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감도는 바람에 묻은 그녀의 흔적2017.08.04.
“왜! 이유가 뭔데!”
절규에 가까웠다. 반말로 대뜸 따지는 은소현의 눈꼬리가 바짝 치켜 올라갔다. 아무리 위협을 한다 해도 전혀 무섭지 않은 아기고양이 같았다.
정한은 저도 모르게 새어나올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지금은 귀엽다고, 예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 자신의 상황이야 어떠하든, 정한의 감정은 전혀 상관없이 흘렀다.
은소현이 자신을 왜 싫어하게 되었는지 이유도 모르고, 미처 손을 내밀 기회도 없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말았지만, 지금 거세게 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건 머리의 권한이 아니었다.
심장이 말했다.
그저 정한의 눈에 은소현은, 파르르 떠는 모습조차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여자라고.
둥근 눈을 깜빡거리며 진지하게 항의하는 얼굴이 참 사랑스럽기도 하다고.
잊고 있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든다.
그때 자신을 설레게 했던 그 마음처럼.
참 예쁜 이 여자, 한 번만 더, 아니 될 수 있으면 계속…… 오래오래 보고 지내면 좋겠다는 그 바람.
“슬리퍼 님?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말 좀 해줘 봐요.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싫다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여기서의 결혼식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이야기도 좀 들어주고, 그 다음에 천천히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요?”
따질 때가 아니라 설득할 때라 생각을 바꾸었는지 은소현의 음성이 조금 누그러졌다.
정한 역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장소 대관만은 역시, 안 되겠다.
그는 이 문제가 그녀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임을 스스로 확인하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복잡해지는 건 싫으니까요.”
침범당하고 싶지 않다.
어느 배우의 이미지를 계산하여 짜고 치는 판에 끌려 들어가 한 영역을 차지하고 싶진 않았다.
“복잡해지고 그럴 일 없어요. 오히려 책방 홍보도 되고 좋을 거예요. 결혼식 전까지는 완전히 비밀이지만 식만 진행되면 그 여파가 상당할 거라구요. 하태랑이 식 올린다는 것만 알면 다들 협찬을 못 해서 난리를 칠 텐데, 그냥 가만히 있어도 굴러들어온 복을 왜 걷어차려고 해요. 다시 잘 생각해보…….”
“그런 이유라면 다시 잘 생각해봐도 더더욱.”
“……?”
“싫습니다.”
‘복’은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 굴러들어온 기회는 정한에게 전혀 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가치관과 완전히 반대 선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한낱 쓸모없는 영광.
“일단 서정한 씨 뜻은 알겠어요. 설득은 이제부터 하면 되는 거니까. 뭐, 사람 마음이야 바뀔 수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설득이라…….”
정한은 팔짱을 끼고 은소현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뜻을 분명히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마주한 그녀의 눈빛이 강하게 반짝거렸다. 여기에 목숨이라도 건 듯했다.
무엇이 그리 절실한 걸까. 간절히 원하는 게 대체 뭘까.
정한의 마음 한구석에 설렘을 넘어선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3년 전 스카이다이빙.
하와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 벌벌 떨던 여린 몸을 곧게 세우고 환한 얼굴로 돌아보던 그녀.
하늘 한가운데서 아픈 기억을 모두 쏟아내고 새로 태어난 듯 말갛게 웃던 그녀.
은소현의 주위로 부서지던 빛줄기에 그만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던…… 그래서 가슴까지 터질 것 같았던 순간.
여자의 미소에 생전 처음으로 심장이 내려앉던 그때.
기억의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순간들이 다시금 떠올라 정한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것이 처음으로 기쁘게 느껴졌다.
뜻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한국행으로 고단하기만 했던 마음에 이제야 한 줄기 위안의 빛이 쏟아진 듯.
이렇게 이어진 인연에, 그리고 어쩌면 운명일지 모를 순간에 감사하며,
정한은 푸른 하늘 아래 눈부셨던 첫 만남처럼 맑은 미소로 말했다.
“은소현 씨는 설득을 어떻게 하는지, 한번 기대해볼게요.”
