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16화 (217/226)

16화

치지지직! 치지지직!

광택 없는 우윳빛 검신이 천주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유진이 뽑아 내지른 건 바로 엘칸 차원의 주신(主神), 카이넬이 만든 성물이었다.

색상부터 힘의 발현 결과까지 두 신성력은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단지 마기가 아닐 뿐.

“마기는 봉인되지만, 신성력은 그럴 리 없겠지.”

―커헉! 대체 어디서 이런 더러운 힘을 가져왔느냐!

천주는 경악하며 온몸을 뒤틀었다.

카이넬의 성검이 전달하는 막강한 신성력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윽고 찬란한 백광을 뿜어내던 상대의 육신이 축 늘어지는 게 아닌가.

블라드 유진은 천주가 분신의 몸에서 빠져나갔음을 직감했다.

새하얀 서기가 하늘 높이 솟구치자, 그는 잽싸게 성검을 뽑아 휘둘렀다.

치이익! 후우웅!

손아귀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공격을 감행했다.

마기가 봉인당한 유진이 할 수 있는 건 카이넬의 성검을 휘두르는 것뿐이었으니까.

‘사르판 공작을 상대할 때처럼 카이넬의 투구를 씌워 놓고 팰걸 그랬나?’

천주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랬다면 더욱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물론 결과론적인 가정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분신은 힘없이 자빠져 버렸고, 허공을 난자하던 칼질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도망치는 신의 영혼까지 베어 내기엔 역부족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마족의 후예인 그는 성검의 힘을 모두 뽑아낼 수 없어서, 벌어진 결과였다.

천주의 분신을 박살 낸 거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붕괴하는군.”

쿠구구구구!

블라드 유진은 저 멀리서부터 무너지는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의 영혼이 달아나자, 징벌의 검 내부에 유지되던 함정 또한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그의 뇌리에 진노한 천주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내 반드시……. 네놈을 처단하리라!

하지만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넘어올 수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았군.”

이미 그는 천상계와 마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다음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블라드 유진은 마치 미궁처럼 붕괴하는 신성 함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스팟―!

―음?

거대한 신성력 덩어리가 난데없이 쪼개지자, 미카엘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성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폭파될 정도로, 징벌방의 강도는 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천사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흩날리는 빛무리 사이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쿠화아아아! 쑤후웅―!

―으읏!

신성력 덩어리 사이에서 튀어나온 물체가 허공에 붉은 선을 쫙 그었다.

그와 동시에 좌우로 무시무시한 위력의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미카엘은 급격하게 몸을 틀며 화염을 피해 냈다.

신형을 제대로 가눈 천사장은 미간을 좁히며 저 멀리 날아간 붉은 물체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공중을 유유히 선회하여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온 인물은 바로 블라드 유진.

성물이 생성한 징벌방에 사악한 존재가 갇히면, 자력으로는 결단코 탈출할 수가 없었다.

저 안에서는 마기가 아예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천주의 분신을 만나고도 멀쩡한 악의 종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데, 그런 와중에도 징벌의 검을 뚫고 나왔다?

대천사 중에서도 으뜸인 미카엘이 놀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유진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놀라다니, 너도 저 덜떨어진 두 녀석과 다를 바 없구나.”

―뭐라?

그가 고전하는 가브리엘과 라파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천사장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다른 대천사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게 상당히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발작 버튼을 제대로 찾은 모양인데, 계속 눌러 줘?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주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냥 저놈들이나 너나 똑같이 하잘것없다는 의미다.”

―이런 썩을 놈이?

역시나 미카엘의 발작 버튼은 휘하 대천사들과 동급으로 싸잡는 거였다.

암만 한 단계 차이라고 해도 천주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건 천사장이었으니까.

‘그만큼 자존심이 강할 수밖에 없겠지.’

피식 미소를 지은 유진은 천계도살검을 들어 미카엘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가볍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는데, 천사장은 곧장 거리를 좁히며 징벌의 검을 휘둘러왔다.

쐐애애액! 후웅―!

다소 흥분한 듯한 얼굴이었으나, 검격은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냉철하고 치밀하게 그의 움직임을 차단하며 짓쳐들어온 것이다.

‘도발에 걸린 척만 한 건가?’

푸캉! 쩌저저정!

천계도살검을 놀려 공격을 받아 내자, 징벌의 검에서 이전과 같은 반응이 있었다.

마치 그물처럼 퍼져 나온 신성력이 블라드 유진을 포위하며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똑같은 수법에 당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스팟―! 카가가강!

초월적인 위력의 마기가 뿜어져 나와 신성력을 후려갈겼다.

―크윽!

“으음!”

그러나 그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징벌의 검에다 천주에게 부여받은 신성력을 왕창 집어넣고 쑤셔 박은 일격이었다.

그런데 고작 뱀파이어 하나를 압도하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사실상 미카엘의 입장에서는 힘에서 밀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유진을 쉬이 이길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낮은 신음만 흘릴 뿐, 별반 타격이 없는 듯했다.

‘할 만한데?’

실제로 블라드 유진은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카이넬의 성검을 다루느라 손아귀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음에도, 격돌의 충격은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그의 레벨은 1만2천으로 적용된 상태.

레벨만 놓고 본다면, 유진을 능가하는 존재는 아마 차원의 절대자인 천주뿐이리라.

