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르고 웨딩-5화 (5/52)

5화– 이러면 반칙이지, 개쓰레빠 주제에.2017.07.17.

“……내 기억, 틀렸어요?”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현은 잠시 멍해졌다.

개차반 같은 놈.

기억력은 또 왜 이렇게 좋아.

“……아하하하하하, 그쪽이 누구신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저는 한 개도 모르겠네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야무지게 꽂으며 애써 웃는 소현을 보며 남자는 유유히 팔짱을 끼었다.

“아, 그래요?”

소현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본격적으로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

숨이 다 막혔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왜 이래, 정말.

소현은 류재언에게 당하고 온 것이 불과 10분 전이라는 사실마저 새삼 분하게 느껴졌다.

“내가 누군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정말?”

자신의 말을 곱씹어 되돌려주는 남자에게, 소현은 얕잡아 보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와 다시 인연이 엮이는 건 사절이다.

용건이 있어 왔으니 그것만 해결하기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치명적 문제는 언제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생기곤 하지.

“제가 그쪽이랑 하와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없었든 지금 알 게 뭐예요. 저는 그냥 책이나 사러 온 것뿐이니까……, 아.”

아차, 해봤자 말은 이미 뱉었고,

시간은 이미 흘렀고,

화살은 이미 당겼고.

“우리가…… 하와이에서 만났었다는 걸, 알고 있네요?”

빼도 박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아, 하하……, 그렇구나, 우리가 아하하, ……하와이에서 만났던 사이였구나아아, 하하, 그랬었지, 참…….”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되어버리자, 소현은 재빨리 책방 안을 스캔했다.

여기 들어온 이상 할 일은 해야만 했으니까.

돌아보니 귀한 책들이 가득한 서가가 저쪽에 있다. 분명 저기에 애타게 찾는 화집도 있으렷다.

빨리 화집이나 사서 나가야지. 그리고 이곳에 다시는 안 오면 되는 것 아닌가.

“아하하……, 기억이 나는 것도 같네요. 나이가 드니 한 해 한 해가 달라요, 돌아서면 까먹고 돌아서면 까먹고 그렇죠, 뭐. 어제 본 사람도 가물가물하고, 암튼 그래요, 하하, 잘 지냈어요? 이 책방은 그쪽이 직접 운영하는 거구요?”

별일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남자는 소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소현은 다시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이고, 그러셨구나아. 여기서 책방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한국에는 언제 들어오셨대요? 하마터면 초면인 줄, 하하하, 세상이 참 좁아요. 그쵸? 누가 보면 하와이랑 서울이 코앞인 줄 알겠어요.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하하하.”

소현은 혼자 근황토크를 이어갔다.

그에게 대답을 할 틈은 주지 않았다. 딱히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마치 3년간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날 개쓰레기라고 부른 것도, 기억나구요?”

하는 짓만 쓰레기인줄 알았더니, 쪼잔함도 상상초월이다.

설마 지금까지 벼르고 있었던 걸까.

소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어? 그렇게 안 봤는데 뒤끝 대박일세…….’

그냥 이대로 남자의 멘트에 짙게 깔린 반감을 받아낼 수는 없다.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얼굴 붉혀야 이득은 없을 것이다.

일단 목표는 하나니까.

오로지 화집이다!

“에이, 설마요! 제가 무슨 그런! 어휴, 서정한 씨한테 그 무슨 망발을! 그럴 리가! 오해라도 하셨나? 제가 진짜 개쓰레기라고 불렀을 리가 없잖아요, 하하하? 그쵸?”

서정한 씨한테……!

서정한 씨……!

서, 정, 한……!

그제야 소현은 자신이 남자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불러버렸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기억에서 완벽하게 밀어낸 줄 알았는데. 무슨 이름 석 자가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그뿐인가. 서정한이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남자라는 것까지, 디테일 하나 잊은 것이 없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기억하고 있죠, 그럼?”

그게 사실이니까.

“어, 음…….”

