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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213화 (214/226)

13화

파지지지직! 큐우웅!

백색 깃발이 나부끼는 길쭉한 창에서 강력한 뇌전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돌격하려던 성기사단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번개의 기세가 사뭇 위협적인 데다가, 상대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뇌전의 여전사…….”

은빛 갑옷을 입고 깃발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여인.

바로 스페인을 대표하는 S급 헌터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였다.

에스파뇰의 구세주, 임시 정부의 꽃, 전선의 철벽 등 그녀에게는 몇 가지 별명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명한 건 바로 뇌전의 여전사라는 칭호였다.

성기사단장마저도 한 수 접어야 할 만큼 대단한 명성이었기에, 진격은 즉각 중단되었다.

아무래도 루시아는 바티칸 시국에서도 인정하는 의인이라, 그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냥 밀고 들어가면, 제아무리 뇌전의 여전사라해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 사실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은 성기사들은 단장을 돌아보았다.

“비키시오!”

신성력을 발한 오렌시오는 괜히 검을 휘두르며 그녀를 위협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물러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철컥! 지지지직!

그저 바닥에 꽂힌 깃발 창을 뽑으며 뇌전을 마구 뿜어낼 뿐.

접근하면 족족 머리통을 꿰어 버릴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오렌시오 단장은 괜히 빅트리치오를 힐끔거리며 명령을 내렸다.

혹시라도 성자회주가 전공을 탐하기 위해서 달려들지 않을까 하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빅트리치오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길을 막은 상대가 루시아라서, 먼저 움직이기가 저어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성자회는 이제껏 물밑에서 뒷공작만 벌이던 존재인데, 선뜻 선봉에 서겠냐 싶었다.

결국에 오렌시오 단장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고귀한 분들의 명령이다. 안타깝지만 밀어 버리는 수밖에……. 공격하라.”

“예!”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앞으로 불쑥 나서는 게 아닌가.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성기사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단장을 돌아보았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작전을 수행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앞으로 튀어 나간 자가 바로 바티칸의 성검이라, 잠시 머뭇거린 것이다.

“잠시 기다려라.”

요한은 오른팔을 쭉 펼치며 성기사들의 개입을 억제했다.

이윽고 루시아는 바티칸의 성검과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깃발 창을 바닥에 다시 꽂았다.

척!

당장은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모습을 본 요한도 허리춤의 검을 풀어 등 뒤에 대충 묶었다.

“오랜만이군요.”

“그러게요. 여기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전선에 계셔야 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대천사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겠죠.”

“…….”

두 사람은 프랑스 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력이 있었다.

바티칸 시국은 스페인을 꽤 중요하게 여겼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해 준 건 아니었다.

그저 로마까지 오염 지대의 마수가 뻗치지 않도록 막는 데만 열중했을 뿐.

사실 당시에는 그렇게 해 줄 만큼 교황청의 역량이 충분하지도 않았다.

대천사가 강림한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달랐지만.

“전우를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지금 저더러 물러나란 말인가요? 동료들을 버리고?”

“그럼 목숨은 부지하실 겁니다. 천주께서는 변절자까지도 용서하시니까요.”

“유다도 구원받을 거란 말씀이시군요?”

“그건…….”

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 탓인지, 요한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루시아의 대답을 촉구하는 듯한 눈빛과 마주하자,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상황이더라도 결단코 물러설 수 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방금의 요구는 전우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공허한 제안이었을 뿐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바티칸의 성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요한이 할 수 있는 건 사죄밖에 없었다.

신성력을 다루는 자에게 대천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껏 자신이 배워 온 신학과는 동떨어진 행위였다.

대체 어떤 종교가 인류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아군을 도륙하라고 가르친단 말인가.

위선으로 고고한 척 포장해 봤자 진실을 가릴 수는 없었다.

“덤비실 겁니까?”

“아무래도 저들보다는 제가 더 신사적일 겁니다.”

“역겹군요. 결국에 당신도 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니…….”

“신성력을 지닌 자의 숙명이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요.”

스르릉!

요한은 등 뒤로 돌려놓았던 손잡이를 붙잡고 검을 느릿하게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루시아도 바닥에 박아 두었던 깃발 창을 갈무리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그 지독한 침묵을 깬 건 루시아나 요한이 아니었다.

후우우웅! 콰아아앙!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검붉은 물체가 성기사단의 진형을 냅다 깨부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두 사람은 황급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거인이 몸을 일으키며 호기롭게 외쳤다.

“아, 선빵 필승!”

불꽃이 이글거리는 주먹으로 성기사들을 내려치는 존재는 바로 태구였다.

녀석은 팔을 망치 모양으로 변형한 상태였다.

마치 두더지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쾅! 콰광! 쾅!

“크아아악!”

폭음과 함께 성기사들이 우수수 죽어 나가자, 요한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불현듯 시선을 다시 돌렸는데, 루시아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거대한 암청색 낫을 휘두르는 다크 엘프 소녀 레니, 수백 명의 분신으로 성스러운 군대를 압박하는 DK.

