대꾸했다.
“안 놓쳐.”
저렇게 예쁜데 놓치긴 왜 놓쳐. 절대 안 놓쳐.
억지로 조건을 걸지 않겠다는 것일 뿐이다.
은소현을 그냥 보기만 하겠다는 건, 그리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마음이 분명해졌다.
은소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혼미해졌던 정신도 이제 제자리에 안착했다. 그사이 확고해진 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인연이 닿은 그녀의 손을 꼭 잡겠다는 다짐.
은소현이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시간이 필요했다.
진심을 다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지금 정한에게는 가장 우선이었다.
◇ ◆ ◇
“어머, 우리 아들 왔구나.”
따뜻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류재언이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하는 모친 나미정의 목소리. 이에 다른 이들의 관심까지 따라붙었다.
“나 교수님, 아드님 오시니까 얼굴이 더 환해지셨어요.”
“촬영 준비하시다 말고 왜 이렇게 급히 나가시나 했더니 역시 아들파워.”
“류 대표님, 안녕하세요?”
집에서 또 무슨 촬영을 하고 있었는지,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와 사람들이 가득이다.
재언과 안면이 있는 이들도 많았다. 저마다 반갑게들 알은체를 했고 재언 역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익숙하지만, 너무도 익숙하기에 더 거부감이 드는 풍경이다.
“재언이 바쁠 텐데 오랜만에 집엘 다 들렀구나. 어서 오거라.”
그 사이로 부친 류태훈도 웃으며 걸어 나왔다.
온화한 분위기가 흐르는 집 안. 그러나 대리석 바닥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하염없이 올라왔다.
쉴 새 없이 부딪히고 엉겨붙는 공기를 가르며 재언이 엷게 미소 지었다.
“네, 저 왔습니다. 촬영 중이신지 몰랐네요.”
스타의 집에 찾아와 진행하는 토크쇼 형식의 아침 프로그램을 미리 녹화하는 중이었다.
재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까 모친이 오랜만에 전화하여 집에 잠시 들렀다 가라고 했었고,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무슨 일이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녹화 중인 카메라 밖에 서 있을 뿐이지만, 엄연히 연극 무대의 조연으로 초대된 셈이었다.
‘유인 엔터’의 류재언 대표가 부모의 TV 프로그램 녹화 때 와서 함께 있었다고, 부모와 스태프까지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목격담이 널리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무대 위에서 선 재언의 부모, 류태훈과 나미정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잉꼬부부 역할을 맡은 연극배우였다. 그것도 매우 노련한 베테랑.
“호호, 안 싸울 것 같다고요? 아니에요, 저희도 당연히 다투면서 살죠. 이이는 특히 제가 아들만 챙기면 은근히 샘을 내더라고요. 전 다 큰 아들을 둘이나 키우는 기분으로 살고 있어요.”
“어머, 정말요? 류태훈 선생님이 샘을 다 내신다고요? 의외인데요. 교수님 진짜 사랑하시나 부다.”
“아까 보니까 음식 내올 때도 옆에서 엄청 도와주시더라고요. 두 분 보면 막 결혼하고 싶어진다니까요. 정말로 두 분처럼 살고 싶어요.”
“류태훈 선생님이 애처가로 명성이 자자하시더니, 이런 면까지 있으신지 몰랐어요. 귀엽다고 해도 되려나요?”
진행자와 패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끌어갔다.
“나 교수님은 본인 능력이 뛰어난 것도 모자라 세상 다정한 남편에다가 잘나가는 아들까지, 다 가지셨어요. 어우, 정말 너무 부럽습니다.”
“류 선생님이 더 좋으실 것 같은데요? 나미정 교수님의 내조가 장난 아니시더라고요. 매주 남편 기 살리는 아침식사 챙기는 법 코너도 정말 잘 보고 있어요. 이렇게 30년 넘게 한결같이 깨소금 볶는 비결이 뭔지 오늘 얘기 좀 자세히 들어봐야겠어요.”