당신의 세상은 어떤지, 난 여전히 궁금하니까.
은소현은 숨을 폭 내쉬고는 표정을 애써 밝게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완전한 거절이 아니라는 것을 위안 삼는 듯.
“네, 기대하세요. 설득은 내가 또 전문이거든요.”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매달리겠다는 각오의 눈빛이었다.
“어, 시간이 벌써…….”
은소현은 급한 일이 많은 듯 용건을 마치자마자 휴대전화로 바쁘게 시간을 확인했다.
“제가 일단 지금은 가야 하니까 책방 열려 있는 시간에 곧 다시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은소현은 얼른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다시 문을 향해 걸어가며 어디론가 서둘러 전화를 거는 모습.
“응, 나 지금 출발해. 늦지 않게 갈게. 어, ……어, 사무실에서. ……그래, 어. 좀 이따…….”
탐미재, 이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빠른 걸음.
바쁘게 사라지는 은소현.
감도는 바람에 묻은 그녀의 흔적.
정한은 은소현이 열고 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치와 설렘의 충돌.
탐미재의 공기가 조금씩 열뜨는 날이 시작되었다.
◇ ◆ ◇
임 실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류재언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그를 싸늘히 응시하였다.
“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대표님.”
“그런 소리나 듣자고 기다린 건 아니고.”
임 실장은 하태랑의 로드로 시작하여 그녀의 배우생활 내내 함께했던 매니저였다.
처음 이 회사에 하태랑을 데려올 때부터 거북이등짝 같은 임 실장이 그녀의 뒤에 꼭 들러붙어 있었다.
하태랑이 신인 시절 만나 동생처럼 아끼고 의지해온 매니저이기에 이제껏 참아주었는데, 그의 무능력은 종종 인내심을 시험하게 한다.
이럴 때 보면 생긴 것과 딴판으로 하태랑도 꽤 인정에 휘둘리는 스타일이다. 한심하긴.
“하태랑은?”
“누나가 이번에는 완강하게 버티네요. 대표님 말씀도 안 듣는데 제 말을 들을 리도 없고……. 꼭 그 책방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하태랑이 그러는 이유가 뭐냐니까.”
임 실장의 중언부언을 끊어내며 류재언이 핵심을 다시 찔렀다.
이유를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이 아닌가.
“저도 잘 모르겠…….”
“매일 붙어 다니면서도 잘 모르겠다.”
“네.”
“나가.”
류재언의 일갈에 임 실장이 얼어붙었다. 소리를 높이거나 표정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나지막한 음성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이 대단했다.
배우 기획사 ‘유인(YouIn) 엔터테인먼트’.
신인배우 두 명뿐인 이 작은 회사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으나, 설립 이듬해 배우들이 차례로 대박을 터트리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대표 류재언은 결코 우연한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된 스타배우 배출로 가볍게 증명해 보였다.
그는 베테랑 매니저들을 연이어 영입하여 실무를 맡기고, 본인은 회사 경영과 배우 이미지 메이킹에 몰두하였다.
투자자들도 반대하던 무명배우 하태랑을 데려와 지금의 국민여신으로 만든 건 바로 류재언의 노력이었다.
직접 매니저나 배우로 일한 경험을 살려 기획사를 설립한 대표들의 경우와 차별화하여, 류재언은 철저히 전략적 경영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어디서든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기사 봤나? 류재언이 또 한 건 했네.」
「그 작은 엔터테인먼트로 시작해서 단기간에 상장까지 시키고. 상장 차익이 어마어마하던데.」
「대단하긴 진짜 대단해. 일단 저 회사 들어갔다 하면 안 뜬 연기자가 없잖아.」
「집안 덕에 투자는 수월하게 받았다 쳐도, 어린 나이에 회사 만들어 저렇게까지 탄탄하게 끌고 가기가 어디 쉬운가.」
온 국민이 사랑하는 대배우 류태훈과 활발한 방송활동을 통해 인지도가 높은 식품영양학 교수 나미정 부부의 외아들.
