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번―쩍!
강렬한 빛무리와 함께 공간 이동 제단이 대뜸 작동을 시작했다.
블라드 유진은 쏟아지는 보라색 기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편, 마즈단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스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뭐가?”
“다음번 분화 매개체 보급은 며칠 후에 예정되어 있을 텐데요.”
“그럼 정기적 공간 이동이 아니란 말이로군?”
“아무래도 차원을 넘나드는 기물이다 보니, 연속으로 사용하면 고장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정해진 일정대로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좀 기다려 보면 누가 오는지 알게 되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절차를 무시하는 거로 보아, 아마도 저보다 직위가 높은 분일 겁니다.”
“두려울 게 뭐가 있나. 여기선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해.”
그가 마신의 파편을 돌아보며 말하자, 극열공은 이해했다는 듯이 크게 주억거렸다.
현재 대마궁에 있는 마신의 권능은 거의 8할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기서 융합 반응이라도 일어나면, 어느 차원이든 그건 재앙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천주가 오더라도 이 공간에서는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가 없다는 말이 되지.’
이윽고 공간 이동 반응이 잦아들며 제단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슈우우우! 척!
언뜻 보기에 상대는 매우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일반적인 최상급 마족과 외형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
하지만 주변에 휘몰아치는 마기와 묘한 분위기가 그자에게 특별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저걸……. 다시 옮겼어?”
남자는 황금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마신의 파편을 응시했다.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아하니, 상당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마계의 모든 귀족이 모여서 간신히 옮긴 거였는데, 원상 복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미르센 폐하를 뵙습니다.”
마즈단은 상대를 보자마자 극진한 예를 취했다.
파괴의 괴수 격평왕 아미르센.
엘칸 차원과 지구 침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마왕이었다.
휘하에 극열공을 두고 루드벨과 칼트록스, 천즈한 등을 거느린 존재.
그자에게는 마신의 파편이 후퇴한 것 자체가 불쾌하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아미르센은 스산한 눈빛으로 블라드 유진과 마즈단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고하라.”
“예.”
극열공은 그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곧장 방금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했다.
파멸의 권능으로 마신의 파편을 옮겼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아미르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걸 도로 옮겨 놓다니! 네놈……. 돌아 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찌리릿―!
격평왕이 분노를 터트리자,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확실히 상대가 뿜어내는 기세는 가공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마왕과 동급인 대천사를 연속으로 셋이나 거꾸러뜨린 전적이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서는 암자색 기운이 줄기줄기 풀려 나오는 중이었다.
“내가 했는데, 불만 있나?”
“으음…….”
마즈단이 블라드 유진의 권능을 느낀 것처럼 아미르센 또한 똑같은 반응이었다.
파멸의 권능이 내뿜는 힘은 그야말로 초월적이었으니까.
쿠구구구구!
그런데 문득 마신의 파편이 제단 방향으로 움찔거리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파멸의 권능에 반응하여 한 번 더 당겨지려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아미르센이 양손을 쫙 펼쳐 보이며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일단 진정해 봐.”
“왜? 마신의 파편이 저 공간 이동 제단에 처박힐까 봐 두렵나? 마계로 끌려 들어가서 융합 반응을 일으키기라도 할까 싶어서?”
“…….”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격평왕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영 자존심이 상하는 처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이 파멸의 권능을 한껏 더 끌어 올리며 말하자, 급하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마신의 파편이 더욱 큰 움직임을 보였으니까.
쿠구구구구!
“인정해, 안 해?”
“이, 인정한다! 그러니까 좀 멈춰!”
“마음에 드는 대답이로군.”
뚝.
파멸의 권능을 해제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마궁의 내부가 조용해졌다.
방금까지는 마신의 파편이 거동하며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휴!”
아미르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윽고 놈은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제단을 내려왔다.
“정말로 장난 없는 성격이로군. 마신의 파편에 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한데, 저러는 이유가 뭐지?”
“위치가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너무 가까우면, 저쪽 세계가 무너지거든.”
“마기가 많아지는 게 당신에게도 더 좋지 않나?”
“아니, 난 얼마 전이 딱 좋았어. 이 정도 거리가 적합하겠더군.”
“흠……. 이러면 우리한테 좀 손해인데.”
마계는 수천 년 전에 키에리 라비에스를 파견하면서부터 지구 정복을 꿈꿔 왔다.
마기를 생산하기에 상당히 적합한 자연환경이었으니까.
키에리는 소모되는 마기를 이유로 반전(反戰)을 주장해 왔지만, 마계에서도 얻는 게 없지는 않았다.
미궁이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음으로써 거두어 가는 에너지도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엘칸 차원보다는 훨씬 이득이었다.
그런데 그걸 상당 부분 포기하라니, 칼자루를 쥔 쪽이 유진이라지만 이건 선을 넘는 처사였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아미르센은 솔깃한 기분이 들었다.
“천상계의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니 아예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야.”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놈들은 오래전부터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텐데.”
“대천사들을 죽이고, 차원문을 끊어 버렸거든.”
