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왜 하필 귀하디귀한 라르고 화집을2017.07.21.
“……네가 왜 있어, 여기?”
탐미재라는 고즈넉한 공간에 가장 안 어울리는 인간.
류재언은 잠시 고개를 들어 소현을 보았다가 무심히 시선을 책으로 떨어뜨렸다.
“화집을 구했다길래. 네가 볼 줄이나 아나 싶어서.”
툭 내뱉는 말에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저 인간에게 가장 바란 적 없는 게 정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에서 우러나온 경험이다.
소현은 그를 살짝 흘겨보고는 구석의 낡은 나무 테이블에 풀썩 가방을 내려놓았다.
“제대로 구한 거 맞으니까 걱정 말고 가던 길이나 가.”
대체 얼마나 자세히 알려줬으면 필운동 골목 위치까지 류재언이 정확히 알고 온 건지.
애주의 친절력이 나날이 상승하는 모양이다.
류재언이 투자금 명목으로 돈까지 빌려주며 위기에 빠져 있던 자신을 도와준 이유를 이럴 때마다 뼈저리게 느낀다.
소현은 자신의 멘탈을 나노 단위로 ‘갈아 잡수시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그만큼 탐미재 안에 들어와 있는 류재언은 온몸으로 강렬한 포스를 뿜어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은소현. 네가 정말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무사히 내 돈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넌 파산하고 거리로 나앉게 될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반드시.’
한때 마음으로 의지했던 친구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이었으나, 결국 다른 길을 걷게 된 타인.
소현에게 류재언은 그런 존재였다.
이렇게까지 애증의 감정으로 진득하게 들러붙을 줄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었다.
그대로 아름답게 헤어졌어야 했는데.
돈만 아니었어도.
그때 눈 뜨고 사기당한 돈만 아니었어도!
류재언이 떡하니 그 돈만 빌려주지 않았어도!
우리가 도움을 주고받을 만한, 그런 훈훈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던 순간, 주변에 류재언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이 또 한 번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탐미재 안에 있는 류재언은 소현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역시 한몫 톡톡히 하는 존재의 목소리까지 연이어 들려왔다.
“오셨어요.”
개쓰레기 주제에 여전히 착한 척하는 저 여우 같은 놈.
목소리는 또 얼마나 정중하고 상냥한지.
저 성대에 꿀 바른 신이 누군지 당장 찾아내서 개쓰레기에게 너무 과분한 걸 주셨다고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네. 왔어요. 저 라르고 화집 보러 왔는데요. 제가 오늘부터 사흘 동안 출퇴근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맞아요. 지금 그 자리 쓰시면 됩니다. 이따 다른 손님들 왔다 갔다 하셔도 그쪽은 외져서 상대적으로 조용할 거예요.”
“네. 그럼 이 자리 신세 좀 질게요. 자료 만들려면 시간 오래 걸릴 텐데. 애초에 책 사겠다는 사람한테 안 판다고 한 건 주인분 그쪽이니까, 자리 오래 차지한다고 너무 눈치 주진 않으셨으면 해요. 아, 이따가 가는 길에 다른 책들 좀 사가긴 할 거예요.”
카페도 아닌 책방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 테이블들, 그러라고 놓아둔 거니까.”
그러고 보니 책방 안 곳곳을 비롯해 바깥쪽 정원에도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팔지 않는 한정판 책들은 그렇게라도 마음껏 보고 가라는 주인의 의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책만 빼곡하게 들어찬 협소한 공간이 아니었다. 책방은 겉에서 볼 때보다 안으로 들어오니 제법 규모가 있었고 그래서 더 한적하니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책방 영업이 잘될까, 조심스러운 걱정이 앞섰는데.
독립책방에서 책만 보고 가고 실제 구매로는 많이 이어지지 않아 운영 자체가 쉬운 건 아니라고도 하던데 괜찮을까.
하물며 비싼 한정판 책들을 공짜로 실컷 보라고 테이블까지 잔뜩 두다니.
소현은 의아했다.
이 사람, 왜 서울에 와서 이런 책방을 운영하고 있을까.
마음에서 우러난 호기심에 강하게 휩싸였을 때였다.