성공한 사업가 집안인 친가와 대대로 교육자 집안인 외가라는 배경.
이는 류재언이 가진 일부에 불과했다.
투자 유치부터 경영까지 성공적 행보에는 그의 능력이 9할을 차지했다.
「잠을 서너 시간 이상 자는 걸 못 봤다던데? 비서들도 아주 학을 떼더라고. 그놈의 완벽주의가 사람 잡는다고.」
「머리 좋고 감도 좋은데, 저러고 노력까지 하니 그걸 누가 당하겠나. 류 대표랑 내 아들놈이 동창이었는데, 학교 다닐 때도 공부며 학생회 일이며 아주 무섭게 파고들어서 아주 끝장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더군.」
「류태훈이가 아들까지 아주 잘 키웠어. 부럽구먼.」
평생 실패와는 거리가 먼 삶.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위처럼 단단하고 굳세어 보였다. 류재언이 무너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런 대표를 모시기란 실상 쉽지 않다. 임 실장은 기가 잔뜩 눌린 채 류재언의 집무실에서 터덜터덜 빠져나오며 홀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태랑이 누나도 생각이 다 있을 텐데……. 결혼식 하나 정도는 본인 하고 싶은 데서 하게 해주지. 하아, 태랑이 누나도 그래. 류 대표님 성격 알면서 안 된다면 그냥 안 되는 줄 알지 새삼스럽게, 둘 다 고집들은 하여튼. 후우, 가운데서 나만 박 깨지네.”
매번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번이 최대 고비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렵게만 느껴졌다.
지금 하태랑의 결혼이 아무리 사랑 없이 하는 비즈니스 웨딩이라 해도.
결혼, 이는 분명 인륜지대사이기에.
◇ ◆ ◇
“하와이에서 그때 그 자식이요? 탐미재 주인? 진짜아아아아?”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애주는 격하게 기함을 했다.
결혼식 장소로 섭외하기 위해 이제부터 탐미재에 줄기차게 드나들어야 하는 이상, 소현은 애주에게도 더 이상 감출 수 없기에 털어놓은 것이다.
“미친,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대요? 아니, 하와이에서 서핑이랑 스카이다이빙하던 사람이 왜 서울에서 책방을 하고 있어? 무뜬금도 유분수지, 언니가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차라리.
소현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눈을 내리감았다.
“앞으로 그럼 자주 보게 될 텐데, 어휴. 그 나쁜 놈을 어떻게 계속 봐요. 혹시 또 막 언니 꼬시려고 들이대면, 그 이쁘장한 얼굴로. 여우늑대! 개쓰레기! 아오오, 생각만 해도 열받네.”
애주가 걱정스러운 듯 소현에게 말을 이어 건넸다.
“언니, 괜찮아요……? 이 일 너무 힘들면 우리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요?”
그 말에 소현이 눈을 뜨고 애주를 쳐다보았다.
“사실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 이거 정말 안 하고 싶어서 그만두려고도 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앞으로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거잖아. 하와이 그놈 하나 때문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지.”
“에이, 나한테 뭐가 미안해요.”
“너 데려와서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그러게요. 나 데려올 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힌다고 해놓고. 다 뻥이었나 봐.”
애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가와 소현의 옆에 앉았다. 팔짱을 끼며 소현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고는 상냥하게 덧붙였다.
“나는요, 여기서 언니랑 같이 일해서 좋아요. 마음 편한 게 제일이지. 언니랑 있으면 스트레스도 안 받고 얼마나 좋은데요.”
코끝이 찌르르,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조금만 고생하면 사정도 나아질 거잖아요. 창업하고 대박 터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이렇게 우리 좋아하는 일 해나갈 수 있는 것만도 어디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다 괜찮아요, 난.”
“너희 어머니, 회사 그만두고 선보라고 하신다면서…….”
“헐? 언니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나 얘기한 적 없는데?”
화들짝 놀란 애주를 보니, 확실해졌다.
마진혜 팀장이 한 이야기들.
