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결코 반갑지 않은 사람2017.07.14.
‘그러니까 나.’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렇게 말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읽고도 소현은 서정한을 뿌리치지 않았다.
허락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남자와의 키스마저 완벽했던 날.
처음부터 끝까지,
그건 모두 하늘이 지나치게 예쁜 탓이었다.
◇ ◆ ◇
3년 후, 서울.
오후 5시 33분.
[주문하신 커피가 3번째로 제조되고 있습니다.]
휴대전화 앱 알림이 떴다.
소현이 매일 찾는 커피전문점의 어플리케이션이었다.
“금방 들어갈 테니까 자료 정리 잘 부탁해, 애주야, 너만 믿는다.”
- 걱정하지 마용. 이미 시작했다니까요.
소현은 이어폰으로 통화를 이어나가는 동시에 택시 앱까지 화면에 띄웠다.
곧 타야 할 택시를 호출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해내는 그녀의 움직임은 거침없고 깔끔했다.
그야말로 습관이고 생활인 덕이었다.
- 그런데 오늘 또 밤새울 수 있어요, 진짜? 언니, 링거라도 맞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 방금 커피 주문했어. 카페인 충전하면 기운날 거야.”
소현은 앱을 이용해 미리 커피를 주문해두었다. 현장에서 결제하고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운 탓이었다.
“애주야. 나 택시 호출했거든. 기사님 전화 들어온다. 끊자.”
- 응, 다녀와요!
사무실에 있는 애주와의 통화를 끝내자마자 새로운 전화를 연결했다.
- 택시 부르셨죠. 곧 도착합니다.
“네, 사거리 방면으로 내려오시면 돼요. 횡단보도 조금 지나서, 네, 거기서 바로 탈게요.”
오후 5시 35분.
커피전문점 앞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와의 통화를 끝냈고 커피 제조를 완료했다는 앱 알림도 정확히 울렸다.
“‘키헤이’ 님. 사이렌 오더로 미리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 나왔습니다.”
그곳 용어로 ‘파트너’라 불리는 직원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커피를 가지고 나오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앱으로 미리 결제까지 진행했기에 가능한 시간.
언젠가 이런 소현의 모습을 본 애주가 말했었다.
「완전 신기해. 마라톤 뛰다가 중간지점에서 생수 채어가는 것도 아니고, 뭐 그리 빠르고 정확해요?」
「바쁠 때 편리하고 좋지 뭐. 이러려고 이용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누가 이렇게까지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써요. 매사에 숨막히게.」
「그런가.」
「모르는 척하지 마요. 가끔 언니 보면 알파고 같다니까. 이 정도면 알파걸이 아니라, 알파고.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고요. 요즘 들어 더 심해진 것 같아.」
오후 5시 36분.
소현은 커피 매장을 나오자마자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필운동 가시는 거 맞죠? 서촌?”
앱을 통해 미리 목적지를 입력해놓았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확인만 하면 되었다.
“네. 늦으면 안 되니까 잘 부탁드려요, 기사님.”
“걱정 마세요. 출발합니다.”
오후 5시 37분.
소현을 태운 택시가 도심 속 복잡한 도로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나선 지 정확히 5분 만이었다.
그녀의 계산에서 단 1분도 벗어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 ◆ ◇
쿠웅!
막히는 도로 위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택시에 뒤차가 와서 들이박았다.
“아오, 뭐야!”
본능적으로 뒷목을 잡은 택시 기사가 인상을 구겼다.
매우 가벼운 충돌이었다.
소현도 놀라기는 했지만 물리적 충격을 심하게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커피도 이미 다 마셔서 빈 컵을 들고 있어 다행이었다.
“멀쩡한 차를 왜 박아, 박길! 아가씨, 잠깐만 있어봐요. 내가 나가볼 테니까.”
그러나 기사는 괜찮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사가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며, 소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 예술책방 닫는 시간이 아주 칼이래요. 늦으면 안 돼요. 내일은 또 휴일이라고 했으니까 오늘 꼭 가야 해요!」
애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빨리 가야 하는데.
소현은 조바심이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아저씨가 갑자기 멈추신 거잖아요. 제가 순발력이 있으니까 이 정도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났어요, 진짜.”
고급 외제승용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까, 앳된 외모의 남자였다.
“뒤에서 박아놓고 지금 뭐라는 거야. 운전을 발로 하냐, 너는? 지금 차 막혀서 다 이러고 있는 거 몰라?”
