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Sweet! Honey! Baby!2017.07.31.
나른한 공기가 한옥 정원 가득히 내려앉았다.
아침 햇살이 참 맑다.
탐미재 안채의 부엌에 선 정한은 냄비 물을 끓이다 말고 유리창을 통해 중정中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원 가운데 푸르른 나무 아래로 무심히 드리운 그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부드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정한이 생활하는 안채에서는 책방으로 쓰는 곳을 통유리 너머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책방 오픈시간이 되면 블라인드를 완전히 내려두기에 손님들은 생활공간인 안채 내부를 볼 수 없지만.
이렇게 책방을 열기 전 탐미재의 그윽하고 고요한 아침을 만끽하는 때가, 정한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후아아아아암. 한, 먹을 거는?”
하품을 쩍쩍 해대면서 부엌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앤드류는 그 즐거움을 처절하게 깨뜨려버리는 존재였고.
탐미재에 비정기적으로 들이닥치는 불청객.
어젯밤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왔으면서 앤드류는 시차적응에 늘 강한 모습을 보였다.
푹 자고 일어난 상쾌한 얼굴로 기지개를 하며 음식을 찾는 모습이 본인의 집인 듯 편안해 보였다.
위는 다 벗고 반바지 딱 하나만 주워 걸친 채로.
아마 앤드류를 흠모하는 여자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눈에서 하트를 바쁘게 뿜어내겠지만, 정한은 결코 아니다.
“지금 만들고 있잖아.”
정한은 끓어오른 냄비의 불을 낮추어 온도를 내린 후 한숨을 푹 쉬며 식초를 넣었다.
“어후우, 저 인간, 뭐가 예쁘다고 내가 아침부터…….”
투덜거리면서도 숟가락으로 냄비 속을 휘이익 돌려 젓고, 빠르게 돌아가는 물회오리 속으로 미리 깨어둔 달걀을 부드럽게 흘려 넣었다.
달걀의 흰 부분이 여린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춘다. 투명한 물살에 가벼이 휩쓸리며 달걀은 탱글탱글 형태를 잡아갔다.
“Poached egg! 어, 이게 뭐랬지? 술란?”
“수란.”
“아, 그래, 수란!”
정한이 만든 아침식사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앤드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었다. 이 집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이젠 손바닥처럼 훤했다.
찰캉, 하고 튀어 오른 노릇노릇한 빵을 접시에 놓아 건네자 정한은 구워둔 햄과 바질페스토, 수란을 얹었다. 커피와 함께 간단한 아침식사가 완성되었다.
“내가 한이 괴롭히려고 서울 오는 거 아니야. 한이 해준 음식 먹고 싶어서 오는 거지.”
“차라리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라고 해. 그럼 믿어줄게.”
“그건 당연하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매일매일 생각했어!”
“말을 말자.”
작업하라고 닦달하기 위해 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래도 앤드류가 서울에 와 있으면 정한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아무리 책방에 드나드는 손님들과 다양한 소통을 하고는 있어도, 혼자인 듯 적적해질 때가 많았으니까.
낯선 서울.
이렇게 마주 앉아 소박한 한 끼 밥상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
앤드류와는 아홉 살의 나이 차이와 직업을 초월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속마음까지 나누는 사이였기에 정한은 아무 때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그가 사실 밉지 않았다.
“맛있겠다.”
수란을 포크로 가르자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흰자 사이로 촉촉한 노른자가 스르륵 쏟아져 내렸다. 언제 봐도 환상이라는 듯 앤드류가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 여자 진짜 이상하다.”
어젯밤 들은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 앤드류는 ‘그 여자’를 다시 언급했다. 정한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앤드류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정한에게 욕할 정도로 싫다고 하는 여자라니?
“이렇게 스윗해. 요리 잘해, 잘생겨, 키 커, 바디 좋아, 성격 좋아, 돈까지 많은…… 건 그 여자가 모르겠지만. 어쨌든 완벽하기만 한데. 뭐가 문제야. 왜 한이 싫다는 거야?”
“……내 말이. 대체 나 문제가 뭐야? 앤디가 보기에는 왜 그런 것 같아?”
