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21화 (222/226)

21화

“…….”

블라드 유진은 아크웰 페리티노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푹 숙이고 있던 녀석이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당신이 뭘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고! 후회도 없습니다!”

원망, 울분, 집착…….

아크웰은 다양한 감정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놈은 그와 교황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명령을 따랐으나, 갈수록 흔들렸겠지.’

오랫동안 함께한 정이나, 고난과 역경 속에서 탄생한 전우애 같은 것일 터였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역시나 감정 따윈 없으실 것 같았습니다. 절 그렇게 보내실 때부터요.”

“참 잘하는군.”

“뭘 말입니까?”

“합리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만.”

“한국에 들어간 첫날. 난 네가 김태호 추기경과 한 이야기를 들었다.”

“…….”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에 아크웰 페리티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애초부터 감시 및 제어 역할로 붙은 게 녀석이었다.

꼬박꼬박 그에 관한 정보를 교황청에 갖다 바친 것도 아크웰이고 말이다.

블라드 유진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놈의 목을 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교황청 외교관이라는 아크웰의 신분이 필요했으니까.

결국에 본래의 자리로, 목숨까지 살려서 돌려보내 주지 않았던가.

그로서는 상당한 자비를 베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다.”

“……죽이십시오.”

“그래도 이유는 알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교황청 소속이라서 죽는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럼 뭡니까?”

“효용 가치가 없어졌다는 게 더 크지. 좀 거슬리더라도 필요하다면, 죽일 이유가 없거든.”

“아…….”

잔혹한 한 마디에 녀석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스핏!

이윽고 군중을 위협하기 위해서 꺼내 들었던 소수혈인이 미약한 소리와 함께 휘둘러졌다.

뭔가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감지할 틈도 없었다.

붉은 칼날은 그대로 아크웰 페리티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 * *

[속보. 성스러운 군대가 블라드 유진에게 패배. 바티칸 시국 침탈. 힐러들에게 심각한 문제 발생.]

교황청의 군대가 박살 나고, 바티칸시국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달랑 헌터 한 명한테, 군대가 갈렸다고? 이걸 지금 우리더러 믿으라는 소리냐?”

“왜 못 해? 지난번에는 유럽 통합군도 다 터트렸잖아.”

“그건 지형과 함정을 이용한 게 컸지. 이번에는 정면 대결이었다는데?”

대략 절반의 여론은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하긴 지구에서 가장 강한 집단을 꼽으라면, 교황청이 무조건 1등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머지는 교황청과 대천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에 분개했다.

“대천사들이 강림했다던데, 왜 전선은 안 막고 블라드 유진을 죽이러 간 거야? 미쳤어?”

“맞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코앞에 닥쳐온 적은 무시하고, 왜 후방을 지켜 주는 아군을 치는 거지? 교황이 미쳤나?”

“교황은 뒈졌고, 대천사들이 사르데냐로 가자고 했대.”

“천상계 놈들은 생각이라는 게 없나?”

미궁 사태 이후, 가톨릭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효의 신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바티칸 시국에서 전체 힐러의 대부분을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신자들의 신앙심은 맹목적일 정도로 충성도가 높았다.

그러다 보니, 대천사의 강림과 교황청 장악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교황청을 장악한 놈들이 이해하기 힘든 짓거리를 되풀이했다는 거였다.

아군인 블라드 유진을 친 것뿐만 아니라, 전선에 있던 성기사와 힐러를 왕창 빼낸 조치가 그러했다.

그러다 보니, 중부 유럽은 초토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소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깐만, 힐러들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은 뭐야?”

“힐러들의 능력치가 대폭 하락했음. 회복 능력부터 시작해서 사거리까지 전반적으로 다.”

“미쳤군. 안 그래도 인원 부족한데?”

유진이 차원문을 깨부숴 천주를 쫓아낸 이후로, 신성력 스킬의 효과가 반감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나마 전선에 남아 있던 힐러들 조차도 죄다 쭉정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활동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전 세계는 만성적인 힐러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던가.

더불어 성스러운 군대가 전력의 상당 부분을 보전한 채 귀환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절차가 그렇게 깁니까? 이러다 이탈리아까지 침공당할 겁니다. 여기까지 뚫리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요한의 간곡한 요청에도 테오필로 교황은 요지부동이었다.

“일단 내부 정리부터 하는 게 순리 아니겠는가.”

“정리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이제 우리를 강제하는 대천사도 없잖습니까?”

“크흠!”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요한은 곧장 주교들을 소집하려 했다.

뜻을 모으지 못한다면, 혼자서라도 전선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바티칸의 성검은 교황 관저를 나서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의외의 인물이 불쑥 튀어나와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성격 급한 녀석이네. 좀 기다리라니까?

흑발에 새하얗고 오밀조밀한 얼굴.

주변에는 암청색 기운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블라드 유진의 충직한 수하, 최후의 다크 엘프 암살자 레니였다.

“대체 뭘 기다리라는 겁니까?”

―때.

“전선이 위태로운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니겠습니까? 당장 출발해야지요.”

척!

요한은 레니를 지나쳐 교황 관저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다시 멈춰 서고 말았다.

