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아!
―…….
순간 가브리엘은 낮은 탄성을 내뱉었고, 반면에 라파엘은 침묵했다.
뒤에서 불현듯 강력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두렵고도 익숙한 기운에 두 대천사는 상대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셨습니까? 천사장(天使長)이시여.
―반갑습니다. 미카엘 님.
에메랄드빛 날개에 불타는 듯한 자주색 머리칼의 미청년.
정의의 화신이자 거룩한 천사장, 천주가 가장 신뢰하는 대천사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은 짤막한 황금색 검을 들고 있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으며, 족히 수십 미터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저것이 바로 신의 무기고에서 가져온 천상계 최고의 명검.
미카엘의 상징적인 무기, 징벌의 검이었다.
―한심하군. 저딴 수준의 적을 아직도 붙잡고 있다니 말이야. 계획과는 다르지 않나?
미카엘은 나머지 두 대천사를 담담한 음성으로 질책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잽싸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저항이 너무 거셌습니다만,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
가브리엘이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라파엘은 표정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는 게 이득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카엘의 무미건조한 호통이 머릿속을 서늘하게 울렸다.
―저항이 거세다고 일을 못 할 정도라면, 대천사 직을 내려놓아야지.
―그, 그런…….
―뭣 하나? 당장 뚫지 않고.
―알겠습니다! 천사장이시여!
가브리엘은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긴 의념을 보내고는 황급히 단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라파엘의 은밀한 말이 슬쩍 끼어들었다.
―자네는 아직도 천사장님을 모르나? 잡설을 지껄일 동안에 움직이는 걸 훨씬 좋아하시잖아.
―너나 좀 그러지? 내가 말로 두들겨 맞는 동안, 눈치만 살살 봐 놓고 훈수는?
―크흠!
두 대천사는 아웅다웅하면서도 앞다투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좀 더 힘을 빼놓은 다음에 덮칠 작정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천상계에서 가장 강력한 우군이 그들을 지원하러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미카엘의 강림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단지 이토록 빠르게 전장에 나타나 불시 단속을 할 줄은 몰랐을 뿐.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금세 대천사 특유의 딱딱한 표정으로 공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콰과과광!
―크윽! 저놈이 나타난 이후로 더욱 까다로워졌어.
공세를 가장 많이 받아 내는 중인 엔세데스는 변화한 분위기를 금방 알아챘다.
놈들은 의념으로 소통했기에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 때려 맞힐 수 있었다.
뭔가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힘을 불어넣어 줬기에 저러는 것이리라.
물론 실제로 그건 신성력이 아니라, 심리적인 압박감일 뿐이었지만.
어쨌거나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대폭 줄어든 건 사실이었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앞뒤 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난사하고 있었으니까.
“이거 승산이 있긴 한 건가요?”
혼란한 와중에 툭 내뱉은 거였지만, 화룡왕은 다이애나의 음성을 정확히 포착했다.
―사실 미래가 별로 없긴 해. 어떻게든 내빼고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는데…….
엔세데스는 신성력 장벽에 가로막힌 공간 이동 제단을 힐끔 돌아보았다.
현 상황에서 최선은 대천사들의 공세를 밀어내고, 신성력 장벽을 박살 내는 방법뿐이었다.
그러고 버지니아주로 넘어가 미(美) 헌터 연합군과 함께 덫을 치고 기다리는 것.
제단은 대략 1시간의 재사용 대기가 있으니까, 그 틈을 타서 전열을 가다듬을 수도 있었다.
물론 미 헌터 연합군과 함께하고도 패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대천사들의 능력을 보아하니, 아마도 무지하게 어려운 싸움이 될 터였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다른 길은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든 저걸 치워 보겠습니다.”
―좋아. 뭐라도 해 보자고.
루시아의 제안에 화룡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고민하고 시간 끌어 봐야 아군의 피해는 늘어나고, 희망은 사라져 가기만 할 것이다.
뭘 어떻게 하든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게 좋았다.
루시아가 이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천사들과 엔세데스의 격돌이 개시되었다.
드디어 EX급의 존재들 간에 근접 박투가 시작된 것이다.
―하아압!
비유우웅! 콰칭―!
