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대마궁은 중국 청해성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사이에 있는 대규모 미궁의 이름이었다.
초창기부터 있었던 4대 미궁 중 하나로, 반경 수천 킬로미터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물론 미궁 성장 사태가 벌어진 현재에도 마기 장악 현상은 그대로 이어지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주변의 미궁들을 마구 잡아먹는다는 정보가 나돌았다.
위성 사진으로 관측해 보니, 범위가 더 넓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직접 확인해 본 사실은 아니었다.
위구르는 진작에 멸절한 지 오래였고, 청해성도 절반 이상이 오염 지대가 되었으니까.
지금도 간신히 막는 중인데, 대마궁의 확장 현상을 조사해 볼 미친 인간은 없었다.
딱 한 명.
세계 최강의 헌터, 블라드 유진만 빼고.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죠. 대부님.”
“뭐지?”
“전 여기 왜 왔나요?”
DK는 불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 녀석은 줄곧 유진과 함께였다.
바티칸 시국에 쳐들어가 천주를 천상계로 날려 버린 이후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DK를 데리고 기어코 청해성까지 날아온 상태였다.
이번에는 녹턴과 이어진 줄 하나에 의지하여 미친 비행을 하진 않았으나, 걱정스럽긴 매한가지.
일행의 목적지가 최강의 대규모 미궁인 대마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듣자 하니, 거긴 마족들이 장악한 마계의 핵심 시설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적진으로 직진하는 상황.
천주의 강력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본 DK는 불편한 표정으로 꼼지락거렸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녀석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편하니까.”
“어차피 입국이야 정식 절차를 밟았어도 됐잖아요. 대부님의 위명이 있는데.”
“하지만 네가 있으면, 몰래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지. 적진으로 들어가는데, 굳이 다 알리고 갈 필요 있나?”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할 수가 없네요.”
“명령인데, 거역하려고?”
“그, 그럴 리가요. 저의 자그마한 소망을 살포시 전달할 뿐이죠.”
“요즘 좀 수상해? 지켜보겠어.”
“크흠흠!”
그에게 불만을 피력하다가 한 소리 들은 녀석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사실 유진이 이 DK를 데려온 건 천즈한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내에서 시비를 걸어 대면, 상당히 귀찮아질 테니까.
그렇다고 정식 절차를 밟자니, 마족들이 대마궁에서 하는 짓거리를 숨겨 버릴 것 같았다.
다 이유가 있어서 이 얍삽한 녀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레니는 그런 DK의 옷깃을 붙잡으며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바보.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가는데.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동생들이 가르쳐 줘. 걔네도 생각보다 꽤 재밌어.
그녀가 지칭하는 동생들이란 전시영이나 루시아, 다이애나 등의 S급 헌터들이 아니었다.
쿠르단을 비롯한 뱀파이어 무리였다.
지구에서 꽤 오랫동안 떠돌며 정보를 수집했기에, 인간들의 언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레니가 관심을 가질 만한 온갖 종류의 이야깃거리를 풀어 놓았다.
종족은 다르지만 같은 주인을 모시고 마기도 다뤘으니, 나름 공통점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뱀파이어들과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DK에게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 눈빛 좀 거두면 안 되냐? 다시 하수인 계약 했다고.”
―언제 또 풀릴지 몰라.
“이제 천주고 대천사고 다 박살 났는데, 그게 되겠냐?”
―흥!
녀석은 얘 좀 보라는 표정으로 블라드 유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마기의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육각 기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다 왔으니, 이제 그만들 해.”
―웅.
“옙.”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웅다웅하던 DK와 레니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치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매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척! 척! 척!
대마궁 근처에 도달하자, 전방에서 웬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군대가 제식 동작으로 발맞춰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마기의 구름을 뚫고 나온 존재들이 일행의 앞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시커먼 기운에 휩싸인 근육질의 거한.
생김새가 마계와 연결된 미궁에서 보았던 최상급 마족이 분명했다.
“무력시위라도 하는 건가?”
블라드 유진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마족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나? 그저 저렇게 훈련되었을 뿐.”
그자는 미국의 대규모 미궁, 실렌스 테라 앞에서 보았던 마족 루드벨이었다.
슬쩍 마족들의 뒤편을 살펴보니, 초임 백작 칼트록스 또한 이 자리에 있었다.
극열공 마즈단을 섬기는 마족들은 미국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블라드 유진의 관심을 유럽으로 끌어서 한동안 대마궁을 지켜 낸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유럽에서의 일이 빨리 끝나 버렸다.
대천사가 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 꿇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번보다 오늘은 더욱 곤란한 기색이었다.
감정을 최대한 감췄지만, 유진의 눈썰미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약속과는 다르군. 대마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귀찮아서였지. 유럽이 좀 더 급박하기도 했고.”
“하긴 대천사가 강림했으니 어련할까.”
