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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르고 웨딩-3화 (3/52)

3화– 지금의 마음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믿음2017.07.10.

「거기서 내일 나랑 같이.」

「…….」

「저녁 먹어요.」

후아아아.

소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하늘 위로 올라갈 때만큼 심장이 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만큼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아까 그 남자, 아까 안에 있던 인스트럭터 맞지? 너희 원래 친한 사이니?』

『뭐라고 한 거야? 너희 나라 말이야? 갑자기 왜 쫓아온 거야?』

대뜸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소현과 같은 차량에 탑승한 각국의 여자 여행객들이었다.

그녀들도 스카이다이빙 체험을 마치고 와이키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이 차에서 내려 멀어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여자들.

소현은 그녀들이 영어로 쏟아내는 말을 대충 알아들었지만 그저 “으음?” 하고 웃어 보였다.

그 남자와는 생판 모르는 사이며, 실수로 팁을 보통의 열 배 정도나 줘버렸고, 아무래도 그 때문인지 저녁을 사겠다고 한 것뿐이라고.

타인에게 일일이 설명하기에 조금 피곤하고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머무는 동안 또 오고 싶을 정도야, 쟤 때문에.』

『아아, 진짜! 너무 잘생겼어!』

『그래, 지금까지 내가 본 동양인 중에 제일!』

『아까 보니까 웃는 얼굴도 미치게 섹시하더라, 귀엽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몸인 듯했다.

해변에서, 하늘에서, 하와이 곳곳에서.

내가 그런 남자와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

창밖으로 스쳐가는 시원시원한 경관이 가슴을 어지럽혔다.

한.

그의 미소가 창문에 어른거렸다.

◇ ◆ ◇

“헐. 미쳤다.”

“대박이지.”

도저히 현실 인물 같지 않던 그 서핑가이가 스카이다이빙 강사로 다시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애프터라니, 애프터라니!”

“아니, 그건 오버고.”

“그게 애프터가 아니면 뭐예요. 세상에나, 대박. 오늘 하루로 끝날 수도 있는 인연이 다시 이어진 거잖아요. 내일 저녁 약속으로!”

애주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소현이 가져온 스카이다이빙 영상과 사진까지 모두 보고 난 후라 설렘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벌써 열 번은 돌려본 것 같았다.

“내일 마우이 들어가면 언니, 호텔부터 들어가서 일단 푹 쉬고 컨디션 최상으로 뽑아서 완전 예쁘게 꾸미고 나가요! 흐아, 신난다!”

“아니, 그거…… 오버라니까…….”

“이 언니가 뭘 모르시네. 그 남자 지금 작업 들어온 거잖아요.”

김칫국은 마시기 싫었다.

어쩌면,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만에 찾아온 설렘인지도 모르겠고.

소현의 두근거림은 좀처럼 멎질 않았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 이름이 뭔가 낯익지 않아요?”

마우이 섬의 키헤이 해변에 있다는 그 레스토랑.

내일 소현이 한과 만나기로 했다는 레스토랑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애주는 무언가 생각난 듯 휴대전화 메모 앱을 켰다.

“맞네, 여기네, 여기예요, 언니.”

“응?”

“그 공항에서 만난 아줌마가 추천해준 식당 중에 한 곳이요. 왜,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자매가 운영한다는 레스토랑. 거기 맞죠?”

같은 이름이었다.

「마우이 섬에도 들어간다고 했죠? 그럼 여기도 꼭 가봐요. 내가 애인이랑 같이 정말 좋아하는 곳인데, 해 질 무렵에 가면 너무 예쁘거든요. 해가 막 지려고 할 때, 하늘이 오색으로 물들 때요, 매직 아워 꼭 맞춰서 가요. 그리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랑 다시 오구요. 거긴 연인이랑 가면 더 로맨틱하고 좋으니까.」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던 친절한 하와이 교민.

그녀가 추천해준 식당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유명하지 않아 호젓하면서도 음식 맛이 뛰어난 곳이었다.

경관이나 분위기가 좋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보물 같은 곳들을 소개해준 그녀 덕분에 여행이 조금 더 즐거웠었다.

그래서 마우이 섬으로 넘어가는 길도 은근히 기대를 했었는데.

“헐, 이건 백퍼네. 백퍼야.”

애주가 소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언니, 언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들어요.”

당장 하와이 어딘가로 시집이라도 보낼 기세였다.

“내일 좋은 시간 보내요! 꼭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구요!”

“……너 안 가?”

“안 가요. 언니 혼자 가요!”

“내가 같이 여행 온 친구도 함께 나간다고 했는데?”

“아니, 내가 무슨 눈치를 쌈 싸 먹었어요? 거길 왜 가요, 내가.”

“그렇다고 너만 혼자 두고 내가 어떻게…….”

소현의 말을 막으며 애주는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나 내일 저녁에 무지하게 아플 예정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언니는 매직 아워에 키헤이 해변 레스토랑으로, 그 남자 만나러 썩 꺼지라구요. 알겠어요?”