“아아……. 놈들은 몰랐겠구나. 네가 마신의 권능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손쉽게 대천사들을 처치할 수 있었지. 어쨌거나 균형을 맞추려면, 너희도 한발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무슨 엘칸 차원의 드래곤처럼 말하는군.”
“말했잖아. 내가 딱 좋아하는 수준이라니까?”
“크음…….”
격평왕은 불만 섞인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마계의 입장에서는 얼른 지구를 집어삼키는 게 이득이었다.
천주의 영향력이 줄어든 지금이 가장 큰 기회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마신의 권능을 3할이나 보유한 눈앞의 존재가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마왕조차도 감히 손대기 힘들었던 권능을 어떻게 흡수했는지, 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리도 없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상대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블라드 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격평왕 아미르센, 네게 사안의 전권이 있나?”
“물론이다. 준비를 반반씩 하긴 했지만, 괴륜왕 바르뎀도 내 결정에 동의할 거다. 그놈은 지금 박살 난 휘하 귀족들을 추스르느라 정신없기도 하니까.”
괴륜왕(怪倫王) 바르뎀은 멸사공 사르판과 페드로, 샤르마, 퍼핏, 게일드 등을 이끌던 마왕이었다.
페드로를 제외한 전원이 유진에게 목숨을 잃은 상태라, 귀족 양성에 힘을 쏟는 중이었다.
물론 멸진부와 함께 혼자만 살아 돌아온 페드로 또한 실각해서, 외부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사실상 격평왕뿐.
유진은 상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미르센이 문득 황금빛 마기를 뿜어내며 불쾌한 마음을 토로했다.
“설마 네놈! 결판을 볼 속셈이냐?”
“그럴 의도였으면, 이미 마계로 진입했지. 따지자면 내가 절대자 아닌가?”
“아…….”
현재 자유자재로 활용 가능한 마신의 권능은 그가 지닌 3할뿐이었다.
그 말인즉, 마계에서 블라드 유진이 최강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물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만, 마왕들이 힘을 합쳐도 쉽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키에리 라비에스는 연락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불가침을 맺자고 하지는 않겠다. 그냥 적당히 해 먹으라고만 일러두고 싶군.”
“좋아. 그렇게 하지.”
“그리고 하나 더.”
“또 뭐가 남았나? 마왕 이상의 계약은 언령이면 충분한데.”
“이건 그냥 부수적인 거다. 난 이 대마궁을 이전(移轉)시킬 작정이거든.”
“갑자기 이걸 옮긴다고?”
“청해성은 내 집하고 좀 멀거든. 근처에 두고 지켜볼 거다.”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건가?”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야. 그러니까……. 괜히 피해 보고 싶지 않으면, 미리 좀 비워 두라는 의미지.”
유진은 마신의 파편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미르센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에 뜻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전의 여파로 타격을 입기 전에 잠시 철수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격평왕은 마즈단에게 명령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돌아갈 준비를 해라.”
“예, 폐하!”
“후우! 이거 영 모양 깨지는군.”
* * *
번―쩍!
공간 이동 제단을 통해 마족들이 돌아간 이후, 유진은 대마궁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거대한 검은색 육각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무게가 꽤 나가 보였지만, 의외로 미궁 자체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단지 접촉한 물질이 엄청난 힘에 분쇄되어서 옮기기 어려울 뿐.
하지만 블라드 유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녹턴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끌고 갈 수 있으니까.
“좀 억제할 필요성이 있긴 하겠군.”
내부에 마신의 파편이 있다 보니, 뿜어지는 마기가 상당히 거셌다.
아무래도 이러면 녹턴의 비행에 방해가 될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그의 권능으로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푸르르르!”
두두두두두!
녹턴은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육각 기둥의 꼭대기에서 대기했다.
그러는 동안, 레니는 델레오 아르마를 펼쳐서 미궁을 꽁꽁 싸맸다.
이대로 유령 군마에 달기만 하면, 대마궁 이전 준비는 끝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그의 근처로 낯선 인기척이 있었다.
“결국에 이렇게 되네.”
“키에리인가.”
“분위기를 좀 바꿔 봤는데, 어때?”
“고전적이군.”
블라드 유진의 근처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키에리 라비에스였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연청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보라색 리본을 달고 있었다.
원단은 현대의 것이지만, 스타일은 중세 귀부인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키에리는 입술을 삐죽이며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을 어루만졌다.
“네 취향일 거 같았는데. 너무 과거로 회귀했나?”
“현대 문물을 워낙 많이 접해서.”
“좀 알아보고 해 볼 걸 그랬네. 이거 구한다고 고생깨나 했는데.”
“한데, 여긴 어쩐 일로?”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네 목숨을 살려 주고, 마신의 권능을 넘겨준 대가.”
키에리 라비에스는 최후의 순간에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고 했다.
아직 마계의 침공 의지는 여전했지만, 전쟁은 사실상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마신의 권능을 얻은 유진은 마계에서도 건드리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따지자면, 지금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적기기는 했다.
가만히 키에리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들어나 보지.”
“간단해. 나머지 2할을 찾아올 테니, 융합을 부탁해.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