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18화 (219/226)

18화

―크어억! 겨, 결단코 네놈 뜻대로 되지는…….

“끝까지 시끄럽군.”

푸확―!

블라드 유진은 마지막까지 남은 대천사 라파엘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새하얀 혈액이 한계점 이상으로 빠져나오자, 천사의 육신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분쇄되어 미약한 신성력을 방출하는 입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반짝이는 가루들은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슈우우우! 쿠웅!

―크흐으……. 드디어 이 빌어먹을 놈들을 다 해치웠군.

비틀비틀 비행하던 엔세데스는 지면에 내려앉으며 힘없이 고꾸라졌다.

두 명의 대천사와 혈투를 벌이느라, 화룡왕은 처참하게 난자된 상태였다.

유진이 미카엘을 끝장내 버리고 얼른 지원을 오지 않았다면, 머나먼 지구에서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레드 드래곤의 수장으로서 치욕스러운 일이었기에, 엔세데스는 이를 악물고 싸웠다.

덕분에 간신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화룡왕의 등에 타고 전투를 치렀던 다이애나 로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인간 따위의 도움은 받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엔세데스는 대답 대신 느릿하게 주억거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서 회복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다이애나가 화룡왕의 상세를 살피는 동안, 블라드 유진은 전장을 쭉 둘러보고 있었다.

아직 파멸의 권능을 비롯한 온갖 자체 강화 스킬은 지속 시간이 조금 남았다.

가브리엘 수준의 대천사 한 놈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굳이 아군을 지원할 필요는 없었다.

교황청의 성스러운 군대는 이미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대천사가 몰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클 터였다.

대천사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했으니까.

감각이 예민한 자들이라면, 곧바로 감지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교황청의 군대는 신속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이애나를 돌아보며 문득 질문을 던졌다.

“치료는 어떻게 되어 가나?”

“아무래도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좀 느리네요. 그래도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슬슬 회복 속도도 붙는 중이고요.”

“다행이군. 엔세데스를 부탁하지. 난 저쪽에 좀 다녀와야겠어.”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화룡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극도로 지친 탓에 움직일 기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는 녹턴을 타고 일행에게로 날아갔다.

루시아와 레니, DK, 태구, 쿠르단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변에 널린 인간들의 아이템과 시체를 보아하니, 격렬한 혈전을 벌인 듯했다.

블라드 유진은 깃발 창을 바닥에 꽂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척!

어깨에 손을 대자, 이윽고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흡혈 스킬의 부가 효과인 회복 전이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아……. 유진 님. 무사하셨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들이 순순히 물러나던가?”

“네, 대천사들을 처치해 주셔서 설득이 쉬웠습니다. 바티칸의 성검 또한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고 있었거든요.”

“그랬군.”

“이제 어쩌실 건가요? 굳이 미국으로 도망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교황청의 군대가 물러간 이상, 사르데냐섬을 비워 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아직 그는 지중해에 할 일이 남았다.

“시칠리아섬까지 공략을 재개하실 건가요?”

“아니. 거기 말고 다른 곳을 칠 거야.”

“설마…….”

루시아는 유진의 의중을 깨달은 모양인지, 눈을 크게 뜨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당한 만큼 갚아 줘야지.”

* * *

“으와아아!”

―되게 시끄럽네. 조용히 좀 해. DK.

“이 상황에서 어떻게 소리를 안 지르……. 끄와악!”

DK는 파닥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티레니아해를 건너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DK는 지면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대략 300km를 날아가고 나서야 드디어 목표 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척!

“허억! 헉! 꼬, 꼭 이렇게 이동해야만 하는 겁니까?”

DK는 무감정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블라드 유진에게 항의했다.

혈성쇄혼술의 세뇌를 넘어설 만큼, 지대한 공포를 느낀 모양이었다.

하긴 줄에 묶여서 엄청난 속도로 바다를 가로질렀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레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떡해? 녹턴이 DK를 안 태운다는데.

“다른 방식으로 가면 되잖아. 배도 있고 비행기……. 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주인이 시간 없다고 했어.

그녀가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며 말하자, DK도 시선을 홱 돌렸다.

원망하는 눈빛에 뜨끔한 유진은 녹턴에서 내리며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게 최선이었다.”

“대부님!”

녀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저 길 안내나 하라는 손짓과 함께 말이다.

결국에 DK는 터덜터덜 블라드 유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혈성쇄혼술에 매인 몸이라,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으므로.

유진과 레니, DK는 바티칸 시국 남쪽의 진입점을 지나고 있었다.

눈앞에 성 베드로 대성전이 보였지만, 깡그리 무시하고 곧장 정부 청사 쪽으로 향했다.

“여기서 저 아래로 가면, 예배당이 나옵니다. 분명 그 근처에 결계 같은 것이 있었어요.”

“통과 방법은?”

“저는 그냥 만만한 놈 몇 잡아서 현혹한 다음, 몰래 들어갔죠. 바티칸이라고 해서 전부 성자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번에도 그렇게 할까요?”