◇ ◆ ◇

다음 날, 공항으로 가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마우이 섬으로 이동했다.

렌트카를 인수받아 다시 호텔로 향하는 길은 마치 새로운 여행길처럼 느껴졌다.

호텔 도착 후 한을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는 마음도 새롭기만 했다.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

푸른 빛깔 원피스.

“언니, 도대체 얼마만의 데이트인 거죠?”

“으음……? 하하, 글쎄.”

엄밀히 말하자면 데이트라고 부를 수 있는 약속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남자를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긴 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아무래도 김칫국 한 술 떴을 뿐인데 벌써 반 그릇이나 비워버린 느낌이다.

그러다 목에 턱 걸리는 건, 자연히 떠오르는 전남친 류재언과의 기억.

예정대로 식을 올렸다면 지금 여기에 함께 와 있겠지.

말도 못하게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린 가슴은 아직도 채워지지 못했다.

「그래.」

몇 달을 앓으며 했던 고민이 무색할 정도였다.

소현이 고백을 하던 열여덟 살의 그날……, 류재언의 답은 예상 밖으로 금세 새어나왔다.

빳빳하게 다린 교복 블라우스 끝을 주먹으로 말아 움켜쥔 채 소현은 손을 가만히 떨었다.

그래, 라는 대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음……? 그래? ……나, 너, ……좋아한다고 한 건데.」

류재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건가 싶어서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 말에 류재언은 특유의 오만함이 가득 배인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물었다.

「그래, 알아.」

「알아……? 아, 알고 있었다고?」

숨이 턱 막혔다.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같은 고등학교 학생회에 선출되어 들어가고, 학교 행사 준비를 하면서 회장이었던 류재언과 어쩔 수 없이 엮이기 전까지는.

소현에게도 류재언은 그저 다른 세계에 사는 아이일 뿐이었다.

엄청난 금수저에 빼어난 외모와 성적,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

쟤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어도 명품으로 보일 거라며 아이들은 농담 섞인 찬양을 했었다.

말 한번 붙여보기도 어렵게 느껴지는 동급생.

그 시절, 소현은 그래서 류재언이 더 좋았다.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동화 속 왕자 같은 존재였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음은 점점 커져갔고 급기야 거절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앓느니 질러나 보자는 패기로 고백을 하고 만 것이었다.

적어도 류재언은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애는 아니니까, 속이라도 편해지자 싶어서.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아니, 뭘 바라고 얘기한 게 아니라. 그냥 좋아한다고 한 건데.」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어, 뭐, 말하자면, 좋아하니까 사귀면 좋겠지만…….」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창피를 톡톡히 주려고 저러나 생각할 무렵, 류재언은 표정의 변화조차 하나 없이 툭 던졌다.

「그럼, 그러든가.」

「……어어?」

속을 알 수 없던 류재언과의 연애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꼭 10년에 걸친 연애였다.

◇ ◆ ◇

키헤이 해변.

바닷가 식당에 홀로 앉아 있자니 소현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태양이 조금씩 가라앉으며 하늘에 낮게 스미었다.

낮 내내 그렇게도 푸르던 하늘색이 셀 수 없이 많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곱다, 고와.”

소현은 마치 노인의 한 섞인 경탄 같은 말을 내뱉으며 그 하늘을, 그 바다를 바라보았다.

류재언은 뭐라고 했을까.

예정대로 하와이에 왔다면.

애초에 이런 경치를 보며 감탄이나 할 인간일까.

소현에게 관광을 하든 액티비티를 하든 물놀이를 하든, 혼자 알아서 놀고 오라고 했겠지.

「넌 가고 싶은 곳 없어? 신혼여행?」

「없어.」

「아……, 난 너무 많아서 어딜 정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할 얘기가 그거야?」

「응?」

「바쁘니까 결정한 후에 말해.」

류재언은 아마도 호텔 비즈니스 미팅 룸을 하나 따로 빼서 종일 일하고, 피트니스와 수영장에서 운동만 했을 테지.

그게 신혼여행 온 류재언의 일과 전부였을 것이다.

서울에 있든 하와이에 있든, 상관없는 삶.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상관없는 삶.

곁에 은소현이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는 삶.

…….

10년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무서워서 툭 치면 어디서든 류재언이 튀어나왔다.

“에이씨……. 뭐야.”

류재언의 빈자리가 이런 식으로, 아니 이딴 식으로 느껴지는 것은 영 불만이다.

눈물이 고이려고 하는 것도 불만이고.

이건 다 하늘이 지나치게 예쁜 탓이다.

“애주가 기껏 화장까지 잘해줬는데.”

소현은 서둘러 거울을 꺼내 얼굴 상태를 살폈다.

아이라인이 번진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보느라 고개를 들어 눈을 반쯤 뜨고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늘이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다 하늘이 지나치게 예쁜 탓이다.

“흡…….”

