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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220화 (221/226)

20화

쉬이익―! 쩌어어엉!

차원문에 끼여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던 천주는 의외로 꽤 자유롭게 움직였다.

한쪽 팔만으로도 블라드 유진의 공격을 가뿐히 막아 낸 것이다.

[마왕의 권능에 의하여 스킬이 강화됩니다.]

[현재 적용된 레벨 12,000(???).]

무려 1만 2천 레벨에 해당하는 능력치로도 그는 상대의 피부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이 강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이야.’

키에리 라비에스의 권능으로 인해 그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천주는 한 차원의 절대자이며, 마왕보다 신격이 더 높은 존재.

단순히 레벨로는 산정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권능을 갖추고 있었다.

―간지럽지도 않군. 음?

스핏―! 쩌저저정!

극강의 방어력에 천계도살검이 매번 튕겨 나가자, 유진은 곧장 공략 방법을 달리했다.

천주의 팔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난 다음 허공에 검을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제아무리 외피가 단단하다 해도 그 속살은 나약한 법.

그는 시공투절을 시전하여 공간을 뛰어넘는 공격을 펼쳤다.

한데, 푸른 불꽃과 함께 공동을 쩌렁쩌렁 울리는 충격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후후후.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놀랍게도 뚫리지 않는 피부를 건너뛰고 내부를 후벼 팠지만,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천주의 육신은 그저 안쪽에서 굉음만 냈을 뿐, 아무런 피해가 없는 듯했다.

실제로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움직여서 블라드 유진을 잡아채려 했다.

쿠콰콰콰콰! 스윽.

만약 그가 암흑화를 시전하며 피하지 않았다면, 벽면을 휩쓰는 공격에 휘말리고 말았을 것이다.

“으음…….”

천주의 팔 전체에서 이글거리는 성화에 유진은 신음을 흘렸다.

너무도 강렬한 신성력의 파장이 체내의 마기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그저 지나갔을 뿐인데도 말이다.

‘확실히 힘의 크기 차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만약 저놈과 내가 동등한 상황이었다면…….’

백이면 백, 신성한 화염에 불살라져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터.

아직 놈이 지구로 완전히 넘어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만 했다.

하지만 천주가 차원의 중간에 끼여 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은 자꾸만 짙어져 갈 것이다.

상대는 인간들의 생명을 희생시켜 어떻게든 넘어오려 할 테니까.

‘그렇다고 지금 저놈을 노리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

현재 공동 내부의 인간들을 통제하는 건 아크웰 페리티노였다.

녀석은 대천사처럼 강력한 상위 개체가 되어 신자들을 제어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차원문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일부러 신성력을 받게 된 인물들만 차원문을 넓히는 원동력으로 썼으니까.

자신의 중요성을 잘 알았는지, 아크웰은 차원문 아래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천주의 보호를 받는 위치였다.

쿠후우웅!

―잘도 도망치는군.

헛손질을 벌써 열댓 번째 하게 되자, 상대의 빛나는 머리통이 기묘한 일렁거림을 보였다.

영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부아가 치민 모양이었다.

―그럼 이건 어떠냐?

백광으로 휩싸여 있던 천주의 얼굴이 순간 주황색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빛줄기가 일자로 쭉 뻗어 나왔다.

지이이이잉!

상대가 쏘아 낸 광선은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카타콤의 오래된 벽면은 물론이고, 중간에 걸리적거리던 희생자들까지 모조리 가루가 되어서 흩어졌다.

블라드 유진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피하기만 했다.

천군압쇄를 펼쳐서 천주를 교란해 보려고도 했지만, 파괴 광선은 정확하게 그만을 따라왔다.

아무래도 상대가 신이다 보니, 이런 눈속임 따위에는 걸려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전지전능까지는 모르겠지만.

‘곤란하군. 저런 짓거리를 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어.’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미친 듯이 피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저 압도적인 적수를 거꾸러뜨릴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바티칸 시국 지하까지 함께 들어왔던 레니와 DK가 문득 떠올랐다.

슬쩍 뒤편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둘은 무사히 도망친 듯했다.

괜히 근처에 있어 봐야 걸리적거리기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크으으! 이놈의 차원문만 아니었더라면!

쿠구구구구!

파괴 광선을 쏴 대도 모조리 피해 버렸기 때문인지, 천주는 몸을 꿈틀거리며 자세를 바꾸려 했다.

퍼버버벅!

그러자 차원문이 흔들리며 희생자들의 육신이 터져 나갔다.

이전처럼 미라가 되었다가 부스러지는 게 아니라, 아예 초장부터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놀라운 광경에도 아크웰은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희생자를 데려와 앉혔다.

그러고는 신성력을 발하여 심하게 흔들리는 차원문을 서서히 안정시켰다.

그러는 동안, 그나마 편한 자세를 잡은 천주는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파괴 광선을 마구 쏘아붙였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줄기가 되어 있었다.

지이이이잉!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불규칙하게 허공을 그은 탓에, 그의 움직임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이제는 암흑화를 최고조로 운용해도 수월하게 피할 수가 없었다.

매 순간이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진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눈에 띈 것은 왠지 곤란한 듯한 아크웰 페리티노의 표정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녀석에게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시선이 가게 된 것이다.

‘뭘 걱정하는 거지?’

