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여긴…….’
블라드 유진은 어떠한 공간에 둥둥 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끝도 없는 백색의 공간은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위아래를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치 온통 하얀색의 우주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이었다.
투웅―!
이윽고 저 먼 곳에서 강렬한 파장이 쏟아져 나와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시커먼 무언가가 차츰 백색의 공간을 잡아먹더니, 이내 반짝이는 무언가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빅뱅인가.’
유진은 흘러가는 영상의 정체를 금방 알아챘다.
팽창하는 공간은 대략 140억 년 전의 우주를 보여 주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계와 천상계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로 되돌아왔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온통 시커먼 마기의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SF 영화에 나오는 멸망한 행성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반 이상 망하기는 했다.
인간들의 노력과 블라드 유진의 존재로 인해 잠시 멈춰 있을 뿐.
“아마 금방 점령당하겠지. 누구에게든 말이야.”
―재미있군.
쿠웅!
지구를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뒤편에서 웬 음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웅혼한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오자,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껏 이토록 강한 신성력은 처음 겪어 보았으니까.
천사장 미카엘조차도 이 존재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에 비견될 정도였다.
‘형체가……. 없다.’
집중하여 살펴보았지만, 상대의 면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너무도 강력한 빛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고개를 돌려야 할 수준은 아니라서, 그는 백광에 휩싸인 존재의 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천주인가.”
―오……. 날 만나고 그딴 반응을 보이는 건 네가 처음이다. 상당히 신선하구나.
블라드 유진의 예상대로 상대는 천상계의 절대자, 인간들에게는 신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난데없이 천주가 어째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분명 방금까지 그는 미카엘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된 거지?”
―그야 징벌의 검은 나와 소통하는 매개체니까. 내가 널 이리로 부른 것이다. 궁금했거든.
“뭐가 말이냐?”
―외침(外侵)을 억제하고 있는 네놈의 존재가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겼군. 방금 한 말은 무슨 의미였지?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누구에게든 금방 점령당할 거라고 중얼거리지 않았나.
“아아, 그랬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듣고 싶구나.
“득 될 거 하나 없는데, 그걸 내가 왜 설명해? 네놈만 이 상황이 재밌는 것 같군.”
유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한 차원의 절대자를 목전에 두고도 담담한 모습은 솔직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구의 피조물들은 하나같이 분신만 보고도 엎드려 경배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천주의 기색이 살짝 변한 것 같았다.
백광에 휩싸여 있었기에, 진짜로 표정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저 일렁이는 불꽃과 빛의 파장에서 당혹스러운 감정이 느껴졌을 뿐.
이윽고 상대는 그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꺼내 놓았다.
―천상계가 지구에 개입한 이유 정도면, 괜찮은 대가인가?
“…….”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블라드 유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미궁 사태를 유지할 방법도 알려 준다면.”
―허허……. 정말이지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는 친구로군. 좋아.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니니 들어주지.
천주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왼손을 슬쩍 들어 보였다.
이제 그가 말할 차례라는 의미였다.
유진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간단해. 악의가 느껴졌거든.”
―어디서 말이냐?
“네놈이 인간들에게 전해 준 신성력. 순수한 의도로 종교를 전파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할 만큼 강렬했지.”
―대체 언제부터?
“얼추 가브리엘을 처음 만났을 때인 것 같군. 갈수록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어. 특히나 방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미카엘은 상당히 노골적이었지.”
―역시 피조물들은 영 탐탁지 못하다니까? 내가 직접 나다닐 수도 없고……. 쯧!
천주는 그런 내심 따위도 못 숨기냐며 대천사들을 질책했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은 담담하게 뼈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 주인에 그 종 아닌가? 당장 너에게서도 강력한 적의가 느껴지는데. 신성력이라기보다는……. 마기와 거의 흡사하군.”
―호오! 거기까지 알아낼 줄이야. 놀랍군.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상대의 인정에 그는 입술을 뒤틀었다.
예상대로 신성력과 마기는 선악을 가리는 힘이 아니었다.
그저 대척점 비슷한 곳에 있는 상극의 기운일 뿐이지.
바꿔 말하면, 신성력 또한 마기처럼 정제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반대되는 에너지이니만큼, 적응하는 데 무지하게 애를 먹겠지만.
“궁금증은 풀렸나?”
―충분히.
“이제 네 차례다.”
―흠……. 순진한 건지, 말로만 한 약조를 너무 맹신하는 거 아닌가?
“보통 저능한 자들이 양심과 지능을 혼동하지. 같은 것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젠장할.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알았다. 알았어.
애를 좀 태우려던 마음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대가리 나쁘면 입 닫아 보든지’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주는 툴툴거리면서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지키기 시작했다.
물론 세세한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 주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이유는 간단해. 이익 때문이지.
“천상계가 지구에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지?”
―마계와 비슷한 맥락이다. 마왕의 권능을 얻었으니, 너도 잘 알 것 아닌가.
“자세한 건 모른다.”
―이만큼 살기 적당한 행성이 별로 없거든. 차원의 지배자를 제외하면, 피조물들은 죄다 생명체다. 게다가 신은 추종자가 많을수록 강해져.
“뭐가 이득이라는 건지 충분히 알겠군.”
천주의 말대로 이유는 정말 단순했다.
인간들이 투쟁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그저 살기 좋은 땅이 있기에, 그곳을 점령하고 식량과 자원을 빼앗을 뿐이었다.
