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23화 (224/226)

23화

“극도의 정순함과 특유의 파장! 이건 마신의 권능임이 틀림없다.”

블라드 유진의 앞에 선 마즈단은 짤막한 양손을 번쩍 쳐들고 있었다.

그러자 루드벨콰 칼트록스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지금 지구에 남은 마계 최후의 보루를 뒤에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저 대마궁이 무너지면, 마족들은 지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진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왔던 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적수의 정통성을 인정해 버리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 극열공 전하, 저자는 근본조차 확인할 수 없는 지구의 뱀파이어입니다. 그러니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루드벨은 최대한 완곡하게 마즈단을 타이르려 했다.

선을 넘지 않으려고 염두를 열심히 굴린 결과였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거로 극열공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아니, 확실하다.”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원로회에서도 문제 삼을 겁니다.”

“후후! 원로회의 겁쟁이들은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리고 네놈……. 언제부터 내 결정에 토를 달았지?”

“죄, 죄송합니다.”

마즈단이 시뻘건 안광을 발하며 돌아보자, 루드벨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극열공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앞에 부복했다.

“귀인이시여. 절대자의 권능을 어떻게 얻었는지, 이 미천한 놈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간단해. 키에리 라비에스로부터 전달받았지.”

대천사들이 들이친 절체절명의 순간.

공간 이동 제단 앞에서 그는 키에리의 도움을 받았다.

파멸의 권능을 주입받음으로써 체내의 신성력을 완전히 날려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블라드 유진은 대천사들을 깡그리 몰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에 의문점이 남는 건 사실이었다.

대천사는 마왕과 동급의 존재.

마왕인 키에리 라비에스로에게 받은 권능으로 대천사 셋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어려운 일을 단신으로 해냈다.

피의 권능과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 거라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대천사들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마신의 권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에 불과했지만.’

사실상 현재 블라드 유진의 그릇으로 마신의 권능 전부를 수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키에리조차도 흡수하지 못하고, 따로 보관만 해 둘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원래는 마신의 권능을 전해 줄 마음이 없었다고 했던가.’

그녀는 자신의 힘 일부만 이전해 주고, 전투를 도우려 했다.

그가 회복하여 수코의 인장을 사용하면, 대천사와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키에리 라비에스는 유진을 보자마자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의 육신이 마신의 권능을 받아들이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뇨. 저는 당신의 말을 믿는 게 아닙니다. 제 판단을 신뢰할 뿐이죠.”

마즈단은 확신에 찬 눈으로 블라드 유진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뚱뚱한 몸을 빙글 돌렸다.

“대마궁을 봐야겠다고 하셨지요? 이쪽입니다.”

* * *

마즈단의 협조 덕분에 블라드 유진은 대마궁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대규모 미궁답게, 내부의 마기 농도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마족들은 입구 쪽에서만 돌아다녔고, 중심부에는 백작급 이상만 통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저도요?”

그의 명령에 DK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마궁의 입구에는 최상급 마족들이 우글거렸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유진 없이 이곳에 있다간 왠지 뼈와 살이 분리될 것만 같았다.

“궁금하면 따라오든지. 넌 마기가 없으니까 좀 더 버틸 수 있겠지만, 아마…….”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겠습니다.”

“레니도 가만히 있는데, 호들갑은.”

“대부님, 얘가 좀 귀엽게 생겼어도 이제 저보다 세거든요?”

“아, 그랬지. 그러게. 시가 좀 작작 피우지. 그러니까 이렇게 노안이 됐잖아.”

“……쩝.”

그가 툭 내던진 말에 녀석은 입맛을 다시며 괜히 뺨을 문질렀다.

잦은 변장과 과로로 인해 얼굴이 상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게 다 당신 때문 아니냐며 대들 수는 없었다.

이윽고 유진은 마즈단과 함께 대마궁의 중심부로 이동했다.

강력한 마기가 잔뜩 응축된 그곳에는 사람 형상의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저건…….”

“모든 마기의 근원이자, 권능의 중심. 마신이십니다.”

극열공의 설명을 들으며 유심히 살펴보자, 새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포착되었다.

마신은 눈을 꼭 감은 채, 연신 마기를 쏟아 내기만 할 뿐이었다.

“잠든 건가?”

“마신께서는 카이넬과의 싸움으로 사분오열되셨습니다. 이곳에 계신 건 그중에서 가장 큰 존재. 하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날 이곳으로 인도한 건 마신의 권능을 합치기 위함이었나?”

“아닙니다. 어떤 변혁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듭니까요.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그런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가 궁금하군.”

“되레 마계에 큰 타격이 있었죠. 엘칸의 종자들을 잠식하던 중이었는데, 계획을 전면 철회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마신의 권능을 융합하는 방법이 따로 있나 보네.”

“예, 그렇습니다. 일단 그러려면 흩어진 권능의 조각을 모두 모아야 합니다. 한데, 현실적으로 그건 어려운 일이지요.”

“어쨌거나 함정은 아니라는 소리로군?”

“물론입니다. 원하는 대로 대마궁을 보여 드렸으니, 이제 방문 목적을 밝혀 주시지요.”

마즈단의 요청에 유진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기실 그는 마신이 대마궁에 잠들어 있다는 내용을 알고 있었다.

키에리 라비에스가 알려 주었으니까.

다소 의외였던 건 극열공 마즈단의 태도였다.

블라드 유진은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이토록 우호적이라니 말이다.

생각보다 파멸의 권능이 지닌 힘이 더 대단한 것 같았다.

“이유라……. 별거 없어. 그냥 여길 적당히 조절하러 왔을 뿐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마신의 위치가 너무 가까워. 이거 너희들이 옮겨 놓은 거지?”

