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세르조 몬타리오가 물러가자, 블라드 유진은 곧장 예배당을 살펴보았다.
DK의 말대로라면 이곳 어딘가에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문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출입구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왜 없지?”
“그, 그러게요.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 옮긴 거 아닐까요?”
“흠.”
그는 미간을 좁히며 DK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나 숨기는 것이 있냐고 묻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혈성쇄혼술로 인해 하수인이 된 자가 주인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아마 이 녀석의 말은 진실일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유진은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바티칸 시국 지하에 숨겨진 비밀 공간을 찾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위직 몇 놈을 족치면 답이 금방 나올 테니까.
스산한 기운을 풀풀 날리며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문득 레니의 의념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여기 개구멍이 있어.
“뭐?”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가 쭈그려 앉은 곳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배당 건물 구석에 작은 동물이나 드나들 법한 틈이 있었다.
‘이렇게 잘 관리된 건물에 흠결이라니. 좀 의아하긴 하군.’
물론 거기가 출입구일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이 통과하기에는 영 좁았으니까.
그런데 레니가 구멍 반대편을 살펴보기 위해 벽에 팔을 짚는 순간이었다.
쑤욱! 콰당!
―으에?
체중을 왼팔로 버티려던 그녀의 손이 쑥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중심을 잃은 레니는 개구멍 위쪽 벽을 통과해 그대로 사라졌다.
순간 유진과 DK는 서로를 홱 돌아보았다.
본능적으로 저곳이 지하 공간으로 향하는 출입구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인식을 방해하는 모양인데요?”
“나올 때는 작동하지 않는 것 같군. 네가 모르는 걸 보면 말이야.”
“예, 분명히 아무런 위화감도 없었거든요.”
DK는 가브리엘에게 제압당했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레니가 사라진 개구멍 위쪽을 더듬으며 탐색해 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눈에 보이는 것과 촉감 사이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슬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어 보자, 생각보다 틈이 매우 좁았다.
혹시나 레니처럼 우연히 결계를 찾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일부러 이렇게 해 둔 듯했다.
이윽고 어두컴컴한 동굴과 희미한 조명이 두 사람을 반겼다.
“여기 맞습니다. 제 기억과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물론 입구는 그때와 다르지만요.”
이윽고 DK는 확신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구가 바뀐 터라 조금 헤매긴 했지만, 녀석은 금방 길을 찾아냈다.
‘왠지 내가 갇혀 있던 곳 근처인 것 같은데.’
오래된 지하 시설은 1천 년이 넘도록 잠들어 있었던 석관을 떠올리게 했다.
길은 달랐지만, 구조물과 풍기는 분위기가 매우 흡사한 느낌이었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먼저 진입했던 레니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유진과 DK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왠지 그녀의 모습이 사뭇 일그러져 보이는 게 아닌가.
“음?”
“대부님도 보이십니까? 저쪽 공간이 왜곡됐는데요?”
“점점 심해지는군. 그리고 저 아래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파장이 느껴져.”
“그렇습니까? 저는 아직……. 아! 이제 감지되는군요.”
갈림길의 오른편에서는 무지막지한 힘의 파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에 화들짝 놀란 레니는 급히 달려와 그의 곁에 찰싹 붙었다.
블라드 유진이 내뿜는 마기에 기대어 압력을 해소하려는 의도였다.
“어때?”
―뭔가 엄청나. 신성력이야!
“신성력처럼은 안 느껴지는데?”
―확실해. 가까이 가 보면 알아.
그녀의 말에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작게 주억거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저 파장의 근원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하물며 레니의 말대로 대상이 신성력이라면 더더욱.
유진은 피의 권능을 풀어 놓으며 오른쪽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그러자 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막강한 에너지가 그의 마기에 밀려나며 새파란 불꽃을 틔웠다.
“저, 저도 가야 하는 겁니까?”
DK는 앞서 나가는 블라드 유진과 레니의 뒤에 대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자 레니가 뭐 그딴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거기 혼자 있는 게 더 별로일 거 같은데.
그 말을 듣자마자 DK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나 홀로 카타콤에’를 찍는 것보다는 동료와 함께하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 * *
두우우웅! 쿠구구구!
어두컴컴한 지하 공동의 중앙.
강렬한 백광으로 이루어진 원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존재가 머리를 조금씩 바깥으로 꺼내는 중이었다.
마치 사람처럼 생겼지만, 체모는 하나도 없고 피부가 번쩍이는 재질로 이루어진 괴인.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무시무시한 힘의 파장과 함께 숨 막히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커헉!”
털썩!
피를 쏟으며 나자빠진 남자는 순식간에 미라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러자 이내 검은색 수단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빗자루로 ‘사람이었던 것’을 쓸어 담았다.
빈자리는 곧이어 들어온 인물에 의하여 금방 채워졌다.
“크웨엑!”
이윽고 백색의 원에 몸을 걸친 괴인이 힘을 주며 움직이자, 또 한 명의 희생양이 생겼다.
그러자 방금 보았던 일련의 과정이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번―쩍!
중앙에 놓인 정팔면체와 토리노의 수의에서 빛줄기가 쏟아졌다.