서정한, 이놈이 불명예스러운 호칭 ‘개쓰레기’에 집착하는 이상, 이것부터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느낀 소현은 둘러댈 말을 황급히 떠올렸다.

“개쓰레기라뇨오오, 어, 음, 개, 개쓰레……빠? 아, 쓰레빠!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빠였죠. 잘못 들으셨나 보네? 하하하, 그, 그렇게 불렀잖아요. 그때 서정한 씨 맨날 쓰레빠 신고, 어? 기억나죠? 오죽하면 스카이 다이빙할 때도 쓰레빠를 신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그게 강렬했으면 제가 쓰레빠라고 불렀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 쓰레빠가 서정한 씨 시그니처라고 할 정도였잖아요. 하하하하하…….”

그렇지, 좋아. 자연스러웠어.

“……개는?”

“그 개, 이쁜 강아지요. 아니, 엄청 큰 개, 서정한 씨 개 키운다고 했잖아요. 나한테 사진도 보여주고, 에이, 그러니까 제가 친근한 의미로다가 별명을 붙여서, 개 키우면서 쓰레빠 신으시는 분, 그래서 ‘개쓰레빠’라고 별명 붙여 불렀던 것뿐인데, 뭘 또 그렇게 바로 예민하게 각을 세우고 그러세요! 사람이 너무 성급하시네! 하하! ……하하하.”

옳지, 아주 훌륭해.

소현은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며 두드려주고 싶을 정도로 본인의 임기응변에 매우 흡족했다.

“뭐, 그럼 그렇다 쳐요.”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르르 번졌다.

서정한의 나긋한 봄바람 같은 웃음에 소현의 심장이 순간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3년 만에 봐도 저 얼굴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채우는 무언가가 있다.

미남들은 잘생긴 건 본인이면서 보는 사람까지 뿌듯하게 하고 그런다지. 이런 게 진정한 박애일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니 마음씨도 참 곱다, 고와, 하며 봄눈 녹듯 풀어지려는데.

“그렇다고 개쓰레빠는 좀 그렇지 않아요? 슬리퍼도 아니고.”

안드로메다로 가던 심장이 제 궤도를 찾았다.

그래, 저 남자는 상상 외로 쪼잔한 놈일 수 있다.

잠깐이나마 이성을 잃으려고 했던 걸 간신히 부여잡으며, 소현은 그의 말에 속으로 툴툴거렸다.

‘너한테는 ‘쓰레빠’도 아까워, 네가 한 짓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이 추잡한 개쓰레기 같으니.’

번지르르한 얼굴에 홀딱 넘어갔던 지난날의 자신이 다시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슬리퍼와 ‘쓰레빠’는 엄연히 다른 물건을 지칭한다고들 하잖아요, 하하하하. 트레이닝복과 추리닝이 다른 것처럼. 하와이에서 그쪽이 신으셨던 건 ‘쓰레빠’가 분명하니까, 뭐, 나름 귀엽지 않아요? 그냥 ‘개쓰레빠’로 합의 보고 넘어가시지요?”

그래야 제가 과거에 개쓰레기라 불렀던 걸 ‘개쓰레빠’라고 계속 우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아아.

소현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 ◆ ◇

그 시간.

소현을 내려준 후 이동 중인 류재언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뒷좌석에 기대앉은 그는 차량 안의 태블릿 피시를 조작해 통화를 연결했다.

곧 화면 가득 하태랑의 얼굴이 차올랐다.

- 류 대표! 임 실장이 출력해준 이거 뭐야? 나 정말 이것까지 외워야 해?

손에 든 종이뭉치를 흔드는 하태랑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류재언은 예상했다는 듯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 야, 이 괴물 같은 놈아, 내가 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미술 공부하느라 머리가 얼마나 아픈지 알아? 그런데 웬 라르곤지 마르곤지 얼굴도 모르는 이것까지 내가 알 게 뭐냐고! 시집 좀 가겠다는데 왜 공부를 시키고 지랄이야, 지랄이이이이!

“제이 라르고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알고 있을 만한 최소한의 내용만 정리해서 보내라고 했는데. 임 실장이 좀 과했나 보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임 실장의 잘못…….”