온 국민이 이름만 대도 다 아는 두 사람을 부모로 둔 재언이 수도 없이 보아온 모습이었다. 이 울타리 안에서 재언의 역할은 분명했다.
듬직하고 자랑스러운 아들.
체면과 재산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는 쇼윈도 부부의 하나뿐인 아들 역할로, 재언은 제 몫을 충실히 이행했다.
환멸, 아픔, 외로움.
그런 것들은 이미 어린 시절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며 홀로 삭히고 모두 털어버렸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덜 괴로웠다.
가장 싫어하던 부모의 모습에 어느덧 자신이 완벽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재언은 뻥 뚫린 가슴을 안고 원치 않는 연극 무대에 올라 있었다.
「넌 왜 아버님 안 닮았지? 아버님은 엄청 자상하시잖아. 어머님 말씀이라면 홀딱 넘어가시던데. 눈에선 아직도 막 꿀이 흐르고. ……하여튼, 넌 돌연변이인가 봐.」
은소현조차 10년을 만나는 동안, 그리고 파혼을 결정할 때까지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렇게 사이가 좋아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두 분이,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서로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지는 않았다. 차라리 영영 몰랐으면 했다.
텅 빈 가슴도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울면 조금씩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재언은 어디서도 배워보지 못했다.
모든 건 그냥 다 꾹꾹 눌러 참아야 하는 걸로만 알았으니까.
「돈도 돈이지만, 평판 때문이 아니면 내가 당신이랑 왜 이러고 있겠어?」
「마찬가지야. 내가 미쳤다고 하릴없이 너처럼 사상이 천박한 여자랑 결혼생활을 할 이유가, 뭐가 있어.」
「천박? 말조심해. 애가 듣겠어.」
「자기 인생만 중요한 여자가 애 걱정도 하는군. 소름 끼치게. 그래놓고 교양 있는 여자인 척 연기도 아주 잘하고. 이참에 데뷔라도 하지 그래? 교수보다는 이쪽이 더 적성인 것 같은데.」
카메라와 사람들에 둘러싸여 다정히 웃고 있는 부모의 모습 위로, 서로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사정없이 할퀴어대던 장면들이 겹쳐졌다.
재언은 도우미에게 부탁해 받은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에 가시가 빼곡히 박힌 것처럼 물을 넘기는 순간마다 극렬한 통증이 목 안 가득 느껴졌다.
이럴 때마다 곁에 은소현이 있었는데.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쓸데없는 걸 모조리 들고 와 귀찮게 하면서 정신을 쏙 빼놓던 은소현이 있었는데.
천진하게 웃으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앞뒤 없이 다 쏟아내던 은소현이…… 있었는데.
그땐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재언의 눈앞에는 거짓으로 점철된 세상뿐.
그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진실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엄마아빠도 너희 부모님처럼 사이가 정말 좋으셨는데……. 에이 뭐, 괜찮아. 내가 결혼해 잘 살면 되는 거니까. 엄마아빠도 다 지켜보고 계실 거야, 그치?」
그저 소박한 행복을 바라며 반짝거리던, 빛줄기 하나.
그 빛 하나 없어졌다고, 재언의 세상은 컴컴한 어둠 속에 완전히 처박히고 말았다.
◇ ◆ ◇
- 잠깐. 끊기 전에 언니, 이소미 신부님 이따 저녁에 그 책방으로 가실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
탐미재 바 안쪽 작은 싱크대.
소현은 서정한이 손님에게 내어주었던 커피 컵을 가져와 설거지하는 중이었다.
사무실에 있는 애주와의 업무 관련 통화가 길어지자 소현은 아예 어깨에 휴대전화를 끼고서 통화와 설거지를 동시에 해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어폰을 놓고 오는 바람에 불편하게 됐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여긴 어떻게?”
- 아까 사무실에 왔었어요. 저녁에 해수 씨 만나러 서촌 쪽으로 간다고 하길래 언니 그 동네에 있다고 했거든요. 시간 되면 들르겠다고 하던데요?