길게 기른 은발의 미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심장이 뜨끔 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언제 오셨습니까?”

“바로 날아왔지. 그리고…… 레니를 봤지 않나. 그럼 내가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지.”

“솔직히 너무 빨라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랬겠군.”

성스러운 군대가 복귀하는 데에는 대략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유진은 전투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바티칸 시국에 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천주뿐만 아니라, 교황청까지 완벽하게 장악이 끝난 상태였다.

주변을 휘휘 둘러본 바티칸의 성검은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다.

대천사들의 말대로라면, 블라드 유진은 악의 종자였다.

한데, 성기사들이 그를 보고도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대체 유진이 교황 관저 근처에서 왜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군요. 대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이걸 이용해 먹으려고. 극적인 순간에 딱 나서 줘야 효과가 증대되거든.”

그는 검지를 세운 팔을 느릿하게 돌렸다.

허공에 적당한 크기의 원을 두세 차례 그리자, 요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 손짓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이겼으니, 교황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극적인 순간이란 말씀은…….”

“며칠 있으면 알게 될 테니, 가서 그 잘난 군대나 준비해 둬.”

“그, 그럼 출정하는 겁니까?”

“하지만 당장은 안 돼. 좀 더 박살이 나야 하거든.”

“예?”

유진은 그 말을 남긴 채, 레니와 함께 홀연히 떠나 버렸다.

잠깐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던 바티칸의 성검은 이내 어디론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출정 준비를 해 둬야만 했으니까.

* * *

[속보. 필라흐 전선 붕괴. 유럽 통합군. 베네치아 피아베강을 기준으로 전선 재구축 중.]

[속보. 피아베강 전선 붕괴. 유럽 통합군 궤멸적 타격. 전선은 이제 포강으로 남하.]

“야이! 미친 새끼들아! 본토까지 들어왔다고! 이제 어쩔 거야?”

“이거 대천사들이 교황청을 말아먹었네. 그 이후로 아무런 움직임도 없잖아? 힐러들도 반편이가 되고.”

“크크크! 어떠냐? 이 피자 새끼들아. 본토 유린당하니까, 이제 우리 목소리가 좀 들려?”

“포강(Po R.)이 끝인 줄 알지? 페루자까지도 금방이다.”

“나라 잃기 싫으면 분발하라고. 크크크!”

이제껏 후방에서 편안하게 미궁 사태를 겪어 왔던 이탈리아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저 미궁이 코앞까지 치달아 들어온 것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수효의 난민까지.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이게 다 대천사들의 잘못된 판단이 일궈 낸 대참사라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황청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문의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속보. 블라드 유진의 명령으로 성스러운 군대 출진. 포강 전선에 합류 중.]

난데없는 뉴스가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교황청이 전선에 힘을 쏟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성기사와 힐러들의 합류는 전선에 활기를 되찾아 줄 테니까.

하지만 그 앞에 붙은 수식어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아니, 블라드 유진이라는 이름이 왜 여기서 튀어나와?”

“다른 채널 보니까 그 사람이 교황청을 장악했대.”

“진짜?”

“여기 나와 있잖아. 봐 봐.”

“와! 미쳤네. 대천사들만 죽이고 교황청의 군대는 그대로 돌려보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누구 한 대 얻어맞고도, 상대를 그냥 보내 줄 수 있는 사람?”

“난 못 해. 무조건 쥐어 패지.”

“나도 불가능.”

교황청에서 나오는 보도 자료들은 극찬으로 가득했다.

전달하는 논조는 담담하기 그지없었으나, 내용은 모든 걸 유진이 다 했다는 식이었다.

물론 그가 대천사를 썰어 버리고, 천주를 쫓아내서 교황청을 정상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명성에는 별 관심이 없던 블라드 유진이 이렇게 나왔다는 게 참 의외였다.

일각에서는 무력에 굴복한 교황청이 아부하는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전선에 나타난 요한의 발언에 비판 여론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분은 진정한 성자십니다. 그런 의미로 교황청은 기존의 ‘성자’라는 명칭을 철회하고, 성자회를 해체하기로 했습니다. 이건 유진 님만의 예칭(譽稱)으로 남겨 두려고요.”

“…….”

바티칸의 성검까지 이렇게 나오자, 사람들은 블라드 유진이 대천사를 처치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의문점은 존재했다.

“좀 멍청한 짓을 했다지만, 대천사면 우리 편 아닌가? 근데 걔들을 왜 죽여? 그리고 천사를 죽일 수나 있어?”

천사의 명줄을 끊을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연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대천사가 강림하면 전선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가 만연했으니까.

하지만 교황청에서 내놓은 자료로 인해, 그런 반론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놀랍게도 테오필로 교황이 직접 천주와 대천사의 만행을 그대로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인신 공양으로 차원을 넘으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신이 실제로는 마계 놈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으니까.

어쨌거나 성스러운 군대가 가담하자, 전선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힐러들이 약화한 터라 팍팍 미궁을 정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교황 관저의 권좌에 앉아 전황과 여론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흘러도 현상 유지 정도만 될 테니, 유럽에 도움을 주는 건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대마궁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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