카강! 터더더덩!

그럼에도 접전은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EX급에서의 강함은 오로지 레벨만으로 평가되지 않는 법.

그가 본신의 실력으로 가브리엘을 거꾸러뜨렸을 때처럼 미카엘 또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징벌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사장은 전신(戰神)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력했다.

쿠구구구구!

둘의 격돌이 가속화되자, 허공에 대뜸 시커먼 암흑 공간이 생겨났다.

강한 마기와 신성력이 충돌하자, 차원이 버티지 못하고 찢어져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가브리엘과 미친 듯이 공방을 나누던 때처럼 말이다.

‘저기에 휘말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군.’

블라드 유진은 차원 균열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할지라도 저 틈새에 빨려 들어가면, 무사히 탈출할 수가 없었다.

라파엘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브리엘 또한 사르데냐섬에 발생한 균열에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그런데 문득 그의 뇌리에 단어 두 개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목숨? 생명체?’

거의 끊길 뻔한 가브리엘의 명줄을 떠올리다가 천주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분명 천상계의 절대자는 모든 피조물이 생명체라고 언급했다.

바로 그 순간, 어렴풋이 돌파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는 말은…….’

작게 주억거린 유진은 곧장 자신이 세운 가설을 검증해 보았다.

[각종 시너지 효과로 인해 ‘대군주의 역병’이 ???급으로 적용됩니다.]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50%의 스킬 효과 감소와 60%의 체력 감소의 저주가 적용됩니다.]

파멸의 권능에 이어 마왕의 권능까지, 대군주의 역병은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목표의 능력치를 절반 이상으로 깎아 버리는 무자비한 광역 저주.

만약 천주의 말대로라면, 대천사들 또한 대군주의 역병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움직임이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느려졌다.

이제는 엔세데스와 다이애나 로즈가 압도할 정도였다.

그뿐이랴, 교황청의 군대 또한 대폭 약화했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쉬이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되레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블라드 유진과 싸우던 미카엘 또한 극단적인 변화를 보였다.

―이토록 지독한 저주라니……. 믿을 수가 없군.

“네놈의 주인이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 줬거든. 난 또 고귀한 존재 어쩌고 하기에, 생명체가 아닌 줄 알았지.”

천사장의 움직임은 이제 눈에 간단히 잡힐 정도로 느려졌다.

그러다 보니, 신성력과 피의 권능이 충돌하면서 생긴 균열에 대처하기 힘든 듯했다.

자꾸만 그쪽으로 빨려 들어갈 듯하다가 황급히 빠져나오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였으니까.

승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유진은 이제 승부에 방점을 찍고자 했다.

슈슉! 슈슈슉!

녹턴에 탄 그의 모습이 수백 수천으로 분열되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각종 시너지 효과로 인해 ‘천군압쇄’가 ???급으로 적용됩니다.]

[50%의 능력치에 달하는 분신을 최대 2천 명까지 소환할 수 있습니다.]

천계도살검을 쥐고 돌진한 블라드 유진의 분신은 무려 2천에 달했다.

그야말로 유령 군마에 탑승한 기마대가 생성된 것이다.

게다가 분신 하나하나는 현재 그의 레벨의 절반, 무려 6천에 달하는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이런 미친!

분신들의 위력을 직감한 미카엘은 당황한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식적으로 이건 너무 압도적이었다.

“가서 전부 쓸어버려라!”

유진은 마치 전장에서 지휘하는 장수처럼 소리치고는 2천 개의 분신을 앞으로 쏘아 보냈다.

두두두두두! 펑! 퍼벙!

녹턴과 똑같이 생긴 유령 군마를 탄 분신들은 마치 벌떼처럼 달려들어 미카엘을 물어뜯었다.

그런 와중에 차원 균열에 휘말린 녀석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줄지는 않았다.

애초에 수효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크하아압! 주신의 징벌! 징벌방 생성!

쿠후우웅! 비유우웅!

미카엘은 온갖 스킬을 쏟아 내며 들이치는 분신들을 도륙했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무려 6천 레벨에 달하는 유진인지라, 발악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천계도살검에 적중당한 천사장은 신음을 흘리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크허어억!

그러자 유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녹턴의 갈기를 살짝 잡아당겼다.

“가자. 이제 끝을 낼 때다.”

“이히히힝!”

두두두두두!

그의 명령에 유령 군마는 마치 급강하 폭격기처럼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낙하하던 미카엘은 안간힘을 쓰며 몸을 뒤틀었다.

―내, 내가 이대로 무너질 성싶으냐!

최후의 최후까지 항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후웅―! 치지지직!

징벌의 검이 신성력을 뿜어내며 휘둘러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천사장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패색은 너무도 짙어진 상태였다.

가볍게 검격을 막아 낸 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미카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가라. 천주가 네놈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그놈을 좀 만나 봤는데, 너희를 도구 그 이상으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모함하지 마라! 그럴 분이 아니시다.

“그럼 천주의 곁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얻어 보든지. 그놈이 뭐라고 하나.”

―이, 이런 불경한……!

미카엘의 발악은 이어지지 못했다.

우악스럽게 천사장의 머리칼을 잡아챈 블라드 유진이 천계도살검으로 목을 갈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푸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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