아직 결판이 나지는 않았으나, 승기는 천주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아니, 사실상 블라드 유진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원의 절대자는 이전까지의 적수와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아크웰은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치 뭔가를 걱정하는 듯한 모습.

그는 파괴 광선을 피하면서 녀석을 계속 힐끔거렸다.

이윽고 유진은 아크웰 페리티노가 저러는 이유를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 그거였어.”

천주가 본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그에게 고전하는 이유.

그건 단순히 차원의 틈새에 끼인 채로 빠져나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놈의 거대한 신성력이라면, 틈새가 어떻든 강제로 찢고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천주는 움직이지 않은 채, 파괴 광선만을 쏴 댔다.

조금 무리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웬만하면 큰 동작을 자제했다.

아마 팔을 길게 뻗은 이후로 희생자들이 우수수 죽어 나갔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별거 아니었군.”

―뭐라? 이 상황에서 지금 같잖은 도발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더냐? 한심한지고.

“그게 아니야. 타개법이 생각보다 간단해서 한 말이지.”

―호오? 도발이 아니라 허세였나?

“둘 다 아니다. 그저 해답을 찾았을 뿐.”

유진은 천주의 발언을 무시하며 천계도살검을 빠르게 놀렸다.

스핏―!

허공에 내질러지는 날카로운 검격.

공간을 뛰어넘어 목표의 체내를 후벼 파는 궁극의 기술.

시공투절이 펼쳐졌다.

―크하하! 또 그 잔재주더냐?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쓸 수밖에 없다니……. 네놈의 신세가 처량하구나.

그가 똑같은 기술을 시도하자, 상대는 광소를 터트렸다.

천주의 육신에 시공투절이 통하지 않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내 신세, 아니면 네 신세? 뭐가 더 나은 신세일까?”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보면 알아.”

파바바바밧!

시공투절에 의해 배달된 천계도살검은 허공에 원을 그린 빛무리를 거침없이 잘랐다.

동시다발적으로 충격을 받자, 차원문은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저 일렁이는 정도가 아니라, 꿈틀거리며 원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쿠콰콰콰콰!

블라드 유진이 노리는 건 천상계의 절대자가 아니라, 차원문 그 자체였다.

놈의 몸이 걸쳐져 있는 백색 원은 막강한 방어력을 지니지 못했을 터.

‘저놈의 몸이 쪼개지든 반대편으로 튕겨 나가든 내게는 이득이다.’

이걸 부순다면 어떻게든 그에게 유익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이, 이놈이!

차원문이 붕괴하자, 천주의 육신은 뒤로 급격하게 밀려나고 있었다.

공간이 시시각각 좁혀진 탓에 놈은 팔과 머리를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버텼다가는 각기 다른 차원에 몸뚱이가 나뉘게 생겼으니까.

“만나서 역겨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천주는 가증스러운 유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투웅―!

미약한 충격파가 퍼져 나옴을 끝으로, 차원문은 이제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척.

“후우.”

바닥에 내려선 유진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주라는 극강의 상위 개체가 사라지자, 희생자들의 면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금껏 기계처럼 명령에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저들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비참하고 의미 없는 희생을 대체 누가 하고 싶겠는가.

“너, 너 이 자식!”

“신성력을 준다고 꼬여 놓고, 이딴 곳에 오게 해?”

“죽여! 저 개종자를 죽여라!”

차원문의 원동력이 될 뻔했던 사람들은 아크웰을 향해서 분노를 표출했다.

이대로 뒀다간 녀석을 때려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으으으!”

그런데 아크웰 페리티노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던 바로 그때였다.

스이잉―!

수십 미터에 달하는 시뻘건 두 자루의 칼날이 나타나더니, 희생자들의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발걸음을 멈춘 그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어느새 아크웰과 군중의 사이에는 블라드 유진이 서 있었다.

암흑화 스킬로 한참 앞질러 간 것이다.

그는 스산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마음대로 움직이라고 했지?”

“…….”

정신 지배를 당하긴 했지만, 희생자들은 유진의 활약을 똑똑히 기억했다.

세계 최강의 헌터로 알려진 그는 천상계 절대자와의 싸움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 존재의 명을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현재 그들은 신성력을 받은 교황청 소속.

사실상 블라드 유진과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우, 우린 저자에게 속아 신성력을 받았을 뿐입니다. 교황청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어요!”

“그렇습니다! 사람을 기망하여 함정에 빠뜨린 저자를 처결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법의 심판대에라도 올리려는 겁니다.”

군중은 의견조차도 통일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아크웰을 잡아 죽이고 싶어 했고, 법률로 해결하자는 견지가 일부 존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유진이 두려워서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을 뿐이었다.

아마 아크웰 페리티노를 수중에 넣으면, 카타콤에 굴러다니는 돌로 머리를 쳐서 끝장을 내리라.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놈들의 얄팍한 헛소리를 들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닥치고 꺼져.”

스윽.

예기가 뚝뚝 흐르는 소수혈인이 앞으로 불쑥 다가오자, 군중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윽고 붉은 칼날이 뒤로 휙 물러나자,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도, 도망쳐!”

누가 봐도 무기를 휘두르려는 동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차원문이 있던 공동에서 희생자들이 사라지자, 기묘한 적막이 다가왔다.

고개를 돌린 유진은 아크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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