이소미 신부는 소현이 거래하는 웨딩케이크 샵 여사장의 친구로, 가을에 있을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이틀 전 디렉팅 계약을 한 바 있었다.
케이크 샵의 여사장이 어린 나이에 비해 차분하고 부드러운 편이라 친구 또한 비슷할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정반대였다. 이소미 신부는 엄청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은 스타일이었다.
새로 찾은 스몰 웨딩 콘셉트를 보내오며 이것저것 계속 물어볼 정도로 열의 또한 대단했다.
「대표님! 외국 사이트 서칭하다가 모은 사진들이에요, 전 이런 분위기가 좋거든요.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한번 확인해주세요.」
「우와! 여기 보세요, 너무 이쁘다! 이렇게 수중 결혼식도 있……지만 뭐, 현실적으로는 좀 어렵겠죠? 헤에, 전 수영도 못하니까요.」
「숲 속 작은 결혼식, 이런 콘셉트는 어떨까요? 진짜 숲으로 들어가서 할 수는 없으니까 대관이 가능한 식물원이나 정원이 잘 꾸며진 펜션 중에 알아봐서요.」
신부의 이미지처럼 귀여운 결혼식을 준비할 생각을 하니 소현 또한 기대가 되었다.
대형 웨딩업체에 근무할 때에는 한 달에 몇십 커플의 예식을 진행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실제 예식보다는 영업과 홍보 쪽으로 열을 올릴 때가 훨씬 많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막상 계약이 성사되면 이렇게 각각의 신랑신부에게 딱 맞춘 식을 함께 준비해가는 과정 자체가 무척 설레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래? 이따 신부님 오시면 잠깐 요 앞에 카페로 나가서 얘기해야겠다. 아 참, 블로그에 컵케이크랑 마카롱 세팅 사진 추가한 거 봤어. 새로 디자인 뽑아준 거 너무 예쁘더라.”
- 안 그래도 아까 신부님 한 분이 보고 전화 주셔서 상담 예약 잡았어요. 사무실에서 제가 상담할게요. 참, 새로 생긴 드레스 대여 업체요, 오후에 가서 계약한 다음에 저번에 언니가 얘기한 콘셉트북 제작 들어갈게요.
“역시 우리 차애주 실장님! 알아서 척척이네.”
- 제가 좀 ‘귯걸~’이죠!
애주와는 손발이 착착 맞아 하나씩 일을 해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열띤 영업 덕분에 문의도 조금씩 많아지는 참이었다.
- 언니도 너무 무리하지 말구요. 혹시 힘들면 얘기해요, 나도 가서 같이 있을게요.
“괜찮아, 그런 거 없어. 걱정 말고.”
- 그럼 언니 일 생기면 꼭 전화하구요.
“응, 그래, 끊어.”
통화를 종료하기 위해 물 묻은 손을 닦으려던 때였다. 급하게 움직인 탓이었을까. 소현의 어깨와 귀 사이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져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앗.”
순간 놀란 소현이 몸을 들썩 움직였다.
얼른 떨어지는 휴대전화를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발목마저 삐끗하고 휘청거리던 그때.
“끄아아……!”
순식간이었다.
헙.
소현은 숨을 들이 삼키고 딱 굳어버렸다.
제게 빠르게 다가와 허리를 잡아 받쳐주는 단단한 팔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서정한의 싱그러운 향기까지.
소현은 어느새 그의 품에 포옥 안기듯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정한은 한 팔로는 허리를, 다른 쪽 손으로는 어깨를 잡아 넘어질 뻔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소현은 민망함에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아, 고마워요.”
감사의 인사를 했지만 서정한은 놓아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면 어쩌냐며 창피한 마음이 든 것도 잠시, 소현 역시 서정한의 팔에 갇힌 채로 홀린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몇 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다.
딱 한 번, 이만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3년 전 마우이 섬의 키헤이 해변에서 키스하던 날.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 여전히 싱그럽고 부드러운 인상과 다르게 가까이에서 보는 콧날과 턱선은 베일 듯 날렵하기만 했다. 눈빛도 한없이 깊어져 있었고.