“그, 그렇습니다만.”

“듣기로는 옮기기가 쉽지 않다던데?”

“마계 깊숙한 곳에 있던 지고한 존재를 모셔 오느라, 귀족들이 모두 동원되었습니다. 한데, 제가 듣기로는 불가침을 맺었다고…….”

“그랬지. 거슬리지만 않으면, 귀족들은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야.”

블라드 유진의 말에 극열공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의 성 작전 때, 위치 선정을 잘못하여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던가.

서울이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이었다면, 그가 개입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계와 유진의 관계가 이토록 흔들리지도 않았을 거고.

“하지만 지구가 마계처럼 되는 것 또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지.”

“거리를 두시려는 겁니까?”

“균형을 맞추는 절차 정도가 알맞은 표현이겠군.”

천주를 쫓아냄으로써 천상계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폭 줄어들었다.

반면에 마계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강한 마기를 투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원흉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마신의 파편.

이 거대한 존재가 너무도 가까웠기에, 지구는 급속도로 마계화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지고한 존재를 옮기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마왕 폐하까지 나오셔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내게 다 방법이 있다.”

그는 마신의 파편을 지나쳐 대마궁의 안쪽으로 쭉쭉 걸어 들어갔다.

마즈단이 함께다 보니, 그런 블라드 유진의 앞길을 막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농축된 마기가 미치지 않는 곳에 가서도 마족들의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자……. 블라드 유진 아닌가?”

“극열공 전하와 함께 있군.”

“적인데, 대체 왜 같이 계시는 거지? 쳐야 하나?”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괜히 건드렸다가 경을 칠 것 같다. 난 단념하겠어.”

“그래. 명령이 떨어진 것도 아니니.”

최상급 마족들은 그의 근처로 다가오지 않고, 저 멀리 빙 둘러 다녔다.

극열공의 존재뿐만 아니라, 유진에게서 막강한 권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파멸의 권능은 마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참 안으로 들어가자, 지평선 끝에 거대한 보랏빛 제단이 보였다.

사르데냐섬에 설치된 것과 비슷한 형태.

그것이 번쩍일 때마다 마족들이 커다란 검은 덩어리를 갖고 나왔다.

“저건 뭐지?”

“아, 분화 매개체입니다. 대성체 미궁의 보스가 든 알이라고 하는 게 알맞겠군요.”

“몬스터가 분열하는 게 아니라, 소환되는 형식이었군.”

“그렇습니다.”

“원래는 어디쯤 있었지?”

“출입구보다는 제단에 훨씬 가까웠습니다.”

“좋아. 이제 좀 떨어져서 기다려.”

“네.”

손짓으로 마즈단을 보낸 그는 입구 쪽의 시커먼 기운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양손을 모으자, 암자색 빛무리와 함께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파멸의 권능’이 발동되었습니다.]

[근처에 마신의 파편이 있어, 융합을 시도합니다.]

[주의! 권능 융합은 극도의 위험성을 동반합니다. 확신이 있을 때만 시도하십시오.]

쿠구구구구!

파멸의 권능을 풀어 놓자, 마신의 파편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

대마궁의 출입구로 향하던 거대한 마기의 흐름이 역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 킬로미터 크기의 농축된 마기가 이동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현상은 놀라운 볼거리가 생긴 것에 그치지 않았다.

“마신께서 이동한다! 피해!”

“저기 빨려 들어가면, 완벽하게 분해될 거야!”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최상급 마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극열공 또한 불안한 눈빛으로 마신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괜히 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자신 또한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으음.”

“너도 웬만하면 물러나지?”

“혹시나 귀인께서 위험할까 싶어서…….”

“됐으니까 가.”

“예, 알겠습니다.”

우물쭈물하던 마즈단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기의 덩어리는 마치 거대한 공처럼 유진을 향해서 굴러오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융합되어 버릴 거다. 적절한 순간에 끊어야 해.’

현재 지닌 권능의 크기는 그보다 소녀 형상의 마신이 훨씬 컸다.

따지자면 저쪽이 대략 5할, 블라드 유진이 3할 정도.

아마 권능 융합이 개시되면, 갈려 나가는 쪽은 그가 될 터였다.

진정으로 마신의 권능을 손에 넣고 싶다면, 나머지 파편까지 모두 얻은 상태에서 시도해야 했다.

하지만 유진이 원하는 건 마신과의 융합이 아니었다.

‘지금!’

마기 덩어리의 중심부가 원하는 위치에 들어온 순간, 그는 파멸의 권능을 해제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둘 사이에 존재했던 강렬한 척력이 끊어지며 일진광풍이 불어왔다.

투우우웅―!

그 충격파가 어찌나 강했던지, 블라드 유진은 마계로 통하는 공간 이동 제단 앞까지 튕겨 나갔다.

콰가가각!

두 개의 긴 고랑을 그리며 중심을 잡은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지할 수 있었다.

‘후우! 생각보다 정확한 위치로군.’

마신의 파편은 대마궁의 출입구와 공간 이동 제단의 3분의 2 지점에서 멈췄다.

지구보다는 마계에 더 가까워진 탓에, 미궁 성장이 확연히 저해되었을 것이다.

이제 대마궁에서 할 일은 끝났다.

아마 마계 놈들이 용을 쓴다 해도 다시 마신의 파편을 옮기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어디론가 사라진 2할 남짓의 권능을 찾지 않는 이상.

‘키에리가 거짓부렁을 하지는 않았군.’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마신을 바라보던 유진은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뒤에서 강렬한 에너지 반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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