앳된 여자 두 명이 탐미재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개쓰레, 아니, 책방 주인 서정한이 손님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이곳의 절제된 분위기에 걸맞게 조용하고 차분히 들어선 그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된 표정을 쉬이 감추지 못했다.
우선 서정한의 얼굴을 보며 반색하는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한옥과 책들, 고풍스러운 가구들의 묘한 조화에 새로움을 느끼는 듯 연신 여기 너무 좋다, 작게 속삭이며 책방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알겠네.”
소현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왠지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서정한이 여기에 이런 묘한 책방을 열어 고상한 척 예술지식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이유.
단 하나.
여자들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오는 수많은 여자들을 보려고.
마음에 드는 여자 골라 호의를 베풀며 가까워지기 위해서……?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하겠지만, 하와이에서 본 그의 개쓰레기 전적이 있기에 이런 유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사람이 다르게 보이려고 했으나, 혹시가 역시임을 깨달으며 소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책장에서 꺼낸 라르고 화집을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오니 여긴 여기대로 엉망진창이다.
소현의 앞자리에는 고혈압 유발제 류재언이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었으니까.
“어디 봐. 화집.”
숙제 검사라도 하듯.
혹은 진품명품 감정이라도 하듯.
슈퍼울트라하이퍼 갑님께서는 화집 검열을 당당하게 요구하시었다.
비록 슈퍼갑 류재언에게 돈도 빌렸고 일까지 받았지만 소현은 이런 부당한 갑질에는 더럽고 치사해서 순순히 응해줄 마음이…… 있었다. 상당히 있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보십시오. 암요, 네, 보셔야지요. 확인하셔야죠. 천천히 잘 살펴보세요.”
류재언은 제이 라르고 준전문가, 이른바 전문용어로 ‘빠돌이’라고 했으니까.
빠돌이께서 확인을 하셔야 한다면 하셔야 하는 거다.
어쨌든 지금은 클라이언트가 왕이니까.
왕의 말이 옳아. 무조건 옳은 거다.
소현은 화집을 넘겨보는 류재언의 맞은편에 앉아 공손한 자세로 손을 모으고 기다렸다.
“어서 진품이라고 말씀해주시옵소서. 그래야 저도 보고 신속히 기획서 작성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기다려.”
“네, 암요. 기다려야죠.”
소현은 곱게 대답하면서도 몰래 눈을 흘겼다.
이쯤 되면 류재언은 일부러 제 발목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일 좀 하자, 제발.
부디 류재언이 꼬투리를 잡지 않기를 바라면서 소현은 망부석이 되어갔다.
그러나 화집의 진품 여부를 살피는 것인지 그림 감상을 하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류재언은 때로는 깊은 눈으로 하염없이 그림을 들여다보았고, 때로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어쩌면 슬퍼 보이는 시선을 내려놓기도 하였다.
‘뭐야…….’
낯설었다.
오랜 시간을 알아온 사이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림을 대하는 그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하여, 소현은 잠시 놀라기도 했다.
류재언이 이렇게까지 그림을 좋아했었나.
아니,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눈빛에 들어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많은 감정이,
그리고 많은…… 아픔도.
순간 소현의 가슴 깊숙한 곳에 따끔, 하는 통증이 지나갔다.
지난 시간에 아파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그러지 말기를.
……부디 이러지 않기를.
순간 낮게 깔리는 음성이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바람을 한껏 몰고 다가왔다.
“커피 드릴까요.”
“네!”
단번에 대답해버렸다.
아니면 눈물이 나버릴 것 같아서.
1분만 더 있었으면.
아니, 30초만.
아니, 1초만 늦었더라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을지 모르겠다.
커피 드릴까요, 하는 서정한의 말에 소현은 커다랗게 대답하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조용하던 탐미재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체감으로 서까래가 내려앉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볼을 타고 흘러내렸을 뻔한 눈물은 자신의 큰 소리에 놀라 쑥 들어가버렸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죄, 죄송해요.”
아까 들어왔던 손님들에게 폐가 되었을까 해서 소현은 얼른 사과를 하며 두리번거렸다.
“이미 가셨어요.”
다가와서 커피를 권했던 서정한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소현은 휴우, 숨을 내쉬며 둘러댔다.
“제가 커피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만 반가워서.”
“그냥 따뜻한 커피, 아니면 아이스로?”