“그건 모르겠고 포치드 에그 완벽한 거 좀 봐. 끝내준다. 한, 그 여자한테 이거나 만들어줘. 진짜 맛있다.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거 먹으면 아마 바로 풀릴 거야.”
딱히 영양가는 없는 조언이었다. 물어본 사람이 바보지.
“흐으음, 맛있어. 내가 여자였으면, 바로 한에게 결혼하자고 했을 거야.”
“하아, 의미 없다…….”
정한은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내내 화집 때문에 이곳을 드나들던 은소현의 모습이 환영처럼 그려졌다.
그 여자.
저 나무를 쳐다보며 서 있었지.
저 테이블에서 화집을 숙제하듯 연구했었지.
저 책장에서 책을 뽑아보며 눈을 반짝거리기도 했었지.
저 문을 열고 들어왔었지. 저기 앉아 있었지. 저기……, 저쪽…….
온통 은소현이다.
탐미재 안에 은소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물어봤어?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했었지.”
왜 나를 개쓰레기라 부른 거냐고.
3년 전 하루아침에 차가워져서는, 이상한 말이나 퍼붓고 왜 그렇게 가버린 거냐고.
그러나 은소현은 자신을 보자마자 하하하하, 웃으며 얼버무리고 모른 척 딱 잡아떼질 않았던가. 그리고 내내 화집, 화집, 화집, 노래만 불렀다.
생글생글 예쁘게도 웃으면서.
너무도 야속해 이렇게 속병이 날 만큼.
그러고는 개쓰레빠니, 뭐니, 둘러대기만 했었다. 그 기억은 아예 꺼내기도 싫은 듯이.
“한이 이렇게 여자한테 관심 보이는 건 진짜 신기한 일인데……. 여자 얘기 몇 년 만이다 했더니, 그 여자가 그 여자였어.”
“그래, 심지어 같은 여자.”
하와이에서 정한을 설레게 했던 그 여자가 지금 서울에 와서 만난 이상한 여자라니.
다른 이들이 탐내다 못해 안달까지 내는 남자가 속 모를 여자 하나에만 전전긍긍하는 모습, 자유연애주의자인 앤드류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이래서 한을 좋아하지.
참지 못한 앤드류는 벌떡 일어나 한에게로 가서 양볼을 잡고 또 쭈욱 늘렸다.
“이러니 안 예뻐? 내가 하니 안 예뻐하고 배기냐고? 이렇게 귀여운데? 아침부터? 어?”
“아아아아, 쪼오옴! 하지 말라고오! 제발!”
이제 나이가 스물여덟인데. 예쁘고 귀엽다는 소리 들을 나이는 한참 지나지 않았나.
정한은 짜증을 바락 내며 앤드류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왜! 이리 와봐! 그 여자 대신 나라도 예뻐해줄 테니까!”
“앤디 기다리는 여자들한테나 가.”
“그런 거 없어. 바빠서 데이트도 못 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이제부터 하니하니 볼이나 뜯어먹고 살아야지 뭐. 이리 오라니까?”
“아아, 진짜!”
세상 천지에 다 큰 성인 남성인 자신을 이렇게 아기 취급하는 사람은 앤드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며 정한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 인권!”
“잉껀, 난 그런 거 몰라.”
볼을 꼬집으려고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앤드류를 피해 정한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내 기필코, 빠른 시일 내로 저 인간과의 인연을 끊고야 말리라!
지키지도 못할 약속, 부질없는 다짐을 하며 정한은 앤드류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채 문을 열고 훅 뛰쳐나갔다.
“스윗! 하니! 베이비! 튕기지 말고 그냥 이리 오라니까?”
칠색 팔색을 하며 피하는 정한을 향해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는 듯 앤드류가 장난의 수위를 한껏 높이며 쫓아 나왔고.
“내가 엄청 귀여워해줄…… 엇!”
그러던 앤드류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문 앞에 멈추어 서 있던 정한의 등에 쿵 부딪히고 말았다.
넘어질 뻔한 앤드류는 겨우 정한을 껴안듯 뒤에서 붙잡고서야 중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망가던 정한이 왜 안채 앞에서 멈추어 서 있었는지 곧 알게 되었다.
“하하하하……,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웬 여자가 탐미재 안 정원으로 들어와 서 있었고, 이를 본 정한이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선 것이었다.