지구를 호시탐탐 노리던 두 차원의 절대자 중, 넘어오는 방법을 먼저 알아낸 건 마계였다.
종교로서 영향력을 투사하던 천상계는 근래에 들어서야 차원을 넘을 수 있었고 말이다.
―근데 미궁을 이 상태로 유지하는 건 왜 묻는 거지?
“그야 그쪽이 더 편하니까?”
―허! 네놈 설마……. 인간들과 섞여서 살아가려는 거냐? 동족의 번영 따위는 집어치우고서?
“원래를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제 필요가 없어졌어. 다 알게 되었거든.”
―뭘 알았다는 거지?
“거기까지 말해 줄 의무는 없군.”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나도 양질의 정보를 주지 않을 수 있어.
“쯧! 귀찮게 하네. 그냥 내가 굳이 행동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는 말이다. 일족은 잘 살아 있어.”
―박멸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래.”
블라드 유진의 대답에 천주의 백광이 일렁거렸다.
분명 교황청을 동원하여 뱀파이어의 씨를 말려 버렸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는 천주가 뱀파이어의 기원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오해한 것이었다.
실제로 지구의 뱀파이어는 유진 혼자만 남은 게 맞았다.
단지 그의 동족이 마계에 버젓이 살아 있고, 원조인 키에리 라비에스 또한 멀쩡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우리가 무슨 자연 발생한 신(新)종족인 줄 아나 보네.’
놈이 어떻게 이해하든 어차피 블라드 유진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저으며 대답을 촉구했다.
“미궁을 유지할 방법이나 알려 줘.”
―마계와 계속 연결되길 원하는 건가?
“적당한 수준에서 말이야. 내가 활동하기에 딱 좋거든.”
―역시 넌 인간을 그저 이용하기만 할 뿐이로구나. 진짜 그놈들의 편에 선 건 아니었어.
“당연한 거 아닌가?”
―좋아. 아주 좋군. 아마 그놈들도 어떤 매개체를 미리 지구로 보내고, 그걸 찾아서 차원을 연결했을 거다.
“너희가 엘―칼릭스와 토리노의 수의를 이용했던 것처럼 말이냐?”
―호오……. 비슷해.
“이건 내 손에 있는데, 차원문을 어떻게 열었지?”
척!
유진은 복주머니에서 광진의 성배 엘―칼릭스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천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광이 크게 요동쳤다.
―그, 그걸 네놈이 갖고 있었나? 분명 교황 놈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당연히 숨겼지. 안드레아는 내게 속은 거고.”
―상당히 불쾌하군.
“언제까지 갖다 달라는 말이 없어서 말이야. 나는 대규모 미궁 공략을 전부 끝내고 줘도 되는 줄 알았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대꾸하자, 천주의 전신에서 살기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광진의 성배가 있었다면, 훨씬 더 빠르게 차원문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벌써 대천사를 셋이나 투입한 상황.
굳이 엘―칼릭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목표 달성에는 큰 지장이 없을 터였다.
강렬하게 타올랐던 천주의 백광은 차츰 가라앉더니, 담담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무래도 좋다. 이제 성배는 별로 필요가 없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차원문을 열었나 보지? 그걸 쭉 유지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마계와의 연결은 우리와 다를 것이다. 아마도 저런 식이겠지.
후웅!
천주가 손짓하자, 유진의 근처에 지구가 불쑥 나타났다.
빙글빙글 돌다가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축소되더니, 이내 사르데냐섬의 미궁으로 진입했다.
그는 어느새 치열한 전장의 한복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물론 시간이 정지된 듯, 미궁 내부의 모든 이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스윽.
천주가 가리킨 방향에는 공간 이동 제단이 있었다.
버지니아와 연결된 장치, 아무래도 저건 마계에서 차원문을 연구하다가 나온 산물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작게 주억거리던 블라드 유진의 뇌리에 어떤 상념이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루드벨이 거론했던 중국의 대마궁. 거기에 차원문이 있겠군.’
그 마족 녀석은 중국 대규모 미궁의 안전을 대가로 내걸면서, 대천사가 나타났다는 미끼를 슬쩍 풀었다.
유진의 행보를 유럽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실 천상계의 개입은 그에게 치명적인 일이었으니, 당시에 이 알았더라도 이곳으로 왔을 터였다.
결과적으로 루드벨의 행동은 마계와 블라드 유진이 상호 이득을 보는 결과를 낳았다.
“차원문만 부수지 않는다면, 미궁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마계의 자원이 부족해지면, 스스로 차원문을 철수할 수도 있다. 타 차원을 잡아먹는다는 게 저항이 만만치 않은 일이거든.
이미 그 사실은 키에리 라비에스에게 전해 들은 바 있었다.
이제 이 빌어먹을 신과의 대화를 끝내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천주는 그를 곱게 보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궁금증은 다 풀린 듯하군. 슬슬 끝을 봐야 할 때겠지.
번득이는 백광이 주변을 잠식해 가자, 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복주머니를 챙겼다.
“지금 너는 분신 아닌가? 고작 그 정도로 날 이길 수는 없을 텐데.”
―그렇지. 근데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
“……징벌의 검 내부.”
―후후후! 아직 느끼지 못했나? 이곳에서는 마기를 쓸 수 없단다. 애송아.
놈의 말대로 그의 체내에 가득하던 피의 권능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토록 강력하던 키에리의 권능 또한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그래서?”
푸욱―!
어느새 그는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뽑아 천주의 분신을 쑤시고 있었다.
―이, 이건 뭐? 크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