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마신의 파편을 없애라는 건가? 진정한 마신이 되어서?”
“맞아. 너무 뻔했나?”
“네 목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 마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달라…….”
키에리 라비에스의 요구에 블라드 유진은 고민에 잠겼다.
그녀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다.
마신의 권능을 이양받지 못했다면, 대천사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체내로 파고든 신성력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더라도 이미 늦은 뒤였겠지.’
격이 높은 존재의 말은 그만한 힘을 가지는 법.
한낱 인간도 아니고, 약속을 그냥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득 키에리가 권능을 전해 주며 덧붙였던 말이 떠올랐다.
“거절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요구니 말이야. 게다가 시도 자체가 어마어마한 모험이기도 했고.”
마신의 권능을 유진의 체내로 밀어 넣는 건 상당한 무리수였다.
적합한 신체라고 해도 강력한 힘에 피의 권능이 흔들려 그가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긴 했지만.
그녀는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대마궁이라는 위험 요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긴 해도 급한 불은 껐으니까.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이쪽도 세계의 존속과 내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 대답을 하리라고 생각하긴 했어. 애초부터 선택권을 줬으니, 원망하지도 않아.”
키에리 라비에스는 순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괜찮다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런데 유진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일견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미궁 출입구를 왜 무기로 칭칭 감아 둔 거지?”
“아, 이게 너한테는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군.”
“해답?”
“내가 마신이 되어 마계를 통치하지 않는 대신, 확실한 억제기를 박아 주지.”
“오! 그게 뭔데?”
검지로 자신을 가리킨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
“네가 대마궁을 계속 감시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래.”
“어떻게?”
“그야 이렇게 하는 거지.”
키에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블라드 유진은 녹턴의 갈기를 살짝 잡아당겼다.
“이히히힝!”
화르륵! 그그그그긍!
유령 군마의 전신에 불길이 치솟는 순간, 대마궁의 출입구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애초에 그리 무거운 물건이 아니라서, 녹턴이 끌고 날아가는 속도는 상당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공중으로 솟구친 그녀는 입을 쩍 벌린 채 멀어지는 지면을 돌아보았다.
“설마 너……. 대마궁을 우주 공간으로 던져 버리려는 건가?”
“아니? 애초에 감시하겠다고 했지, 이걸 무용지물로 만들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럼 뭐하러 이걸 들어 옮겨?”
“내 집 주변에 놓고 감시하려고.”
“엥?”
키에리 라비에스의 의문은 그리 오래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중국을 가로질러 날아간 녹턴이 빙글빙글 맴을 돌더니, 적당한 곳에 대마궁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미궁이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은 바로, 북한의 한복판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평양 남쪽의 맹지.
개성 전선에서 직선으로 130km가량 떨어진 지역이었다.
한국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으나, 마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적절한 거리였다.
“이걸 끝까지 이용하겠다는 건가? 정말 놀랍군. 역시 마신의 권능을 담은 그릇다워.”
“낯간지러운 아부는 그만하고. 이제 너도 제 갈 길 가.”
유진은 대마궁의 출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 이상 키에리가 지구에서 할 일은 없었다.
수천 년을 수색했으면, 지구에서는 더 이상 마신의 권능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차라리 엘칸 차원을 뒤지는 게 나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마계나 엘칸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싫은데? 나도 너처럼 여기가 좋아.”
* * *
[속보입니다. 블라드 유진이 중국의 대마궁마저도 단신으로 깨부수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옛 북한 지역 평양에 새로운 대규모 미궁이 관측되었다는…….]
[드디어 세계 최고의 헌터 블라드 유진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헌터 협회 관계자는 최선을 다해서 단기 계약을 추진하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변형신 기자 연결합니다.]
[대마궁 궤멸 이후, 미궁 성장 사태가 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전선이 활기를 되찾는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가톨릭의 위신이 추락한다는 말 들어 보셨나요? 힐러들의 힘이 약해지고, 성자회의 자비단이 해체한 것이 원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마신의 파편 후퇴와 대마궁의 평양 이전은 그야말로 대격변을 일으켰다.
전 세계적인 마기의 농도가 미궁 성장 사건 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미궁을 몰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전히 블라드 유진에게는 각국의 러브 콜이 쇄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명세의 당사자는 본인의 저택에서 유유자적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뉴스에 죄다 네 이야기뿐이로군.”
유진과 함께 TV 화면을 지켜보던 키에리는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후예가 인간들에게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야 당연하지. 아마 마계에서도 나에 관한 내용만 떠들고 있을걸?”
씁쓸하고 차가운 액체가 넘어가는 느낌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편견이 거의 없는 블라드 유진은 아이스 커피도 간혹 즐겼다.
커피에 진심인 이탈리아 놈들이 봤다면 기겁할 만한 장면이었다.
물론 거긴 커피가 사치품으로 치부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지만.
TV에 집중하던 그는 문득 키에리 라비에스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재료도 없는 지구에서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
“필요하면 마계에 다녀오라니까?”
“아, 걔들한테 내 위치 들키는 건 싫다고.”
