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파지지직! 쿠콰콰콰―!
“크으윽!”
새하얀 뇌전이 쏟아져 지면을 가르자, 요한은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잔뜩 웅크렸다.
강력한 번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 심산이었다.
신성력을 전신에 두른 덕분에 큰 부상은 없었지만, 온몸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퍼지고 있었다.
이게 다 루시아의 깃발 창에서 터져 나온 스킬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바티칸의 성검은 미간과 콧잔등을 일그러뜨린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성대를 밑바닥부터 긁은 듯, 심각하게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못 본 사이에 괄목할 성장을 이루셨군요. 분명 예전에는 이렇게 차이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초월적인 강자들과 자주 싸운 덕분이라고 해 두죠.”
“으음…….”
루시아가 어두컴컴한 미궁의 하늘 어딘가를 고갯짓하며 말하자, 요한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블라드 유진을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저 악의 종자가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영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루시아의 말은 노선을 잘못 탔기에 자신보다 약해졌다는 식으로 들렸으니까.
물론 진짜로 그럴 의도가 저변에 깔린 건 아니었지만.
그런 기색을 그녀 또한 눈치챘지만, 굳이 정정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지금은 적으로 만나지 않았던가.
“조금 열세에 처했다고 해서 항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옛정은 잊어 주셔도 됩니다.”
“물론이죠. 생존을 위한 싸움에 그런 감상은 끼워 넣지 않습니다. 풀고르 글로부스!”
쉬익―! 후우웅! 쿠콰콰콰콰!
기합과 함께 깃발 창을 내려치자, 백색 뇌전의 크기가 대폭 확대되었다.
둥글게 모양이 잡힌 에너지 덩어리는 요한을 향해 날아가며 방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혈관처럼 수십 갈래로 뻗어 나간 번개는 주변의 모든 물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번에도 바티칸의 성검은 감히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방패 뒤에 몸을 숨겼다.
거북이처럼 납작 엎드려 방어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엘―칼릭스의 눈물 덕을 톡톡히 보게 되네.”
가슴팍에서 달랑거리는 펜던트를 힐끔 내려다본 루시아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유진이 준 SS급 아이템인 엘―칼릭스의 눈물.
속성과 관련된 다양한 옵션이 붙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번개 피해였다.
그녀는 모든 스킬에 뇌전 속성이 붙어 있었기에, 피해 강화 효과는 곧장 공격력으로 직결되었다.
무려 10%에 달하는 능력치 강화가 거저 생긴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마 엘―칼릭스의 눈물이 없었다면, 이토록 바티칸의 성검을 압도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아무리 블라드 유진과 함께하며 다량의 경험치를 쌓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녀는 괜히 그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쉬이이익―! 카앙!
폭풍과도 같은 스킬이 지나간 직후, 루시아는 빠르게 달려들어 창날을 내질렀다.
번득이는 광망이 서린 장창이 날아들자, 요한은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방패를 휘둘렀다.
그러고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최근 레벨 차이가 조금 벌어졌다고 해도 상대는 바티칸의 성검, 전선의 천신이라 불리는 남자.
결단코 만만하게 볼 인물은 아니었다.
카강―! 따다다당!
두 사람은 찰나의 순간에 수십 합을 겨룰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방을 나누었다.
그러나 누구도 쉽사리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요한의 돌진은 루시아의 거리 조절 능력을 일순간 무력화할 정도로 노련하고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초근접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소 부족한 근력과 박투 능력을 아이템과 스킬로 보강해 버렸으니까.
“뇌신의 흉장. 방어 모드 전개.”
파지지직! 지지직!
바티칸의 성검이 접근하려 하자, 루시아의 갑옷에서 황금빛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거대한 전기장이 생성되는 바람에 요한은 뜨끔하며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잽싸게 거리를 벌리면서 깃발 창을 휘둘렀다.
“텔룸 콩쿠수스!”
쑤화아악!
창날에서 빛의 화살이 발사되어 허공을 가로질렀다.
“헉!”
근거리에서 터진 초고속 투사 스킬에 요한은 대경하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무리한 움직임 때문인지 스텝이 꼬이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당연히 루시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섭게 짓쳐 들어갔다.
“하앗!”
쉬이이익―!
뇌전으로 번득이는 창날이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바티칸의 성검은 검과 방패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투웅―!
미궁의 하늘 어딘가에서 묵직한 충격파가 발생하여 이곳까지 번지는 게 아닌가.
요한은 화들짝 놀라며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자 루시아 또한 저도 모르게 공격을 중단했다.
뚝.
그녀의 창날은 상대의 목에 정확히 겨누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바티칸의 성검은 루시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요한의 시선은 충격파가 터져 나온 미궁의 하늘 어딘가를 황망하게 훑고 있었다.
“갑자기 왜 멈춘 겁니까?”
“…….”
그녀가 질문을 던져 보았으나, 상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데, 이윽고 일전의 기묘한 충격파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퉁! 투우웅!