“제가 너무 일찍 왔죠……? 아하하하. 일요일은 낮부터 여는 걸 모르고 왔다가……, 문을 밀어보니까 열리길래……, 이미 와 계신 것 같아서, 오픈 준비하고 있나 하고……, 뭐 얘기드릴 게 잠깐 있어서, 하하하……? 저 이, 이따 다시 올까요?”
정한은 아침에 신선한 달걀을 산다고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탐미재 바깥문 단속을 깜빡한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이런 타이밍에 은소현이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둔 건 아니었는데.
“손님인가.”
왜 또 앤드류는 갑자기 멀쩡한 척 목소리를 깔며 미소를 짓는 건지.
호들갑 떨며 나오던 경박스러운 모습을 이제 와 세탁해봤자 늦었다. 상의 탈의하고 반바지만 입은 차림으로, 뒤에서 정한을 붙잡고 그러는 게 더 이상하니까.
정한은 안채 내부로 앤드류를 힘껏 밀어넣고 문을 쾅, 닫았다. 썩 들어가, 제발, 나오지 마! 그리고 혹시나 앤드류가 다시 튀어나올 수 없도록 문을 누르듯 밀었다.
다시 은소현을 향해 돌아섰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또 보고 말았다.
찰나.
그녀의 눈에 스치는 환멸의 빛을.
하지만 은소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색을 바꾸어 다시 함빡 웃으면서, 배꼽 손을 하고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슬리퍼 님, 희망찬 아침, 굿모닝입니다!”
◇ ◆ ◇
소현이 최선을 다해 인사하고 고개를 드니 서정한은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리퍼 님이요?”
그녀가 열심히 고심해서 선정한 호칭이었다.
존칭, 그것도 극존칭.
「개쓰레빠는 좀 그렇지 않아요? 슬리퍼도 아니고.」
개쓰레빠가 마음에 안 든다고 ‘슬리퍼’로 불리기 원했던 건 바로 너님 아니었냐고, 소현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도 싶었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은 얌전히 봉인해두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어떤 마음을 먹고 여기까지 다시 온 건데.
이 정도야 괜찮다. 참을 수 있다. 저 남자가 개쓰레기든 개쓰레빠든 무슨 상관이야, 난 내 볼일이나 보면 되지.
여기서도 완벽한 ‘을’인 내 본분을 절대로 잊지 말자……!
“계속 서정한 씨, 서정한 씨, 하는 건 그렇고. 나보다 어리다고 ‘야, 너’라고 막 부를 수……도 없겠고. 그럼 귀여운 애칭인 ‘개쓰레빠’ 딱 하나 남는데 그거보다는 슬리퍼가 낫다고 했던 것 같아서, 이제부터 그렇게 높여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내 기준 극존칭이다, 이 나쁜 자식아.
내가 배운 여자라 세 살이나 어린 너한테 이 정도 예의를 갖추는 거거든.
소현은 본인의 품격에 스스로 감탄했다. 인간 같지 않은 개쓰레기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건 다 제 인품이 훌륭해서라고 생각하면서.
원하는 게 있어서 찾아온 만큼 최대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도록 소현은 그렇게 나름대로 언행에 신경 쓰는 중이었다.
“아무튼 한창 바쁘신데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가 많습니다만, 간곡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으니까 잠깐만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그래, 서정한, 참 바빠 보였다.
소현은 탐미재에 오자마자 그런 꼴을 보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서정한의 뒤에서 백허그하고 있던 금발의 외국인 남자는 대체 또 뭔지.
훤한 아침부터 남사스럽게 다 벗고, 되게 야한 차림으로 단둘이 되게 야하게 술래잡기를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스윗 하니라니, 베이비라니, 튕기지 말고 이리 오라니, 엄청 귀여워해주겠다니……?
서정한, 저 쓰레기.
남자, 여자, 나이, 국적, 아무것도 안 가리는 진성 개쓰레기!
아주 세계 각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남녀노소 다 등쳐먹고 사는구만.
“무슨 일인데요. 무슨 부탁?”
“아, 네, 아무래도 결혼식이요, 이 책방에서 꼭 해야겠어요. 그래서 장소 좀 부탁드리려고요.”
“……그 얘기 하러 온 거예요?”