‘그때보다 살이 좀 빠진 건가. 3년 동안 좀 더 남자다워진 것 같고. 성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하나도 안 늙고……, 어후, 피부 뽀송한 것 좀 보소. 나이는 나만 먹었네, 나 혼자 다 먹었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혹시 서정한이 자신의 눈가 주름이 몇 갈래인지 세고 있는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났다.
하와이에서 만났을 때는 같은 이십 대였지만, 이젠 나이 앞자리가 달라졌다. 그는 스물여덟, 자신은 서른하나. 이젠 삼십 대가 아닌가, ……서글프게도.
“그만 이거 놔요.”
금세 정신을 차린 소현은 얼른 서정한의 팔을 밀치고 빠져나오려 했다.
자신을 지탱해주던 서정한을 뿌리치고 한 발 뒤로 물러서던 소현은 곧바로 발목에 시큰한 통증을 느끼며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앗!”
발목을 삐끗했던 건 느낌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이리 와요.”
서정한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현을 부축해 몇 걸음 떨어진 의자로 갔다. 걸을 때마다 발목이 욱신거려 소현은 눈썹을 찡그렸다.
“많이 안 좋아요? 병원 갈까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병원 소리에 소현은 손사래를 쳤다. 병원이라면 질색이다.
소현은 위중한 병이 아니고서야 병원에 잘 가지 않으려 했다.
서정한은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 지퍼백에 넣어 간이 얼음팩을 만들어 가져왔다. 그리고 주저 없이 소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쪽 다리 맞죠? 왼쪽.”
소현은 당황해 물러앉았다.
“이리 줘요. 내가 할게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얼음팩을 가져가려는 소현의 손길을 가볍게 치워내며, 서정한은 그녀의 접질린 발목을 한 손으로 받쳐 살짝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얼음팩을 소현의 부어가는 발목에 가만히 올렸다.
‘으아아…….’
이런 상황에서는 뿌리치기도 쉽지 않다.
발목은 차가운 얼음팩 아래에서도 뜨겁게 욱신거렸고, 왜인지 모를 심장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아, 너무 부은 것 같은데요.”
어디 걸려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멀쩡히 서 있다가 혼자서 발목이 접질린 상황은 소현으로서도 창피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한은 너무도 진지하게, 무척이나 정성껏 자신의 발목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깐 있어요.”
응급처치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서정한은 한쪽 구석에서 느른하게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던 앤드류에게로 갔다.
소현은 아직 서정한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발목에서 시선을 떼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앤디, 우리 좀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나도 가.”
책에 흠뻑 빠져 있었던지 이쪽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기도 가겠다니?
개쓰레빠에 껌딱지까지 주렁주렁 달고서 어딜 간단 말인가. 소현은 이 조합으로는 절대로 병원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나 병원 안 가도 돼요. 진짜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요.”
“소현 씨 다쳐서 그래. 금방 병원에 다녀올게. 앤디, 책방 잠깐 봐줘.”
그녀의 의중을 파악했는지 서정한이 앤드류의 동행을 단호하게 막고 책방을 부탁했다.
다쳤다는 말에 앤드류도 온순해진 얼굴로 물러섰고, 소현은 발목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그때 서정한이 소현에게 다시 다가와 물었다.
“업을까요, 안을까요?”
객관식 문제, 선택지는 딱 두 개뿐이었다.
정중한 말투지만 묘하게 협박조로 들리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병원에 데려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소현은 다른 답을 골랐다.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피할 수 없으니 일어나긴 해야겠지만, 함부로 그에게 몸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이봐, 나도 엄연히 두 발이 있는 사람…….
“아앗.”
……이지만, 바로 그 발을 다쳤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소현은 일어서서 한 걸음 내딛으려다 다시 거센 통증을 느끼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서정한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가와 뒤로 돌더니 등을 내밀었다.
“업혀요.”
탄탄하고 너른 등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정말 업혀도 될까.