“과연 그놈들뿐이었을까?”
“그럼?”
“뒷이야기는 상상에 맡기지. 그나저나 슬슬 비켜 줘야겠군. 네놈들이 여기서 뭔 짓거리를 하는지 좀 봐야겠는데 말이야.”
“…….”
그의 마지막 말에 루드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머리로는 당장 공격 명령을 내려서 눈앞의 뱀파이어 로드를 처단해야 정상이었다.
아직 대계는 진행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계에서도 블라드 유진이 대천사들을 쓸어버렸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대천사는 마왕급에 해당하는 존재.
그런 무지막지한 이들을 고작 지구의 뱀파이어일 뿐인 그가 처치했다?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마계의 절대자인 마신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여긴 우리의 본진이나 마찬가지다. 적인 네게 내줄 수는 없지.”
“그럼 간단하군. 싸우는 수밖에.”
츠츠츠츠츠!
유진은 암자색 기운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검을 허공에서 뽑아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압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압도적인 힘을 느낀 루드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벨트에 걸린 워해머를 뽑아 들어 보았으나,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는 없었다.
싸우면 무조건 진다.
이 생각이 녀석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줘야겠군. 네놈들이 헛된 꿈을 꾸지 않게 하려면 말이야.”
“……그게 뭐지?”
“나는 키에리 라비에스로부터 권능을 전달받았다. 그녀의 정식 후계자가 된 셈이지.”
“뭐, 뭐라?”
블라드 유진의 폭탄선언에 루드벨을 비롯한 마족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칼트록스는 물론이고 줄지어 서 있던 최상급 마족들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종된 마왕의 이름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키에리의 권능을 이어받았다니.
더더욱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럴 수는 없다. 그분께서는 오래전 마계에서 자취를 감추셨는데…….”
“지구로 넘어왔으니, 마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수밖에. 간단한 유추 아닌가?”
“그런 억측을 내가…….”
“믿어야만 할 거다. 증명은 간단하거든.”
쿠구구구구!
파멸의 권능을 운용하자, 특유의 강력한 파장이 유진의 몸을 휘감았다.
루드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마왕의 권능을 느껴 본 적이 있었으므로.
지금 그가 발하는 건 키에리 라비에스를 넘어서는 수준의 힘이었으니까.
“…….”
루드벨의 눈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마왕의 권능을 목도한 이상, 바닥에 머리를 박고 조아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지구의 뱀파이어.
그런 너절한 출신에게 고개 숙이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한데, 우물쭈물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뭐 하는 짓거리냐! 당장 놈의 목을 치지 않고!”
쿠궁!
뒤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루드벨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었는지, 놈의 눈빛이 돌변했다.
주눅이 들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곧이어 들린 유진의 음성에 루드벨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극열공 마즈단인가.”
“만난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거지?”
“그냥 반응을 보고 유추했지.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생각해 왔는데, 너희 둘은 참 거짓말을 못 해.”
“나도 예전부터 같은 생각을 했지. 네놈……. 참 재수 없다고 말이야.”
“재수는 너희들이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크음.”
루드벨은 불편한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다.
극열공 마즈단의 등장으로 기세가 오르긴 했으나, 당장 덤벼들지는 않았다.
용기만으로 이길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쿵! 쿵! 쿵!
결국에 참다못한 마즈단은 최상급 마족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마계에서도 위명이 자자한 블라드 유진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극열공은 마치 몬스터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풍선처럼 둥글둥글한 몸매에 거대한 덩치,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짧고 가늘었다.
전투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외형이었으나, 마즈단을 얕봤다간 큰코다칠 터였다.
실제로 극열공은 막강한 근접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쿵! 쿵! 쿵!
“감히 마계의 행사를 방해하려 하다니, 어둠의 권속으로서……. 엉?”
호기롭게 외치며 다가오던 마즈단은 얼빠진 소리와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유진에게 접근하면 할수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극열공은 어째서 자신의 수하들이 눈치만 보고 있었는지,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크읏! 그래 봤자, 상대는 하나다! 놈이 격평왕(擊平王) 폐하보다 강할 리는 없다. 마왕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할지니. 두려워하지 말고 쳐라!”
“으와아아!”
압력을 이겨 낸 마즈단의 외침에 루드벨과 칼트록스가 마기를 뿜어내며 마족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들은 블라드 유진의 한마디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마신의 권능을 이어받았다.”
“……!”
너무도 상식 밖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마족들은 그를 결단코 해할 수 없었다.
마계의 지배자를 어찌 건드릴 수 있겠는가.
자신들을 창조하기까지 한 존재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루드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극열공을 돌아보았다.
저딴 허풍을 자신의 주군이 믿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즈단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극열공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마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설득력이……. 있어!”
루드벨과 칼트록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주군께서 혹시 미친 거 아니냐고 눈빛으로 묻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극열공은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쿠궁!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