- 아니야! 아니라고! 왜 또 화살을 그쪽으로 돌려! 임 실장을 또 어쩌려고! 어우, 저 악마새끼, 하여튼 피도 눈물도 없어! 불쌍한 임 실장이 무슨 죄냐? 머리가 나빠서 다 외우질 못하는 내가 죄지!

화면을 채운 하태랑의 예쁜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저러다 태블릿 피시가 터지지 싶다.

이를 지켜보는 류재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시켜서 한 일 중에 하태랑이 손해 본 게 있던가.”

- 아, 없지, 없어!

그걸 누가 모르냐는 얼굴로 하태랑이 씩씩거렸다.

성난 망아지 같은 하태랑의 대외적 이미지를 품위 있고 우아한 국민여신으로 만든 건 바로 류재언이다.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 역시 바로 하태랑 본인이고.

“……더 할 말 있어?”

많은 걸 설명하지 않아도 하태랑은 잘 알고 있다.

류재언이 그리는 큰 그림 속 주인공이 된 이상, 자신의 결혼식 또한 이미 하나의 쇼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가 짜놓은 판에서 하태랑은 예술에 아주 관심이 많고 선행에 앞서는 여배우로 살아가면서, 독특하고 작은 결혼식을 거행하여 이 또한 세간의 화제가 됨으로써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켜가는 것.

자신이 이미지로 먹고사는 이상, 류재언은 매우 훌륭한 연출자였고 배우생활 중 그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버거워도 하태랑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만다.

- 외워, 아, 외우면 되잖아!

류재언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기만 했다.

◇ ◆ ◇

“그런데, 여기에 뭘 구하러 왔다고 했죠?”

소현은 ‘개쓰레기’를 ‘개쓰레빠’로 애써 ‘순화’시키느라 진땀 빼던 차에 서정한이 화제를 돌려주어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아, 화집이요. 제가 구하고 있는 한정판 화집이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이 라르고라는 미국 화가예요. 그 사람이 주로 그리는 게 하늘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밤하늘을 테마로 낸 화집이 있다던데요. 여기 있는 거, 맞아요?”

서정한은 잠시 입술을 닫고 소현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무표정의 얼굴,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진 소현은 시선을 거두어 책방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서점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정돈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게.”

진열되어 있는 책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했다.

제멋대로 늘어져 있는 책들 사이를 돌아보니,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무슨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 개쓰레기 인성으로 보았을 때, 뭔가 있어 보이려고 그럴듯하게 꾸며진 예술책방을 인수받아 운영하는 것도 거의 확실하고.

제이 라르고가 누군지, 그 화가의 예술적 감성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는 것도 뻔하고.

다시 봐도 이 남자는 영 아니다.

3년 전 그날, 선을 긋고 돌아온 것이 잘했다 싶었다.

“그냥 제가 찾아볼게요. 이쯤에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눈에 익자, 자유분방한 진열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다양한 화집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다가선 소현은 문제의 화집을 찾으려 했다.

책방 안에 감도는 침묵을 깨며 소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거 하나 팔면 매출에 꽤 도움이 되시겠어요. 겨우 그림 책 한 권에 무슨 이백만 원씩이나 하고 그럴까요.”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기에, 설마 자신이 진짜 사갈 거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소현은 자신이 시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미리 언질할 필요가 있었다.

“하긴, 그 돈을 주고도 못 사서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죠.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라니, 아, 그 화집에 실린 그림 하나는 얼마 전에 소더비 경매에서 일억 이천만 달러에 팔렸대요. 그림을 사는 건지, 재산을 늘리는 건지, 다른 세상 얘기 같아요. 무슨 그림 하나에 천억 원을 넘게 주고 사는지. 보니까 뭐가 좋은 건지 난 하나도 모르겠던…….”

책장 앞에서 세로로 꽂힌 화집 제목을 하나씩 훑어보며 재잘거리던 소현은 숨을 삼켰다.

비누향.