“근데 왜 계속 반말이에요? 내가 아저씨 아들인가?”
“뭐, 이 싸가지 없는 놈이!”
경미한 접촉사고지만 말싸움이 불처럼 크게 번졌다. 분위기가 꽤 험악해졌다.
“저기, 기사님, 진정하시구요.”
보다 못한 소현이 내려 싸움을 말리고자 했다.
“일단 보험사에 연락부터 하셔야 할 것 같은…….”
두 사람은 소현의 말을 동시에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있어요!”
“아가씬 비켜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보였다. 두 운전자의 고성이 경적보다 더 크게 울렸다.
“아침에는 구두 굽도 부러지더니, 오늘 되게 꼬이네.”
소현은 중얼거리며 택시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다시 내렸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다. 살길 찾아야 할 때였다.
“잠깐!”
소현은 두 운전자 사이에 다시 끼어들었다.
“두 분 다 연락처 좀 적으세요. 저한테 명함을 주시든가.”
소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재촉했다.
“일단 저도 가벼운 검사라도 받아야 하니까, 병원 내원 후에 연락드릴게요. 바쁜 일정이 있어서 이 싸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거든요.”
택시 기사는 그제야 승객의 존재를 깨달은 듯 얼른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상대 운전자를 향해 말했다.
“너, 이 자식, 이 아가씨 겉으로 괜찮아 보여도 병원 가서 검사 받아봐야 아는 거야! 사고 당했는데 그냥 보내버리면 뺑소니범 되는 거라고, 알아?”
“이 꼰대가 누굴 가르쳐,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요!”
“대화는 저 간 다음에 계속 더 나누시구요, 자, 그쪽도 얼른 연락처 줘요. 바쁘다니까요.”
소현은 뒤차 운전자의 연락처까지 강탈하듯 받아낸 후, 택시 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했다.
도로에서 쓸데없이 허비한 시간이 얼마인가.
빈 택시가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소현은 다시 택시 호출 앱을 켰다.
“하필 사고가 나도 이렇게 애매한 데서 나냐…….”
택시를 타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하지만 무작정 걷기에는 먼 거리였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며 소현은 걸음을 옮겼다.
별수 있나, 믿는 건 두 다리뿐.
더 늦기 전에 서둘러 걸어가기라도 하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때였다.
“은소현.”
들려온 음성에 소현은 고개를 돌렸다. 비상등을 켜고 멈춘 고급세단 한 대가 있었다.
창문을 내린 뒷좌석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이 상황에서 결코 반갑지 않은 사람, 전남친이자 한때 결혼할 뻔했던 남자 류재언이다.
마치 타고난 귀족 같은 우아한 자태로 앉아 언제나처럼 그 ‘재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소현은 인사를 생략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던 길이나 가시지.”
지금은 저 인간과 도저히 상종할 기분이 아니다.
“서촌 쪽으로 간다며. 그거 구하러.”
“내가 그걸 구하든 이걸 구하든 알 바 아니잖아.”
“은소현이 하는 일을 내가 모를 수가 있나.”
그랬다.
안타깝게도.
“지금 너 하는 거라곤, 내가 의뢰한 일 하나뿐이니까.”
구 연인끼리의 만남이 아니다.
클라이언트와 디렉팅 업체의 비즈니스 관계.
그것도 엄청나게 깐깐하며 까칠하고, 매사 속 뒤집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클라이언트 업체.
그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밖에 없는 가련한 디렉팅 업체의 만남이라 할 수 있겠다.
일을 맡겨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류재언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은소현을 괴롭히기 위해.
그만큼 그는 사람 피 말리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집요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꼭 이런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곤 했다.
혈압 오르게.
“타.”
“차 한 번 태워주고 얼마나 속을 긁으려고. 됐으니까 그냥 가.”
빠아앙!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류재언의 차를 향해 뒤차가 항의의 표시로 경적을 울렸다.
“빨리 타.”
빵! 빵! 빠아앙!
뒤쪽으로 난리가 날 기세인데도 류재언의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미친놈은 자신이 탈 때까지 진짜 버티고 있을 것만 같았다.
“타고 가면 오 분도 안 걸려. 길거리에 시간 버리는 거 아깝지도 않나. 넌 일이 별로 없어서 시간이 많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일분일초가 다 돈이고 금이야.”