그럼, 뭘 더 바라는데. 웃기는 놈이네.
소현은 서정한의 눈빛, 살짝 실망감이 떠오른 그 맑고도 투명한 눈빛을 모른 척하며 다시 용건을 말했다.
“네, 여기서 결혼식이라니 좀 의아하겠지만, 제가 기획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거 은소현 씨가 진행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들으셨어요?”
“네, 나중에 얘기하는 건 봤어요. 밖에서.”
류재언에게 나름의 패악을 정성껏 부릴 때, 그때 보았나 보다.
「나 너희랑 일 못 하겠어. 너희 쪽 결혼식 진행, 더는 못 해. 내 능력 밖이야. 그만하자.」
패악치고는 소심했지만.
류재언의 ‘그럼, 그러든가.’ 소리까지 알차게 챙겨먹고 돌아설 때까지만 해도 후련했다.
하지만 후련은 딱 그때까지만. 이 일과의 인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길로 드레스 샵이 있는 청담동으로 향했던 소현은 예전 회사 상사였던 마진혜 팀장을 만났던 것이다.
「은 실장? 어머, 여긴 웬일이야?」
상당히 고가의 드레스 디자이너 샵이었다.
하태랑은 그 드레스 샵 원장이 특별 제작하는 웨딩드레스를 입기로 했고, 결혼식 후 드레스는 자선경매를 통해 미혼모 지원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입 드레스를 입지 않고 국내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기로 했기에, 하태랑의 품격에 어울리면서도 스몰 웨딩에 적합한 스타일을 찾아 소현이 상당히 공을 들여 선택한 샵이기도 했다.
그날은 원래 자료 점검 차 미팅이 있었지만, 자신은 하태랑의 결혼식 진행을 그만두기로 했으니 이제 다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원장에게 그 사실을 전해야 하는데…….
「여기, 우리 은 실장이 오기에는 너무 고가 아닌가? 진행하는 일이 별로 없다면서? 저번에 차 실장 봤었는데 다 죽어가더라.」
우리 은 실장 좋아하신다. 이제 너네 은 실장 아니거든.
은 대표다. 나도 내 회사 대표라고.
물론 직원은 하나뿐인 영세업체지만, 사장은 사장이지, 뭐.
「애주가 왜 죽어가요?」
「차 실장 월급도 겨우 주고, 월세도 밀릴 지경이라며? 내가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 어떡해? 그러게 회사 운영이 쉬운 게 아니지. 아무리 실무 경험 있어도 운영이랑은 또 별개잖아. 처음 나가서 업체 차릴 때는 금방 자리 잡을 것처럼 자신만만하더니, 앞길 창창한 차 실장까지 데려가서 괜히 집에서 구박이나 받게 하고. 가만 보면 차 실장도 참 순진해. 친한 사람 말만 믿고 이직을 다 하고.」
「집에서 무슨 구박이요?」
「어머, 몰랐어? 차 실장 하여튼 착해가지고 얘기도 못 했나 보네. 차 실장 엄마가 그렇게 선보라고, 박봉에 고생만 시키는 회사 그만두고 차라리 시집갈 준비나 하라고 난리시더라고. 차 실장도 답답하겠더라.」
애주가 자신에게도 안 한 얘기를, 마진혜 팀장에게 소상히 털어놓았을 리가 없다. 아마도 애주와 친한 다른 플래너 말을 전해 듣고 저렇게 부풀려 하는 소리겠지.
장사 하루 이틀 하나, 마 팀장 스타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이 정도에 멘탈이 흔들릴 내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소현은 ‘아, 그래요?’ 하고 대꾸할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꿔서 얘기하면, 팍팍한 회사 사정이 벌써 업계에 파다하다는 소리기도 했다. 소현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남의 회사 사정이 어떻든 말든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은 실장, 스몰 웨딩 전문으로 한다며. 드레스 대여 사이트도 요즘 저렴하고 예쁜 곳 많던데, 견적 맞춰서 쫙쫙 좀 뽑아봐. 그런 걸로 여기저기 영업을 해서 회사 알릴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괜히 고가 샵까지 들어와 기웃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 나 같으면 그렇게 못 하겠다. 내가 다 은 실장 아끼고 좋아해서 이렇게 팁도 주고 그러는 거다? 은 실장 회사 나갈 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웠는데.」
대여 사이트에 예쁜 드레스 많은 거 누가 모르나. 앞으로 셀프웨딩 업체들과 콜라보해서 진행할 계획도 다양하게 하고 있구만.