산뜻하고 청쾌한 비누향이 바로 등 뒤, 아주 가까이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언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무척이나 가슴 설레던 향, 그대로였다.

서정한의 왼손이 뻗어나와 책장을 잡았고, 오른손은 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키. 긴 팔다리.

그의 품 안에 소현은 갇히고 말았다.

침도 꼴깍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격한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탁.

그가 위에서 빼낸 검은색 표지의 양장본이 소현의 눈높이까지 내려와 책장에 탁 하고 놓였다.

“찾는 게 이거, 맞습니까.”

차분하고도 고요함이 느껴지는 음성.

정성껏 빚어놓은 듯 아름다운 얼굴과 산뜻한 향. 그리고 이 목소리에도 순식간에 녹아내렸던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다.

아니, 어쩌면 매력이 더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뒤에 선 서정한으로부터 사정없이 공격이 들어온다.

이러면 반칙이지.

개쓰레빠 주제에.

“마, 맞아요.”

소현은 커다란 화집을 품에 안고는 서정한을 살짝 밀쳐내며 떨어져 나왔다.

몰래 후우, 숨을 내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소 부족으로 죽는 줄 알았다.

저렇게 사람 홀려놓고 무슨 짓을 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시는 멍청하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맞아요. 맞네요. 하하, 역시 주인이라 금방 찾으시네요.”

소현의 머릿속에는 얼른 화보 값을 치르고 책방을 빠져나갈 생각만 가득했다.

가방에서 지갑을 찾아 꺼냈다.

“카드 되죠? 이렇게 비싼데 설마 카드가 안 되진 않겠죠?”

책방 주인과 손님.

담백한 관계.

이번 만남 역시 여기서 이렇게 끝내면 된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카드를 꺼내서 이제 계산을…… 하면 되는데…….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그 화집, 안 팝니다.”

“네?”

“팔지 않는 책들이에요. 이쪽 서가에 있는 건.”

어안이 벙벙해졌다.

소현은 멍한 얼굴로 책장을 돌아보았다.

예술에 문외한인 자신이 보아도 귀해 보이는 화집이 하나 가득이다.

그런데 이걸, 안 판다고?

“아니, 왜요? 왜가 아니라, 그건 됐고, 저는 이거 사야 해요. 꼭 사가야 한다고요. 이걸 구하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심지어 뉴욕에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라는 서점 알아요? 아트북 서점, 거기까지 갔었는데 없었다고요.”

“거기엔 원래 없어요.”

“에?”

“아트북 전문서점이기는 한데 입고 자체가 안 됐어요, 거기엔. 이 화집과는 성격이 좀 다르거든요.”

일반적인 대형서점이나 동네서점, 인터넷서점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는데, 예술책만 따로 파는 서점들이 존재하는지 소현은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뉴욕, 파리, 도쿄 등 세계 여러 도시에 특정 장르를 취급하는 서점들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이러한 책방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추리소설만 파는 책방, 여행책만 파는 책방, 요리책만 파는 책방, 시집만 파는 책방……. 그뿐인가. 고양이를 주제로 한 책을 모아서 파는 책방까지.

주인의 취향에 따라 꾸려가는 독특한 책방들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그런데 미술, 음악 등을 망라하는 예술책방도 뭐, 그중에서 또 성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니.

그것까지 어떻게 다 알았겠는가. 유명한 아트북 서점이라고 하니 무조건 달려가고 봤는데, 그곳엔 아예 없었을 거라니. 왠지 분했다.

“아무튼 무슨 화집이 전부 씨가 다 말랐는지 중고로도 나오는 게 없고! 거 어디야, 그 화가가 파리에서 뭐? 앵 뭐라더라? 유럽 무슨 주의를 계승했다고, 아, 뭐지, 앵…….”

“앵포르멜.”

“아, 앵포르멜 그거. 추상주의 어쩌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그쪽 서점들에는 있을까 해서 얼마 전에는 사흘 동안 파리 뒷골목까지 다 뒤지고 왔다고요, 내가!”

고생, 고생, 이런 개고생이 없었다.