괴인이 꿈틀거림으로써 불안정해진 차원문을 수복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일그러지던 원이 원상태로 돌아오기까지 대여섯 명의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검은색 수단을 입은 남자의 손짓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원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눈은 초점 없이 희미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쿠구구구구!
그런데 한창 꿈틀거리던 괴인의 움직임이 뚝 멈추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십니까?”
검은색 수단을 입은 남자가 괴인을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머릿속에 쑤셔 박히는 것처럼 무지막지한 의념이 공동 전체에 전해졌다.
―내 피조물들이 죽었구나. 통탄할 노릇이로다.
“피조물이라시면, 설마?”
―그렇다. 대천사들이 운명했다.
“대체 어떤 놈이…….”
괴인과 대화하던 남자는 뒷말을 흐리고야 말았다.
불현듯 떠오른 인물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강한 신성력을 지닌 대천사들을 처치할 수 있는 자라면,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이었다.
“블라드 유진, 그놈이겠군요.”
―아마도.
교황청의 군대는 유진의 일당을 쓸어버리기 위해 출정하지 않았던가.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당연히 원인은 적군에 있을 터.
검은색 수단을 입은 남자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 숙였다.
“처분을 기다립니다.”
―네게 징벌을 가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 피조물들의 힘이 약했을 뿐이니.
“그럼 그자들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직접 가서 처결하리라.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괴인의 뜻을 헤아린 남자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다음 희생자를 대기시켰다.
지금보다 더욱 빠르게 시체를 치우고 희생자를 갈아치울 작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늦지 않아 다행이로군.”
어디선가 이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와 공동을 가득 채웠다.
“헉! 다, 당신은!”
검은색 수단의 남자는 헛바람을 들이켜며 부들부들 떨었다.
최근 뭇사람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
블라드 유진이 바티칸 지하의 카타콤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상당히 인연이 깊은 존재라, 감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수단의 사내는 바로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아크웰 페리티노였으니까.
갈색 머리칼에 살짝 앳되어 보이는 얼굴, 녀석의 외모는 예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확연하게 달랐다.
지금은 좀 더 남자 티가 나고 예전보다 훨씬 깡마른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로군. 교황청으로 돌아가서 영 연락이 뜸하다 했더니, 천주의 개가 되어 있었구나.”
“…….”
아크웰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치켜뜬 채, 유진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그런 녀석을 향해서 담담한 독설을 내뿜었다.
“근데 좀 이상하네. 신성력을 발하는 사제도 아니면서 왜 저놈의 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거지?”
사실 상대가 느끼기에 촌철살인 같았을 뿐, 블라드 유진의 음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일상적인 질문에 불과했지만, 아크웰의 자격지심이 말을 칼로 바꾸어 가슴팍을 후벼판 것이었다.
녀석은 표정을 굳힌 채, 원을 빠져나오는 중인 괴인을 돌아보았다.
본인의 의지로 대응하지 않고 천주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자 곧이어 편두통이 생길 만큼 강력한 의념이 차원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구나.
“그러게. 네놈과 직접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단 말인가?
“난 그냥 안드레아가 연 차원문을 최대한 빨리 닫기 위해서 온 거지. 다른 뜻은 없었다.”
―운도 좋은 놈이로군.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유진은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차원문에 끼인 천주를 가리켰다.
놈은 머리와 한쪽 팔만 간신히 빠져나온 상태였다.
존재가 워낙 거대했기에 한 번에 차원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대천사들을 먼저 보내 주변을 장악하는 사전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인간들을 희생하여 차원문을 유지하는 건 덤이었고.
그가 펑펑 터져 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천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설마 동정이라도 하는 것인가. 날 건드렸다간 저놈들은 한순간에 우수수 터져 죽을 것이다.
“도시락이 마음에 안 드는 놈에게 짓밟히니까 별로 기분이 좋지 않네. 먹을 거로 장난치면 천벌 받아.”
―허! 그새 유머 감각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아크웰의 말로는 영 잔혹하기만 하다던데.
천주의 눈길이 지면으로 향하자, 유진 또한 자연스럽게 아크웰 페리티노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불편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아크웰과 시선을 맞추며 천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 잔혹함은 적에게만 유효하다. 그걸 느꼈다면 스스로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점검하는 게 우선이겠지.”
뼈 있는 말이었다.
애초부터 그는 아크웰 페리티노가 교황청의 세작임을 알고 있었다.
사실 초반에는 꽤 도움이 되기도 했고, 굳이 멀리할 마음은 없었다.
나름 유용한 녀석인 데다가, 하는 짓이 귀엽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크웰은 유진에 관한 정보를 팔아넘기고, 완벽하게 다른 노선을 탔다.
교황에게 부역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함께한 정이 있어서 놈의 목을 단번에 쳐 내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로 선택하도록 가만히 놔두었을 뿐.
결국에 아크웰 페리티노는 교황청으로 돌아갔고, 그게 전부였다.
분노할 건수조차 없을 정도로 짧은 인연.
그래서 그런지, 간만의 재회에도 둘 사이의 교감 따위는 없었다.
단지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그냥 깡그리 쓸어 주마.”
블라드 유진의 손에서 암자색 섬광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사방으로 푸른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연옥에서 보았던 ‘정화하는 불’과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정화될지는 지켜봐야 알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