「앞길 창창한 차 실장까지 데려가서 괜히 집에서 구박이나 받게 하고. 가만 보면 차 실장도 참 순진해. 친한 사람 믿고 이직을 다 하고.」
「어머, 몰랐어? 차 실장 하여튼 착해가지고 얘기 못 했나 보네. 차 실장 엄마가 그렇게 선보라고, 박봉에 고생만 하는 회사 그만두고 차라리 시집갈 준비나 하라고 난리시더라고.」
교묘히 부풀려 과장시킨 소문이라는 것을.
“혹시 지은이한테 들으셨어요? 걔밖에 모를 텐데. 얼마 전에 지은이 만났을 때 하필 엄마한테 전화가 오는 바람에. 어휴, 엄마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밖으로 다 새어나와서. 근데 그 얘기가 또 언니한테까지 들어간 거예요? 아, 내가 못 살아.”
그렇지. 애주가 마 팀장에게 직접 조잘조잘 떠들었을 리가 없지.
아마 이지은 플래너도 마 팀장과 대화 중에 악의 없이 흘린 얘기였을 것이다. 그 위에 검은 악의가 덧입혀져 되돌아온 것뿐.
겪어봐서 아는 사정이었다. 돌아가는 태가 너무도 빤히 보이는.
말이 많고 사실이 아닌 말은 더욱 많은,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세상에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원치 않는다, 그 안에서 휘둘리는 일 따위는.
“애주야. 혹시 힘든 일 있으면 꼭 얘기해야 해. 네가 얘기해주는 게 나한테는 전부야.”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스스로 판단하면 될 일.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에이, 신경 쓸 거 없어요. 선 안 볼 거고, 어차피 난 결혼도 안 할 건데. 엄마 혼자서 그러는 거니까요, 뭐. 조만간 독립을 하든지 해야지.”
그때 사무실 입구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남들 결혼식 도와주는 사람들이 하나는 파혼에, 하나는 비혼.”
돌아보니 류재언이다.
“그렇게 결혼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하는 웨딩사업이 순조롭게 돌아갈 리가 있나.”
또 속 긁으러 올라왔구나.
친히 꼭대기 층까지 행차하신 갑님을 소현은 불퉁하게 맞이했다.
“웬일이야.”
예전에 하던 대로 본인 대신 비서나 보내지, 그 잘난 얼굴 좀 안 보게.
요즘 들어 류재언을 3년 전 결혼 준비를 할 때보다도 더 자주 보는 것 같다.
부쩍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난 덕분에 소현은 하루에도 몇 번씩 혈압이 은근하게 치솟았다.
“커피나 차 드릴까요?”
둘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를 달래며 애주는 류재언에게 차를 권했다.
“됐습니다.”
가볍게 손을 들어 거절하고 그는 소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애주는 살짝 눈치를 보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하태랑 결혼식 진행 안 한다고 했던 거, 확인받으러 왔어. 계약 파기 절차를 정식으로…….”
“아니! 아닌데! 할 건데! 내가 할 건데! 결혼식 진행을 안 하긴 왜 안 해. 무슨 소리야. 설마 그걸 진짜로 믿었던 거야?”
류재언이 하태랑의 결혼식 진행을 맡긴 건 아마 그로서도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극비로 진행하는 결혼인 만큼, 소문이 퍼지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결혼 전에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골치 아픈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류재언의 기획사 건물 안에 스몰 웨딩 사무실이 있는 건 서로에게 이득인 셈이었다.
소현은 돈을 억만금 주고도 어려울 홍보효과로 앞으로의 일은 걱정이 없게 되었고.
하태랑은 기획사 건물 울타리 안에서 기자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자연스럽게 디렉터 미팅을 가지며 원활히 결혼 준비를 할 수 있다.
아마 소현이 아닌 다른 외부업체를 통한다면 극비로 진행하는 결혼 준비는 아마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류재언이다.
“내뱉은 말은 지켜. 손 떼.”
그런데도 저래?
소현은 돌아설 수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 일은 절대 놓지 않을 만큼 이제 오기도 단단히 생겼다.
“아유, 류 대표니임, 누가 보면 진짠 줄 알겠네에.”