애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누가 이렇게까지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써요. 매사에 숨막히게.」
그 숨막히는 인간, 바로 여기 있다.
원래 뭘 해도 원조에는 못 당하는 법, 류재언이야말로 이 시대의 참 알파고였다.
결국 소현은 짜증 섞인 얼굴로 재빨리 뒷좌석 문을 열었고, 류재언은 안쪽으로 옮겨 앉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소현이 올라타자 그제야 기사가 액셀러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류재언의 얄미운 얼굴을 옆으로 흘겨보며 소현이 내뱉었다.
“못된 건 오늘도 여전하시네, 재밌어, 이게?”
“거울 있으면 좀 봐. 네 표정.”
곤란한 상황에 빠진 소현을 볼 때 류재언은 즐거운 듯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요즘 그는 언제나 즐거워 보였다.
그만큼 소현은 늘 곤란했다. 류재언과 함께 있으면.
물론 지은 죄가 있으니 고분고분 복수 당해주는 중이기는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살다가는 조만간 성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번에는 확실하게 구할 수 있나 보네. 표정이 자신만만한데?”
돌연 나직하게 묻는 류재언의 말에 소현의 한쪽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이 자식아. 내가 너희 회사에서 시킨 일 때문에 며칠째 잠도 못 자고 이렇게 개고생 중인 건 안 보이냐, 이 나쁜 새끼야!
“당연하지! 그놈의 화집, 내가 그깟 것도 못 구할까 봐?”
“서촌에 있다고? 거기에도 없으면?”
정보가 빠르기도 하지. 애주에게 들은 모양이다.
마치 ‘아마 거기에도 없을걸?’ 하는 듯한 말투에 소현은 발끈했다.
“이번에는 확실해! 분명히 있다고 했어.”
“온갖 예술서적은 다 갖추고 있다는 유명한 서점에도 없었다며. 그런데 그게 서촌 구석에 이름도 모를 책방에 있을 거라고 믿다니.”
소현은 미국의 화가 ‘제이-라르고(J-Largo)’의 한정판 화집을 구해야 했기에 요즘 정신없이 지냈다.
물론 옆에 있는 류재언이 맡긴 일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 화집이 진시황의 불로초보다 구하기 힘든 것인지 알았다면 덥석 물지도 않았을 거다.
그 미국 화가는 대체 왜 한정판이랍시고 극소량만 제작해서 지구 반대편의 일개 소상공인까지 이 생고생을 다 시키느냔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살살 약 올리듯 비위를 건드리는 류재언이 너무도 미웠다.
“이번 주말까지 콘셉트 시안 완성해야 하는 건 알지? 우리 하 배우 성질도 잘 알 거고.”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러니까 제발 입 좀 닥치고, 나한테 일도 맡기지 말고, 옆에서 좀 꺼져, 라고 하려던 소현은 서글퍼졌다.
차마 그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일은 해야 했다.
자립하여 구멍가게만큼 작은 웨딩 디렉팅 회사를 차린 게 불과 3년 전.
그간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생한 생각을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월급 받을 땐 몰랐다. 도대체 돈 나갈 곳은 왜 이리 많은지.
직원이라고는 애주 한 명뿐인데 월급 주는 날과 코딱지만 한 사무실 월세 내는 날은 왜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들어오는 일 한 건 한 건이 너무도 소중했다.
더더욱 류재언처럼 굵직한 프로젝트를 맡겨주는 클라이언트라면 더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하태랑의 결혼식 전담 진행이라니.
이것만 성공적으로 진행하면 앞으로의 일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류재언은 바로 그 여배우인 하태랑의 소속사 대표다.
게다가, 소현이 쓰고 있는 사무실 역시 그의 소속사 건물 꼭대기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건물‘주님’이기도 하시다.
그것도 시세보다 저렴한 월세로 사무실을 내주었으니, 여러모로 잘 보여야 할 대상임에 분명했다.
류재언은 이렇듯 가지가지, 골고루, 알차게 갑질할 수 있는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한번 갑은 영원한 갑이려니.
“그러니까 제발 뭐.”
“……제발, 음, ……우리 제발 그만 좀 싸우자, 뭐 이런 거지. 지난 일은 다 잊으시고, 어휴, 우리 나이도 벌써 서른하나에, 너는, 아니, 대표님은 어이쿠, 사회적 체면과 인지도도 있으시고, 다 큰 어른들끼리 쓸데없이 싸우는 것도 시간낭비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어머! 벌써 다 왔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니임!”