나무로 만든 테이블 끝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대로 굳어진 소현은 자신이 거울을 들고 있는 것이 새삼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이러려고 치장을 했나 자괴감이 드는 시점이다.

세상의 모든 빛을 끌어 모아 여기다 흩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남자가 바로 앞에 서 있는데, 왜 하필이면 거울 속 내 얼굴이 보이냔 말이다.

그것도 죽죽 늘여놓은 대왕오징어의 자태로.

“하……, 하하, 하하하하…….”

얼굴을 수습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쉽다는 듯 소현은 호탕하게 웃으며 거울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는 소현을 보면서 한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쿡, 막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눈을 마주 바라보며 인사했다.

“거울 안 봐도 예뻐요.”

인사가 아닌데, 인사로 들렸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허허…….”

이 남자가 지금 놀리네.

놀리면, 놀아주면 되지 뭐.

“안 봐도 예쁘지만, 보면 더 예쁘잖아요.”

소현은 좀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면 못 볼 사람인데, 그러면 좀 어떤가.

내가 아무리 대왕오징어래도 여긴 하와이고, 지금은 석양이 예쁘고, 로맨틱한 해변에 남자랑 단둘이 밥을 먹으러 왔는데.

한은 또 웃었다.

이제 막지 못하겠다는 듯 환히 퍼지는 웃음을 어쩌지 못한 채 메뉴를 펼치는 한에게 소현이 항의했다.

“아아, 왜 자꾸 웃어요.”

“귀엽잖아요.”

말문이 막힌 소현에게 한이 아무렇지 않게 눈짓했다.

먹고 싶은 것 다 고르라고.

그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늘빛이.

붉고 푸른 석양이.

바다가.

부드러운 모래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의 모든 것이,

한의 눈에 담뿍 들어 있었다.

◇ ◆ ◇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 랍스터 샐러드 아는 사람 별로 없는데.”

소현이 주문한 메뉴를 보고 한이 놀라운 듯 되물었다.

메뉴판에는 없는데 주문하면 만들어준다고, 정말 맛있다면서 꼭 먹어보라고 한 사람은 공항에서 만난 교민 아줌마였다.

소현은 뿌듯했다.

키헤이에 오는 서퍼들이나 여행객이 즐겨 찾는 곳에선 좀 떨어져 있는, 무척이나 한적한 식당이다.

잠시 머무는 관광객들이 흔히 찾아오는 코스는 아니었다.

“여기 원래 알았어요? 어떻게?”

“추천받았던 식당이거든요. 저도 꼭 오려고 했던 곳인데 여기서 만나자고 해서 반가웠어요.”

“어, 그럼 우리 좀 통하는 거 아닌가. 이런 경우 흔한 거 아니잖아요.”

“뭐……, 흠, 그렇게 되나?”

“마우이 오는 일정도 겹치고. 이번엔 잠깐 친구만 만나고 금방 건너갈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같이 저녁 먹을 기회까지 생기고.”

“아…….”

“어제는 제가 나가는 날도 아니었는데 갔다가 은소현 씨 만난 거였어요.”

“어, 그랬어요?”

몰랐던 사실에 소현은 내심 놀랐다.

그 전날 와이키키에서 우연히 한을 보았던 것까지 얘기한다면 그는 아마 더 큰 의미를 부여하려나.

“인생 참, 신기해요.”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한은 적극적이었다.

“나는 그래서 좋은데.”

“…….”

“은소현 씨는 어떤지…….”

“…….”

“물어보면 부담스러울 테니까 안 물어볼게요.”

이건 물어본 거나 다름없지 않나, 하는 얼굴로 소현은 눈을 꿈뻑거렸다.

한이 산뜻하게 웃었다. 어떤 대답도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감정인 듯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당신과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런 얼굴로 한은 웃었다.

소현은 머리가 딩 하고 울리는 듯했다.

매직 아워.

마법 같은 시간이 펼쳐졌다.

비현실처럼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음식은 끝내주게 맛있었고, 그림처럼 근사한 남자는 자신을 향해 욕심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서정한.’

식당에서 나와 카마올레 해변 공원으로 와서 산책을 하는 사이, 소현은 그가 알려준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티 없이 맑은 남자.

그래 보였다.

한 번의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나눈 대화로 얼마나 많은 것을 파악했겠냐 싶지만, 그의 분위기만큼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사박거리는 모래를 밟고 걸으며 파도 소리를 듣는 동안,

어느새 소현의 안에는 서정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커져갔다.

살짝.

손이 와서 닿았다.

걸음이 멈추었다.

마주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두근.

소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연애의 감을 잃었어도, 이건 분명하다.

‘난 감정 두고 계산 같은 거 못 해요.’

그런 눈빛으로 서정한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사는 지역, 앞으로의 상황, 이 밖의 모든 것들.

어떤 것도 지금의 마음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니까 나.’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동조를 구하는 무언의 눈빛.

어찌할 바 몰라 터지는 가슴으로 고개를 푹 숙였을 때,

그가 소현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눈을 꼭 감은 그녀의 입술에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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