“그럼 엔세데스에게 사든지.”
“그 드래곤 녀석은 집에 붙어 있지도 않잖아?”
“그건 그렇네.”
현재 유진은 저택에 방을 내주는 대가로 키에리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한 상태였다.
바로 지중해의 사르데냐섬과 미국의 버지니아주, 그의 저택을 잇는 공간 이동 제단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원에 기초만 다져놓고, 재료가 없다며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일이 끝나면 떠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 모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키에리를 내쫓을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물론 그녀를 배척하는 인물이 이 집에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아줌마 왜 자꾸 여기 있어?
“어머! 아줌마라니, 나랑 나이 차도 별로 안 나지 않나?”
―흥! 그래도 나보다 많은 건 사실이잖아. 주인! 이거 치워 줘!
레니는 지난번의 키스 사건 이후로 키에리 라비에스를 극도로 싫어했다.
순서를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들이댔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직 그 순서가 어떤 식으로 정해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내쫓지 않을 테니, 얼른 완성이나 해줘. 할 일이 좀 많아서 말이야.”
“사실 이미 완공은 끝났어. 발동만 안 했을 뿐이지.”
“그래? 그거 잘 됐군. 그럼 시범 운행 좀 해 보자고.”
“……진짜 필요 없다고 안 내쫓을 거지?”
“날 뭐로 보고? 어차피 방 많으니까 머무는 건 신경 쓰지 마.”
“얘가 좀 불안한데.”
“레니도 시간이 지나면 받아들일 거야.”
“그렇다면야.”
정원으로 나간 키에리는 곧장 제단에 마기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기하학적인 문양이 들어간 바위가 진동하며 보라색 빛무리를 쏟아냈다.
번―쩍!
“작동 방법은 간단해. 왼쪽은 사르데냐섬, 오른쪽은 버지니아주야.”
“마기를 주입하는 방식인가?”
“그래. 좀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네가 원리를 알아야 해. 나중에 가르쳐 줄 수도 있고.”
“좋아. 원한다면 대가를 지급하고 배우지.”
“지금 바로 갈 거야?”
“거기 상황이 어떤지 좀 확인해야 해서. 녹턴을 타고 다니기에는 멀잖아. 그리고…….”
블라드 유진은 문득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마궁을 평양에 갖다 놓았기에, 뭔가 변화가 있다면 서울에서 금방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나중에는 그곳에도 공간 이동 제단을 만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갈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문득 저택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DK가 조낙범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긴급 보고입니다. 폐하!”
DK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장난스럽게 인사했다.
피식 미소를 지은 유진은 조 변호사에게 눈길을 보냈다.
조낙범과 함께 올 때면, DK가 보고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기 계약 건과 림일국 씨 허가 건입니다.”
“읊어 봐.”
“황해남도 토벌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더불어 휴게 공간 제공 허가가 나서 림일국 씨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아. 그대로 진행해. 계약 조건은 자네가 알아서 하고.”
“예, 알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접은 조 변호사가 물러나자, DK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끝이에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자잘한 건은 알아서 처리해야지.”
“뭐 그건 그렇죠. 그런데 어디 가시나 보죠?”
“아! 마침 잘 왔군. 너도 따라와.”
“예?”
“일손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뭐 이상한 건 아니죠?”
“응. 건설이야.”
“……저 고급 인력입니다만.”
“네 분신은 그리 고급 인력이 아니지.”
블라드 유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DK와 함께 공간 이동 제단에 올라섰다.
마기를 주입하자, 강렬한 빛무리가 주변을 감쌌다.
이윽고 일행은 따뜻하고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부는 지중해로 이동해 있었다.
“어? 유진 님?”
“이건 미국하고 연결된 건데? 한국에 계시지 않았나요?”
공간 이동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루시아와 전시영이었다.
루시아는 얼른 무전을 보내서 섬 곳곳에 흩어져 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그들은, 유진이 왔다는 소식에 제단 근처로 모여들었다.
전시영부터 다이애나 로즈, 루시아, 엔세데스, 태구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드디어 완공되었나 보네요?”
“그래. 이제 언제든 와 볼 수 있어.”
“그래요. 주인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어야죠. 섬의 주인이 된 걸 축하드립니다. 아마 이만한 땅을 혼자 보유하신 분은 유진 님이 유일할 거예요. 자, 이쪽으로 와 보세요.”
다이애나는 밝은 얼굴로 그간 자신들이 일군 것들을 소개해 주었다.
마기가 축소된 덕분에 그녀는 미국의 전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공간 이동 제단의 기능에 힘입어 미국과 유럽 모두가 영토 수복이 착착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의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전시영과 루시아도 본국의 일과 상관없이 이곳에 와 있어도 괜찮았으니까.
섬 관광이 끝난 이후, 엔세데스는 블라드 유진에게 장난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뭐라고 불러 드릴까? 국왕 폐하?”
사르데냐섬 전역이 그의 사유지가 되었으니,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세워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제3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왕왕 발생하기도 했고.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호칭이로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