뱀파이어 무리와 함께 성자들을 암살하는 쿠르단까지.

블라드 유진을 지키기 위해서 물러나 있던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지원해 준 것이다.

대천사를 상대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지만, 인간 군대쯤이야 충분히 박살 낼 수 있었다.

―쟤도 적이야?

루시아의 곁에 다가온 레니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귀여운 소녀가 한 말이었으나, 왠지 모를 스산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 몰라.”

―그래? 언제 알게 돼?

“저 사람이 대답하는 순간.”

―그럼 가서 물어보자.

스윽.

연기처럼 흩어진 레니의 신형은 요한의 지척에서 불쑥 나타났다.

“헙!”

그러자 바티칸의 성검은 헛바람을 삼키며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너무도 신속하고 은밀한 사령보에 깜짝 놀란 탓이었다.

―에이.

요한이 저만치 멀어지자, 레니는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루시아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잠깐만, 근데 유진 님은?”

레니를 비롯한 동료들은 블라드 유진의 주변을 지키는 중이었다.

그와 주종 관계로 묶여 있어서 명령 없이 곁을 벗어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천사의 막강한 신성력으로 인해 힘을 못 쓰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유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이토록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건…….

―저길 봐.

레니는 태연하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조막만 한 손가락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던 루시아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녹턴에 탄 블라드 유진이 허공을 누비며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표출하는 중이었으니까.

“아아…….”

그의 건재한 모습을 목격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승리를 향한 희망과 유진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합쳐진 복잡한 심경이었다.

* * *

―드디어 돌아온 거냐?

엔세데스는 담담한 어조로 의념을 보냈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화룡왕은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우군만큼 반가운 존재는 없었으니, 사실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머나먼 곳까지 유희를 나왔다가 웬 타 차원의 존재에게 소멸당할 위기에 처했으니까.

소수혈인을 휘둘러 가브리엘의 접근을 차단한 자는 바로 블라드 유진이었다.

그는 강력한 피의 권능을 뿜어내어 대천사를 한순간에 밀어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괴력이었다.

유진은 조금 지친 듯한 엔세데스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이 많았겠군.”

―보시다시피. 저쪽은 둘이 아니라, 무려 셋이라고.

“그래. 그것도 더 센 놈이 나왔네.”

가브리엘, 라파엘에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바로 미카엘.

기존에 활동하던 두 대천사도 상대하기 벅찰 지경인데, 더욱 강력한 자가 강림하고야 말았다.

아무래도 교황청에서 광진의 성배 없이 차원문을 여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빠르게 직면하게 될 줄은 몰랐군.”

그는 천사장을 올려다보며 불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대천사들은 그렇다 쳐도 미카엘은 천상계에서도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였으니까.

달리 천주가 가장 신뢰하는 전사라 불리겠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지. 이미 배수의 진은 쳐졌다.’

블라드 유진은 제단을 둘러싼 우윳빛 신성 방어막과 미궁으로 진입한 교황청의 군대를 쭉 둘러보았다.

그가 깨어났을 시점에 도망칠 곳 따위는 아예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마왕의 권능에 힘입어 저 가증스러운 신의 사자들을 쳐부수는 것뿐이었다.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멀찍이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는 키에리 라비에스가 보였다.

그녀는 이 싸움에 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지구 침공도 반대한 마왕인데, 천상계와의 전쟁에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처럼 작은 도움만 주고, 응원이나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럼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스이이잉! 츠츠츠츠츠!

블라드 유진이 오른팔을 쭉 펼쳐 내자, 검붉은 칼날이 수십 미터까지 늘어났다.

마왕으로부터 초월적인 피의 권능을 이식받았더니, 스킬 자체의 색상과 위력이 바뀌어 버렸다.

소수혈인은 거의 천계도살검만큼 강력한 마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뒈져라. 신의 개들아.”

스핏―!

그는 녹턴의 등에 탄 채로 팔만 움직여 허공에 선을 그려 냈다.

검붉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가자, 가브리엘은 잽싸게 단창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는 라파엘이 생성한 성화가 떨어져 내렸다.

유진이 부활하든 말든 신성력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하여 그냥 압살해 버리려는 의도였다.

―설사 네놈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우릴 이길 수는 없다.

―소멸하라! 패배자여!

쿠콰콰콰콰!

백색 단창에서 고도로 응집된 신성력이 쏘아지고, 성화가 팔랑거리며 후방을 노렸다.

하지만 그가 전개한 소수혈인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씹어 먹고 있었다.

표현 그대로 깡그리 삼켜 버린 것이다.

슈후우우웅! 뚜웅!

순간적으로 뚱뚱해진 검붉은 칼날 내부에서 억눌린 폭음이 들려왔다.

압축된 신성력이 피의 권능과 부딪치며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힘은 외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만 맴돌다가 사그라져 버렸다.

―저, 저런!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그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들의 시선은 자연히 미카엘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천사장은 감정 없는 의념을 쏘아 보냈다.

―망설이지 말라. 천주께서 말씀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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