자연스럽게 존칭으로 말을 맺으며 소현은 호방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어색함에 입꼬리가 다 씰룩거렸지만 이 정도야 일도 아니다.
류재언의 심기가 상하면 골치가 아프다.
당장이라도 그가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한다면.
아니면 그의 건물에서 사무실을 바로 빼라고 한다면.
여배우 하태랑의 결혼식을 다른 업체와 진행하겠다고 한다면.
어흑,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악착같이 성공해낼 거라며 호기롭게 시작한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처지였다.
뭐 하나 류재언에게서 자유로운 것이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러니까 실체도 없는 자존심 따위,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소현. 너만 잘하면 돼. 그러면 문제없겠지.”
류재언의 낮고 위압적인 음성에도 소현은 씩씩하게 웃으며 대꾸할 수 있었다.
“암요! 눼에, 그러믄요! 넌 딱 가만히 있어, 나만 잘할 테니까!”
가방을 챙겨 내리면서 그녀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화집 무사히 구해서 하태랑 귀국 전까지 마음에 쏙 들 기획서 만들어낼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나 간다!”
소현이 인사를 하고 서둘러 뛰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는 류재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울까.’
승리를 확신하는,
쟁취를 예감하는,
소유를 기대하는,
절대 흔들려본 적 없는 자의 강인한 미소였다.
◇ ◆ ◇
‘여기가 맞나?’
주소대로 찾아왔더니, 골목 안쪽 어느 한옥집 앞이었다.
‘탐미재’라고 쓴 작은 입간판이 전부였다.
소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제이 라르고의 화집이 바로 이 안에 있다니, 벌써부터 감격스러웠다.
하태랑이 그 화가의 그림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결혼식 기획을 위해서는 꼭 구해야만 하는 화집이다.
제이 라르고의 화집만 손에 넣는다면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계세요?”
안으로 들어간 소현은 주인부터 찾았다. 그러나 생명체라고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담한 정원을 지나 한옥 내부로 들어서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풍스럽고 연식이 오래된 가구들 위로 책이 한가득이다.
책장에 잔뜩 꽂힌 책들, 제멋대로 누워 있는 책들, 테이블 옆에 쌓인 책들, 누가 보다 만 것처럼 펼쳐진 책들…….
책방인지 빈티지 가구점인지 혹은 누군가의 서재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장소였다.
‘뭐지, 아무도 없나…….’
그윽한 커피 향과 매캐한 책 내음이 한데 뒤섞인 곳.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고즈넉한 느낌마저 들었다.
방금 전까지 차가 꽉꽉 막히는 서울 한복판 도로를 달려 온 것이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류재언의 고급세단 안에서 첨단화된 각종 디지털 기기를 접한 것 역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완벽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윽한 꿈결, 아련한 숨결.
호젓하게 노니는 그저 평온한 공기.
“어서 오세요.”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정중한 음성에 소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네, 제가 찾는 화집이 있는데요, 그게 여기 있…….”
그러나 돌아보던 소현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그녀의 눈은 의구심과 당황스러움, 놀라움이 제멋대로 섞여 커다랗게 벌어졌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현실적인 이 공간에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우선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낡고 고즈넉한 이 서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되고 상큼한 분위기의 남자.
마치 잘 꾸며둔 영화세트장이나 화보 촬영장에서 막 튀어나온 배우나 연예인이라고 해도 수긍할 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 있지?’
가뜩이나 조용한 책방 안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
그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남자 또한 자신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종일 재수가 없더니 이렇게 정점을 찍는구나.’
소현은 벌써 3년 전의 일이니 어쩌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옛 인연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 할 일은 딱 하나니까.
“제가 찾는 책이 여기 있다고 해서 구하러 왔거든요. 그게 한정판이라…….”
“은소현 씨?”
툭, 떨어졌다.
애써 어색함을 감추고자 뒤적거리던 얇은 도록이 소현의 손에서 미끄러져서 툭.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심장도 툭.
발 아래로 모두 툭,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도, 이름도, 잊지 않고 있었다.
마치 꼭 만날 사람을 만난 듯, 다시 또 볼 날을 기다려온 듯.
지극히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열어,
“뭐라고 했었더라, 그땐 은소현 씨가 나한테.”
“…….”
“개쓰레기, ……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웃으며 물었다.
“……내 기억, 틀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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