“큰길로 나가면 바로 정형외과 있어요. 부축해줘도 그 발로 걸어가면 시간만 오래 걸리고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어요. 그냥 업혀요.”
소현이 머뭇거리며 서정한의 어깨에 조심히 손을 올렸다.
“으어엇.”
괴성이 터져 나왔다. 업고 일어서는 속도에 놀라서.
마치 신호등이 바뀌어 출발하는 자동차처럼, 서정한은 소현의 손을 훅 잡아 제 목을 감싸게 하면서 가볍게 일어섰다.
소현이 어깨를 잡을 때까지 답답해서 어떻게 기다렸나 싶을 정도로 그는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서정한의 정신은 오로지 소현을 병원에 데려가는 데에만 쏠려 있는 듯했다.
◇ ◆ ◇
아빠도 그랬었다.
고3 여름방학 직전, 소현이 기말시험 전날 밤을 새우겠다고 커피를 진하게 타서 방으로 가져간 날이었다.
책상에 커피를 올려놓고 책을 펼치다가 잔을 건드려 커피가 허벅지로 쏟아졌던 때.
다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르자마자 거실에 있던 부모님이 단숨에 달려오셨다.
「소현아! 왜 그러니!」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얼굴로 허둥지둥 얼음과 찬물을 가져와 응급처치를 해주시던 부모님.
그리고 아빠는 다리가 데인 딸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우리 딸 많이 아프니.
우리 딸 다리에 흉 지면 안 되는데.
우리 딸 반바지도 입고 치마도 입어야 하는데.
우리 딸, 우리 딸……. 아플 텐데, 아프면 안 되는데.
차라리 대신 아픈 게 낫겠다는 듯 안타까워하던 아빠의 눈빛.
어쩔 줄 몰라 당황하여 흔들리던 아빠의 어깨.
자란 후로는 처음 업혀 본 아빠의 등이었다.
……든든했다.
열아홉 살 다 큰 딸을 업고도 힘든 줄 모르고 병원으로 내달리던 아빠의 등에서, 까만 밤 집 앞 골목을 빠져나가며 소현은 울먹울먹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빠의 등에 온 세상이 있었다.
자신을 무조건 품어주던, 커다란 세상이 바로 거기 있었다.
「의사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 흉은 안 남겠대, 다행이지!」
「흠, 그게 다 이 아빠가 우리 딸 업고 바로 병원으로 순간이동을 한 덕분이다.」
「당연하지, 다 슈퍼히어로 아빠 덕분!」
「얘, 여기 엄마도 있다. 내가 번개처럼 얼음을 빨리 가져오고 약도 잘 발라줘서 심해지지 않은 거야.」
「아이고, 그럼요, 신사임당, 나이팅게일, 다 오셔도 우리 엄마 일당백엔 못 당하지. 전부 엄마아빠 덕분이야!」
「원래 부모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는 거지.」
「참되거라, 바르거라, 으음? 그건 스승의 은혜 아닌가. 어쨌든 엄마아빠 은혜 잊지 않을게요, 내가 효도 엄청 많이 할 테니까 걱정을 마셔.」
「다 농담이다. 그냥 이렇게 착하고 건강하게 잘 커준 게 효도지, 다른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쁜 우리 딸.」
세 식구가 둘러앉아 웃음을 나누던 날의 기억들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러나 그 세상은 오래가지 않아 무너졌다.
그해 겨울 수능시험을 보던 날.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소현을 데리러 오던 부모님은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이는 불행한 사고를 당했다.
해방감에 기뻐하며 시험장을 나선 것도 잠시, 소현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그 자리에서 나란히 숨을 거두었다던 두 분.
다정하고 따뜻하던 부모님의 눈빛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고, 안아주던 손길도 그날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소현은 그렇게 온 세상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은소현 씨.”
소현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정형외과 대기실 소파.
진료를 받고 반깁스를 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서정한이 대신 수납을 하고 왔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소리에 소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
허리를 숙인 정한이 손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의 눈 밑을 엄지로 쓸어 조심히 닦아주었다.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걸, 소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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