뉴욕, 파리까지 가서 좀비처럼 뒷골목 책방만 뒤지고 다닌 시간들이 짠내를 풍기며 스쳐갔다.

사람을 녹이는 얼굴이고 목소리고 미소고 비누향이고 다 필요 없다.

간신히 제정신을 찾은 심장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의미로.

소현은 화집을 안 팔 거면 내게 죽음을 달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집이 별건가, 그림 잘 인쇄해서 제작해 팔면 그만 아닌가.

남들이 많이 보면 닳기라도 하나. 그림 값이 떨어지나.

많이 팔면 돈도 많이 벌고 좋을 텐데 대체 왜 그렇게 야박할까.

하태랑은 왜 하필 그런 매정한 화가한테 꽂혀가지고!

“그 화집, 여기에도 한 권뿐입니다. 팔 수 없어요.”

고요한 밤바다 같은 분위기로, ‘안 팔아, 돌아가.’를 시전하는 서정한이 진심으로 미웠다.

“안 팔 거면 왜 서점 책장에 꽂아두냐고요. 차라리 없다고 하지. 눈앞에 두고 안 파는 건 대체 무슨 심보예요? 서점에서 왜 책을 꽂아놓고 안 파는 건데요, 지금 누구 놀려요?”

소현은 딱 울고 싶어졌다.

하태랑은 제이 라르고의 밤하늘 화집에 실린 그림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결혼식 콘셉트를 기획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결혼식 당일에 화집을 전시해달라고도 했다.

제이 라르고의 밤하늘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도 했고.

모든 재앙은 전부, 망할 자식, 류재언 때문이다.

류재언이 제이 라르고의 초창기 스케치 한 점을 하태랑에게 결혼선물로 미리 주는 바람에.

예술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하태랑이 이번에는 라르고에 홀딱 반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쁜 놈, 망할 놈, 개떡 같은 류재언.

왜 하태랑에게 하필이면 라르고 입덕, 아니 입문의 기회를 주었냔 말이다.

‘이 그림들이 뭐라고. 아니, 왜 이걸 가져오라고 난리냐고. 이게 뭐 별거라고, 그냥 확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그림들 출력해서 제본해버릴까 보다!’

속으로 버럭 화를 내며 소현은 화집을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하태랑의 다소 강하지만 품위 넘치는 음성만 귓가에 더욱 생생히 맴돌 뿐.

「은소현 씨, 그거 꼭 구해야 해요. 류 대표 얘기 들었죠? 라르고의 그림을 제대로 소장할 수 없다면 화집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그냥 인터넷에서 보는 그림이랑, 화집 통해서 보는 그림의 느낌은 완전 달라요. 종이부터 표지까지 전부 다요. 그러니 꼭 밤하늘 화집 직접 구해서 느낌 그대로 살려 기획해줘요. 화집 구하는 비용은 류 대표가 얼마든지 지원해준다고 했으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꼭 구해줘요. 알겠죠?」

돈지랄도 정도껏이랬다.

게다가 그렇게 난이도 높은 덕질이라면 혼자서나 할 것이지, 왜 그걸 하태랑한테 전파해서 자신까지 이 개고생을 시키는지.

이런 상황이 되자 류재언이고 제이 라르고고 하태랑이고 눈앞에 있는 책방 주인 서정한이고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다 한패거리야!

그때 소현이 말없이 씩씩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서정한이 입을 열었다.

“와서 봐요.”

“……뭘요?”

“화집. 여기 와서 보는 건 상관없으니까. 서가에 있는 책들, 직접 와서 보는 건 전부 무료예요. 그러니까…….”

화집만 손에 딱 쥐고 깔끔하게 나가려 했는데.

그럼 이제 하태랑 결혼식 기획은 문제없다 싶었는데.

……개쓰레기와의 인연도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와서 봐도 돼요. 앞으로 계속, 얼마든지.”

세상 일, 소현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 ◆ ◇

이불이 풀썩 날았다.

뻥 뻥.

침대에 누운 소현의 하이킥에 이불만 죽어나는 중이었다.