“아이스요.”
공짜로 책 보여주면서 커피까지 퍼주는 놈이네.
자고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데.
역시 개쓰레기 어디 안 가는 것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여튼 수상쩍은 놈.
소현의 의심병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쪽도 커피, 괜찮으시죠?”
서정한이 류재언에게도 물었다. 화집에서 눈을 뗀 류재언이 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서 남는 건 있으신가. 이렇게 생각 없이 막 퍼줘도.”
소현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말하는 싸가지 좀 보소. 그래, 류재언은 이런 놈이지.
가슴에 통증은 개뿔. 눈빛에 아픔은 개뿔!
방금 자신이 했던,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데 수상쩍다는 그런 생각들도 무정한 놈이랑 오랜 세월 어울리다가 옮은 것이 아닌가.
아무리 사상이 옮았다 한들 자신은 생각만 하지 저렇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과연 류재언은 금수저라 저런 건가.
남이 곤란해하거나 말거나, 민망해하거나 말거나 우선 내뱉고 보는 류재언의 싸가지에 소현은 파혼을 선언했던 과거의 자신을 격렬히 칭찬해주고 싶었다.
저놈은 부모님도 인증하신 바 있다. 아주 날 때부터 싸가지가 없었다고.
그러나 모태싸가지에 맞서는 개쓰레빠도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내 가게에서 내가, 퍼주고 싶으면 퍼주는 거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뭘 그렇게 따지시나.”
그렇게 서정한은 유유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류재언은 난생처음 보는 인종 대하듯 그의 등에 매서운 시선을 꽂았다.
소현의 입장에서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두 상종하기 싫은 건 매한가지다. 이래저래 아침부터 피곤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류재언은 들고 있던 화집으로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소현은 적당히 하고 갈 줄 알았던 류재언이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자 다소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너 안 가?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건데?”
쉿.
류재언은 화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본인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방해를 엄히 금하는 우아한 움직임에 소현은 말문이 다 막혔다.
시간이 금이라면서.
기획서 빨리 완성하라고 압박할 때는 언제고.
기껏 화집 구해놓으니까 중간에 낚아채서는 실컷 그림구경이나 하면서 시간을 빼앗고 있는 저치의 만행을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소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럼 편하게 보세요, 류 대표니임.”
……무사히 가라앉혔다.
별 힘이 있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두는 수밖에.
소현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던 류재언이 더 이상 자신의 약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걸 평생 어떻게 보고 살아. 그것도 한집에서.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이 정도 관계라면 더럽고 치사해도 참을 수 있지.
마음이 다칠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화보를 보고 있는 류재언을 자리에 두고 소현은 일어섰다.
고요한 책방 안을 둘러보다보니 어느새 안쪽에 자리한 바(bar)까지 오게 되었다.
낡은 원목 바 테이블은 세월의 깊이가 한껏 느껴졌다. 그리고 향긋한 커피 내음이 그곳에서 가득 퍼져나오고 있었다.
“……지금 뭐 하세요?”
서정한은 블렌더로 원두를 갈고 있었다.
서걱서걱, 커피콩이 가루로 부서지면서 풍겨나는 향기가 무척 짙고 고소했다.
“원두 갈죠.”
몰라서 묻는 말인가.
핸드 드립 카페도 아니거니와 서정한은 전문 바리스타도 아닌데.
공짜로 내어줄 커피를 준비하면서 저토록 정성껏 커피콩부터 갈고 있는 행동이 소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충 줘도 되는데.”
소현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서정한은 곱게 갈린 커피 가루를 드리퍼 위 필터로 옮겼다.
낮게 깔린 공기 위에 커피 향이 가득 내려앉았다.
매우 느긋한,
바쁠 것 하나 없는 사람의 여유로운 움직임.
소복하게 담은 커피가루 위로 뜨거운 물줄기가 살살 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어, 음, ……아이고, 어느 세월에…….”
지나치게 느릿한 서정한을 보면서 소현이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주 가는 커피 전문점이었다면 벌써 열 잔, 아니 스무 잔은 나왔을 시간이다.
그러나 대놓고 소현의 복장을 터지게 할 심산인 모양이다.
커피 방울은 드리퍼 아래로 눈물만큼 조금씩 떨어졌다.