선의를 가장한 교묘한 깎아내리기에 열불이 치솟으려고 하던 때, 외출했던 원장이 막 돌아와 소현을 반겼다.
「아유, 소현 씨, 오래 기다렸죠? 내가 좀 늦었어요. 여긴 누구더라, 쥬엘웨딩 팀장님이던가?」
「아, 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쥬엘웨딩 마진혜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원장은 워낙 바쁜 탓에 일반 웨딩업체 플래너들과의 미팅을 직접 진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진혜 팀장은 평소에 쉽게 볼 수 없었던 거물과의 조우에 살짝 들뜬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원장이 소현을 유독 친근하게 대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쥬엘웨딩 신부님들이 우리 드레스 좋아해주신다고 해서 언제 한번 인사해야지 했는데 이렇게 뵙네요. 다음에 자리 한번 만들게요. 곧 쇼도 기획하고 있으니까, 그때도 와주시구요.」
「어머, 그럼요. 꼭 와야죠. 오늘은 제가…….」
「아, 소현 씨. 방으로 와요, 자료 좀 보게. 나 먼저 들어갈게요.」
말허리를 자른 원장은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온화한 눈인사를 건네며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뜻을 비쳤다.
그리고 오늘도 일정이 바쁜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마 팀장은 소현과 원장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알아챘다.
「원장님 미팅해, 은 실장?」
하태랑의 결혼식 진행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라고 원장님에게 말해야 하는데……. 그러려고 왔는데…….
「무슨 소리야? 원장님이 왜 플래너 미팅을 직접 하는 거냐고……?」
그거야, 신부가 하태랑이니까.
……그쯤 되니 소현도 굳게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태랑 결혼식 맡으면 될 거 아냐, 하면. 그래, 까짓것 하면 되지.
차애주가 다 죽어가긴 왜 죽어가, 월세를 밀리긴 왜 밀려, 일이 없긴 왜 없어!
여기 거물과 거물이 만나 거물의 드레스를 입고 거물답게 극비로 결혼식 올리는 그 거한 일이 바로 내 일인데!
소현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마 팀장을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제가 지금 진행하는 신부님이, 원장님 특별제작 드레스를 입으실 예정이니까요.」
원장님 미팅이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라는 얼굴로 당당히 마 팀장에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건네고 휙 돌아섰다.
당황하여 얼굴이 벌게진 마 팀장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사이다 없이도 속이 시원히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러게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긴 왜 건드려.
마 팀장과의 조우를 계기로 소현은 하루아침에 입장을 번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은 일이지, 괜히 사감까지 섞을 필요는 없었는데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지금은 먹고사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직원의 생계 또한 걸려 있으니, 소현은 죽어도 하태랑의 결혼식을 진행하고야 말 디렉터로서, 그 엄중한 운명에 책임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이렇게 아침부터 개쓰레빠의 책방에 쳐들어오고야 만 것이다.
하태랑은 반드시 여기, 예술책방 탐미재에서 결혼식을 하게 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으니까.
“진짜 우리 책방에서 진행하려는 거예요? ……배우인가 하는 여자 결혼식을?”
서정한의 물음에 소현은 네, 하고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이 멋진 책방에서의 결혼식을, 제가 꼭 한번! 디렉팅해보고 싶습니다!”
비록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개쓰레기라 더 이상 엮이긴 싫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존경스러운, 책방 주인 슬리퍼 너님께서, 기꺼이 허락만 해주신다면!
소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서정한의 입술을 주시했다.
예스, 어서 예스라고 해.
현기증 난다, 빨리.
너한테도 좋은 일이고, 홍보도 되고 좋잖아.
이건 기회의 찬스, 아니 절호의 기회라고!
그때 서정한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난…….”
소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래, 넌, 하고 혀를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참 애타게 하는구나. 잔뜩 안달이 나서 그의 입술을 보고 있는데 비로소 대답이 툭 떨어졌다.
“싫은데요.”
……하, 젠장.
“왜! 이유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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