“그래.”

“알겠습니다.”

독특한 인원 구성의 세 사람이 입국 절차를 무시하고 쭉 진입하자, 경계를 서던 성기사들이 다가왔다.

원래라면 입국 심사도 거치고 해야 하지만, DK의 현혹술로 간단히 치워 버렸다.

그들은 그냥 바티칸 시국에서 일하는 고용인이기에,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한 성기사가 그를 향해 다가오더니, 정중한 목소리로 안내해 주었다.

“이 안쪽은 진입 금지 구역입니다. 박물관은 저쪽이니, 발길을 돌려 주십시오.”

“이제 막 서임받은 초짜인가?”

자신을 제지하려는 놈에게 그가 던진 첫 마디였다.

발언을 모욕적으로 느낀 상대는 대번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전 세계를 통틀어 교황청 성기사를 무시하는 인물은 존재치 않았다.

만약 있다면 제3세계의 비인가 헌터들뿐이리라.

아니, 그들조차 어떻게든 영입 시도를 하지 대놓고 모욕을 주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만나자마자 면박을 주었다.

철저한 정신 교육을 받았더라도 초임은 어설플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는 화를 억누르며 으르렁거리는 말투로 위협했다.

이러면 역정을 낸 것과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언행을 조심하셔야 할 거요. 이곳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자들의 도시외다.”

“교황청의 권위를 위해서 인간 장사를 하는 곳이겠지.”

“뭐, 뭐요?”

“내 얼굴도 모르다니, 초임은 초임인가. 아니면 그냥 외부와 담쌓고 지내는 스타일?”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성기사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블라드 유진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르데냐섬에서 교황청의 군대와 싸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아니, 대천사들의 막강한 권능에 짓눌려 이미 소멸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한데, 멀쩡히 살아서 가증스럽게도 바티칸에 발을 들이다니.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기에, 유진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한 것이다.

스르릉!

깜짝 놀란 성기사는 검을 뽑아 들며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어떻게든 블라드 유진이 바티칸 시국에 나타났음을 알리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자를 쫓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알려져야 하기에 가만히 놔둔 것이다.

우르르르!

뒤편에 서 있던 성기사가 비상 호출을 한 모양인지, 어디선가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서 경계를 서던 자들이 몰려와 포위망을 짜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수준 낮은 이들뿐이로군요. 웬만큼 싸울 줄 아는 놈들은 죄다 사르데냐섬에 동원되었던 모양입니다.”

DK의 말에 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교황청의 군대는 로마에도 들어오지 못한 상황.

지금쯤이면 이제 막 항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바티칸 시국에 남은 병력은 그야말로 쭉정이뿐이었다.

스이이잉!

블라드 유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수혈인을 휘둘렀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붉은 칼날이 지면과 성기사들을 마구 찢어발겼다.

쿠콰콰콰콰!

그야말로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놀랍게도 그는 단 한 번의 칼질로 이런 미친 결과를 만들어 냈다.

“크아악!”

“어헉! 어, 얼른 지원 요청을…….”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조각조각 갈라져 지면을 붉게 물들였다.

유진은 절단된 갑옷과 시체들로 가득한 피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좌우로 나뉜 성기사들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었다.

일부는 전의를 상실하고 손아귀에서 검을 놓치기도 했다.

유진은 그자들을 무시한 채, 철도역을 지나 정부 청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건물 뒤편의 예배당 쪽을 통해 도망치려는 인물들이 보였다.

그는 상대를 포착하자마자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놈들이 바티칸 시국과 교황청을 이끄는 고위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윽. 쿠콰콰콰콰!

다시 한번 소수혈인을 하늘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치자, 대뜸 거대한 벽이 생성되었다.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아스팔트 바닥을 후려갈기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당연히 도주하던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으아악!”

“허억!”

너무도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 지척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그들을 향해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이놈들 맞나?”

그러고는 뒤따라온 DK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녀석은 나자빠진 두 중년 남자의 얼굴을 살피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세르조 몬타리오, 이탈리아의 대통령이죠. 그리고 이자는……. 아마 새로 교황에 등극한 놈 같군요.”

세르조 대통령의 얼굴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함께 있던 다른 남자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아마 뭔가 작당 모의를 하려고 이곳에 모여 있다가, 유진의 습격에 놀라 달아나려던 모양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거리요!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가시오!”

간이 배 밖에 나와서 춤을 추는 걸 보니, DK의 예상대로 교황이 확실한 것 같았다.

뒷배가 무려 셋이나 되는 대천사였으니까.

그 어떤 존재가 쳐들어와도 이길 자신이 있는 듯했다.

물론 그건 대천사들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유진은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교황의 목을 일격에 베어 버렸다.

푸확―! 털썩!

생생한 수급이 피를 뿌리며 바닥을 뒹굴자, 세르조 몬타리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그런 이탈리아 대통령을 향해서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전하라. 내가 교황청의 민낯을 까발리러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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