‘아아아……, 속 터지겠네에에…….’
한 놈은 일도 못 하게 화집 스틸을 해가질 않나.
또 한 놈은 커피를 준다면서 도끼 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 신선 코스프레를 하고 있질 않나.
소현은 어서 빨리 이 요상한 책방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소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정한의 움직임은 여전히 느릿느릿.
“커피, 오늘 안으로 마실 수는 있어요?”
소현의 재촉에 서정한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다정하기까지 했다.
‘어후, 재수 없어.’
차라리 저 얼굴을 보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소현은 다시 몸을 돌렸다.
바에 기댄 채 정면을 바라보자 한옥 정원의 한가운데 위치한 나무, 그 무성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조용히 움직이는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푸르네.’
춤추듯 유려하게 흔들리는 초록의 물결.
순간 아득해졌다.
언제 이렇게 바람의 흔적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분초 단위로 일을 빠르게 처리하던 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소현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하와이에서, 잠시나마 느꼈던 그 기분.
상처를 어루만지듯 가만가만 위로해주던 바람들.
잊고 있던 평온한 기억들이 쑥 하고 밀려들었다.
그리운 날의 향기.
“……커피요.”
기억만큼 여전히 온유한 음성.
소현은 나뭇잎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기억만큼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서정한은 원두부터 갈아 천천히 내리고 얼음을 가득 채워 완성한 아이스 커피를 그녀의 앞에 내어주었다.
“잘 마실게요.”
차가운 유리잔에 송송 물기가 어렸다.
무심히 빨대로 한 모금 들이마시던 소현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어으흑! 맛있어!”
저도 모르게 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성과 맛을 제대로 등가 교환한 매우 훌륭한 커피였다.
제멋대로 터져 나온 이상한 감탄사 때문인지 서정한이 엷게 웃었다.
재수 없던 미소마저 순간적으로 지나치게 멋있어 보였으니, 이건 확실히 위험한 커피였다.
개쓰레기가 어떤 놈인지 아는 이상, 이따위 커피와 웃음에 혹할 수는 없다.
소현은 부러 냉정히 돌아서서 원래의 테이블로 갔다.
물론 커피잔은 생명줄처럼 소중히 꼭 쥔 채로.
류재언은 어느새 화집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다소 오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소현은 컵을 내려놓으며 그를 보았다.
“화집 진짜 맞지? 확인했으면 이제 그만 좀 가봐. 나 일해야 되니까. 오후에는 또 다른 미팅 있단 말이야.”
공손한 태도를 거두며 말하는 소현에게 류재언은 침묵으로 대꾸했다.
안 갈 모양이다.
“근데 이게 얼마라고 했더라.”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소현은 툭 내뱉었다.
“화집 이거, 원래 이백인가, 삼백인가에 팔렸다던가. 그런데 여기서는 안 판다잖아.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다고 팔지를 않는다는데 어쩌겠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그만 가시죠, 류 대표님. 나 이거 조심해서 봐야 해. 잘못해서 찢어지거나 오염되기라도 하면 나한테 덤터기를 씌워서 얼마나 비싼 가격에 물어내라고 할지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간이 떨린다. 귀한 화집, 어디 부담스러워서 제대로 볼 수나 있겠나 싶다.
소현은 으으으,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 화면을 켰다.
그리고 마우스를 꺼내려는데…….
찰나였다.
“……어어어어어!”
소현 스스로 가방으로 테이블을 툭 쳤던 것일까.
팔꿈치라도 닿았던 것일까.
아니면 미약한 지진이라도 났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왜 순간적으로 테이블이 흔들렸는지.
그리하여 왜 그 위에 멀쩡하게 있던 커피 유리잔이 갑자기 뒤뚱뒤뚱 기울어졌는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유리잔을 탁 잡긴 했으나, 소현의 손에서 그만 미끄러진 잔에서 커피는 왜 쏟아지고 말았는지.
그리고 쏟아진 커피가 왜 하필 귀하디귀한 라르고 화집을 해일처럼 덮쳤는지.
소현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졌고 커피와 얼음은 화집을 검고 축축하게 물들이고 말았다.
“……아아아악!”
절규하는 소현의 눈에, 그 순간 두 남자 사이 사납게 얽힌 시선이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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