류재언에게 맞서는 방법.
“책방 섭외하는 게 막막해서 투정 딱! 한 번! 소심하게 부린 거 가지고 뭘 또 이렇게 빡빡하게 구실까아. 어휴, 우리 류 대표님, 아주 성품이 개쪽, 아니, 대쪽 같아서 장난을 장난으로 못 받아들이는 건 여전하셔어. 이런 게 또 류개쪽, 아니, 류대쪽 매력이지, 뭐. 하하.”
별거 없다.
“……재언아, 류재언. 나 잘할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류재언한테 굽히고 들어가는 게.
“정말 잘할게. 한번 믿어줘.”
이 정도야 껌이지.
“하태랑 마음에 쏙 들게 기획서 만든 거 봤지? 나 준비 진행도 진짜 잘할 수 있어. 책방 섭외도 곧 끝낼 거야. 장소 문제 전혀 없어. 넌 걱정 안 해도 돼, 하태랑이 원하는 결혼식, 내가 꼭 제대로 만들어줄게.”
아무리 한 명뿐인 직원이지만, 나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사람까지 있는데.
“너는 이제 네 볼일 열심히 보고 이쪽은 절대 신경 쓰지 마. 하태랑 결혼식은 다 나한테 맡기고. 번거롭게 안 할게.”
무너질 순 없지.
“그럼 나, 이 일 계속 하는 거다?”
류재언은 대답 없이 그저 차가운 눈길로 소현을 응시했다. 그를 계속 마주 보고 있기 어려워진 소현은 얼른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아하하, 그럼 그런 걸로 알고, 나는 그만 나가봐야겠다. 다른 미팅이 또 있어서. 류 대표님, 그럼 다음에 봅시다아. 애주야, 난 해수 씨 케이크 샵으로 갔다가 바로 퇴근할게. 친구분이 내년 봄에 결혼한다고 상담해보고 싶다 하셨대. 샵에서 만나기로 했어. 간 김에 새로 디자인 나온 것도 보고 블로그에 사진 정리해 올려야지. 나 그럼 먼저 나간다.”
“아, 네, 네. 가요, 언니.”
류재언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소현은 속사포처럼 빠르게 일정을 읊고는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류재언이 한숨을 길게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늘 꼿꼿하기만 하던 그로서는 참으로 드물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편 애주는 소현이 사무실에서 나간 후, 자리에 앉아 있는 류재언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전부터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예감으론 확실했지만 통 감을 잡을 수 없어 떠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책방 주인이 하와이 개쓰레기였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번에 왠지 큰 건을 물었다는 촉이 강하게 밀려왔다.
“저기요, 류 대표님.”
확인해야 했다.
애주의 부름에 성가시다는 듯 엷게 찡그린 류재언이 고개를 들었다.
“책방에서 언니가 하태랑 결혼식 준비하는 거, 마음에 안 드시죠?”
애주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의 눈빛이나 손끝 등을 예민하게 살폈다. 류재언은 흔들림이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는 평정을 유지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탁, 일어섰다.
“어차피 장소는 바꿀 테니 책방 얘기는 더 할 필요도 없…….”
“혹시 거기 주인 때문에 그러세요?”
형사, 검사 뺨을 번갈아 치고 온 솜씨로 애주가 류재언을 부지런히 압박해갔다.
“책방 가셨었잖아요. 책방 주인 만나보셨을 거 아니에요. 혹시 그 주인 때문에 싫으신 건 아니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합시다. 내가 책방 주인을 싫어할 이유가 뭐 있겠…….”
“언니랑 책방 주인 사이에 기운이 이상한 거 느끼신 거죠? 옆에 계셨으면 보셨을 텐데, 두 사람 사이 좀 이상한 거요. 안 이상했을 리가 없는데? 언니가 거기 계속 드나들면 책방 주인 계속 만나게 되니까 싫으신 거잖아요. 틀려요?”
제법 구석으로 잘 몰았다.
류재언의 검게 가라앉은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애주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류 대표님. 언니 아직 좋아하시는 거, ……맞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