“아우우우! 뭐 엮여도 이렇게 엮이냐고! 그 얼굴을 내가 왜 또 봐야 되는 건데!”

그것도…….

「앞으로 계속, 얼마든지.」

화집을 인질삼은 개쓰레기와 앞으로 계속 대면해야만 하다니.

아침에 구두 굽이 부러질 때만 해도, 그래서 그 굽을 고치느라 구둣방 아저씨가 내어주신 ‘쓰레빠’를 신고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이 참사는 예견하지 못했다.

설마 그 ‘쓰레빠’가 3년 전 ‘개쓰레빠’와의 재회를 경고해주었던 것인가.

복선도 뭐 이런 개 같은 복선이 다 있단 말인가.

결국 개쓰레빠가 뻗친 마수에 걸려든 자신의 인생에 한숨이 절로 났다.

이렇게 인연이 엮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온갖 여자들을 다 홀리려고 드는 여우 같은 놈.

그러나 책방의 그놈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류재언 이놈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원인 제공은 이놈이니까.

「이번 주말까지 콘셉트 시안 완성해야 하는 건 알지? 우리 하 배우 성질도 잘 알 거고.」

마치 놀리듯.

평소 잘 웃지도 않는 놈이 싱긋 웃기까지 해가며 하는 말이 얼마나 재수가 없던지.

프로젝트를 성공하란 건지, 실패하란 건지 통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스트레스의 원인으로는 어느 쪽도 남부럽지 않은 듯하였다.

「내일은 책방 휴일이니까, 모레 다시 와요. 열려 있는 시간에는 언제든 와서 마음껏 봐도 돼요.」

어떻게든 이 일만 마무리짓고 나면 그 개쓰레빠와 다시는 말 한마디 섞지 않으리라.

서촌 근처로는 발가락도 절대 붙이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을 하는 밤이었다.

◇ ◆ ◇

“언니, 화집 구했어요?”

“반만 구했어.”

“……반만 구한 건 뭐예요? 반만 투명한 용도 아니고…….”

은혜롭게도 라르고 화집의 실물은 영접할 수 있었으나, 판매는 않는다는 책방 주인의 만행을 소상히 전했다.

“헐, 그럼 어떡해요?”

“그래도 책방에 가서 볼 수는 있다니까, 우선 급한 대로 콘셉트 기획서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주말 전까지는 며칠 그쪽으로 나가봐야지.”

“그럼 오늘 책방 휴일이니까 사무실에서 기본 틀 만들어두면 되겠네요. 책방은 언니가 가는 거죠? 제가 자료들 백업해둘게요.”

“그래야지…….”

“아, 그런데 하태랑이 결혼식에 화집도 세팅해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사오지 못하면 그건 어떡해요?”

“일단 콘셉트부터 넘기고서, 결혼식 전까지 구매 가능한지 계속 설득해봐야지. 그것도 안 되면 대여라도 되는지…….”

“사정해야겠네요. 휴, 만만치 않네.”

잔인한 상황을 알면서도 애주의 입으로 들으니 더욱 처절하게 들렸다.

사정이라니.

개쓰레기에게 사정까지 해야 한다니!

물론 애주에게 책방 주인이 하와이 개쓰레기라는 사실은 전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딱 두 명 있던 남자 모두 이 일에 엮인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애주가 하와이 개쓰레기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걸 알면 거품을 물 게 분명하고.

게다가 이제는 ‘연애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데!

연애는커녕 연애영화도 볼 시간이 없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을 마실 시간조차 없고.

최대한 담백하게. 아니, 담백도 사치다.

처절한 입장답게, 굳세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리라.

은소현, 일만 하자, 일만!

◇ ◆ ◇

책방을 다시 찾아간 아침,

소현의 스트레스 지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예술책방 탐미재.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을 열던 소현은 뜻하지 않은 이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개쓰레빠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탐미재 안에…….

한옥 창 너머 햇살을 받으며 기대선 채 책을 넘겨보고 있는 류재언.

아침부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네가 왜 있어,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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