“아……. 아아.”
그러자 바티칸의 성검은 탄성을 터트리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털썩 주저앉은 요한의 얼굴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안타까움과 후련함이 동시에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시원섭섭한 표정을 본 루시아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연이어 터진 세 번의 충격파.
그 징후가 뜻하는 바는 바로…….
“이겼구나! 그렇죠? 대천사들이 죽어서 그런 반응이 튀어나온 거 맞지요?”
“……예.”
그녀의 다급한 질문에 바티칸의 성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라면 적으로 규정된 유진의 일행에게 이러한 말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만큼 신성력은 하위 개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힘이니까.
하지만 대천사들이 소멸한 지금은 얼마든지 루시아에게 정보를 줄 수 있었다.
철컥! 척!
검을 집어넣고 방패를 등에 멘 요한은 곧장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끝내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지금까지 우릴 말살시키려는 온갖 행동은 다 해 놓고, 패색이 짙어지니까 이제야 그만하자고요?”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를 제약하던 힘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교황청의 군대에서 제 말을 거역하는 이는 없을 거라는 의미죠.”
“그래서요?”
“저들은 전선을 유지할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은 바티칸의 성검은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패배를 선언하고 용서를 구하는 상황이었지만, 굴욕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요한은 한 사람의 성직자로서 인류를 위해 간청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의도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바티칸의 성검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뇌전의 여전사께서는 충분히 저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왜 그러셨습니까?”
“그건…….”
“저에게서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요?”
“네.”
“제가 저들의 투쟁심 또한 전선으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전력을 보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대천사들이 사라진 이상, 인간들끼리 싸울 이유는 없었다.
가뜩이나 유럽 중부가 죽겠다고 난리인데, 자멸보다는 힘을 합치는 게 훨씬 나은 결과였다.
“좋습니다. 어떻게 하나 보죠.”
“감사합니다.”
강렬한 호소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은 벌떡 일어나 전장으로 되돌아갔다.
교황청의 성스러운 군대는 유진 일행과 첨예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수효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당연히 일행은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요한의 목소리가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전투 중지!”
쿠구구구구!
신성력을 가득 담아 소리친 모양인지, 바티칸의 성검이 쏘아 보낸 음파는 지면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뇌성벽력 같은 외침의 효과는 매우 좋았다.
맹렬하게 유진 일행을 몰아붙이던 성스러운 군대가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난 것이다.
아무래도 요한이 교황청 내에서 아직 상당한 위치를 인정받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성기사단장 오렌시오와 빅트리치오가 바티칸의 성검에게 다가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다 이긴 싸움에서 물러나다니요!”
“아무리 요한 님이라고 해도 고귀한 분들께서 용서치 않을 겁니다. 얼른 공격 재개를 명하십시오!”
둘은 진노한 표정으로 입을 모아 요한의 행위를 규탄했다.
바티칸의 성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두 사람을 쭉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대천사들이 강림한 이후에 등용된 인물들.
이전에는 얼굴조차 모르던 자들이 대뜸 권력을 얻고 횡포를 일삼았다.
이게 다 교황과 대천사들이 벌인 대참사였다.
블라드 유진을 타도하겠다는 괴상한 목표 때문에, 전선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지.”
요한이 중얼거린 것처럼 안드레아 교황은 비명횡사했고, 대천사들의 기척은 사라졌다.
더 이상 교황청에 바티칸의 성검보다 존경받는 인물은 존재치 않았고, 그만한 세력도 없었다.
유진과 싸우다 보니, 저절로 하나하나 분쇄되어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블라드 유진은 교황청에 있어서 성화나 다름없었다.
온갖 악습을 불태우는 성스러운 불꽃 말이다.
“이보세요! 바티칸의 성검이라 치켜세워 주니,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습니까?”
“이러다 그분들의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신실한 성직자가 천주의 명령을 무시하는 겁니까?”
오렌시오와 빅트리치오는 끝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요한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살기를 감지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뜬 바티칸의 성검은 오른팔을 엄청난 속도로 휘둘렀다.
스핑―!
손잡이를 쥐는 게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요한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윽고 열변을 토하던 빅트리치오의 머리통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직도 입을 어물거리는 걸 보아하니, 목이 잘린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허억!”
쑤컹!
깜짝 놀란 성기사단장이 잽싸게 검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오른쪽으로 그어졌다가 되돌아오는 검격에 오렌시오의 수급도 힘없이 지면에 처박혔다.
그러자 전장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영문도 모른 채 바티칸의 성검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요한은 루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요한 님의 의지를 잘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이 은혜는 결단코 잊지 않겠습니다.”
“고마우면, 약속대로 전선에 힘을 실어 주세요.”
“예, 반드시 그리하죠.”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바티칸의 성검은 이내 교황청의 군대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는 두 구의 시체를 짓밟으며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패배했다! 이대로 퇴각할 테니, 모두 무기를 회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