수십 미터 크기로 확대된 가브리엘의 단창이 화룡왕의 방어막 위에 작렬했다.
그러자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으음…….
엔세데스는 괜히 의연한 척 낮은 신음을 흘렸지만, 실제로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방금의 그 일격에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가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마나를 불어 넣어서 어떻게든 봉합할 수 있지만, 연타가 시작되면 그마저도 무용지물.
방어막이 박살 나면 아마 가브리엘은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말 터였다.
화룡왕의 건재함은 그저 허장성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헬 파이어 오브 슈퍼포지션(Hell fire of superposition).
위이이이잉!
결국에 엔세데스가 택한 건 반격이었다.
차원 분할 방어막을 한순간에 치워 버리고, 시퍼런 불덩어리를 냅다 발출한 것이다.
드래곤 브레스보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으나, 헬 파이어는 무려 9서클 마법.
쉽사리 무효화 할 수 없는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의 비기로, 수십 개의 화염구가 겹친 상태였다.
적중한다면 분명 확연한 효과가 있으리라.
쉬이익! 쿠화아앙!
목표 지점에 도달한 헬 파이어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수만 켈빈에 달하는 초고온의 화염은 순식간에 가브리엘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화룡왕은 인상을 쓰며 잽싸게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로 전방을 가려야만 했다.
―억겁의 성화!
쿠르르르르!
새하얀 빛에 휩싸인 가브리엘이 시퍼런 불길을 뚫고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문득 시선을 위로 올려 보니, 성화를 마구 뿜어내는 라파엘의 신형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자가 엔세데스의 반격을 예측하고 미리 대비했음이 틀림없었다.
―젠장 이러면 나가린데…….
최소 하나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회심의 일격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다.
안타까웠지만, 아쉬움을 표할 시간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헬 파이어를 극복한 가브리엘이 지척까지 다가와서 단창으로 방어막을 후려갈겼으니까.
콰칭! 쩌엉! 쩌저적!
―젠장.
단 두 번의 공격에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는 수많은 균열을 보였다.
반격을 가하느라 미처 봉합하지 못한 탓에 붕괴가 가속화 한 것이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분투하는 루시아와 다이애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은 온갖 스킬을 난사하며 화룡왕에게로 접근하는 성화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제 그런 노력도 무용지물이 되게 생겼다.
―마나가 충분했더라면…….
애써 희망적인 가정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내 엔세데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마 엘칸 차원에서처럼 최고의 상태였더라도 승산은 별로 없을 터였다.
셋이나 되는 대천사와 싸우는 건, 마계로 치면 마왕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제아무리 레드 드래곤의 수장이라고 해도 이런 미친 수준의 적수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끝이다. 너절한 엘칸의 도마뱀이여.
가브리엘은 수십 배로 확대된 단창을 호쾌하게 휘둘렀다.
물론 패색이 짙다고 해서 엔세데스가 포기한 건 아니었다.
화룡왕은 남은 마나를 쥐어 짜내더니, 최후의 일격을 전개하려 했다.
당연히 드래곤답게 마지막 한 방 또한 마법이었다.
―인피니티 프로…….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쑤욱! 쩌저정!
어디선가 시뻘건 무언가가 날아들더니, 가브리엘의 단창을 튕겨 내 버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엔세데스가 돌아보자, 유령 군마에 탄 반가운 얼굴이 시뻘건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반격의 시간이로군.”
“……!”
* * *
“진입! 진입!”
“들어가서 마기를 몰아내라! 고귀한 분들을 지원해야 한다!”
교황청의 성스러운 군대는 이제 막 미궁에 입성한 상태였다.
한창 대천사들과 레드 드래곤의 교전에 벌어지는 중이라, 길을 찾는 건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전장의 위치를 확인하자, 성기사단장과 성자회주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 뒤편에 모인 자들이 보이십니까? 블라드 유진과 사악한 일당들입니다.”
“화룡은 고귀한 분들께서 맡아 주실 테니, 곧바로 들이쳐도 될 것 같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한데, 자비단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습니다만.”
“고작 서른 명 남짓입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악마라 할지라도, 저런 수준으로 성스러운 군대를 막을 수는 없지요.”
“음. 아마도 그렇겠지요. 성검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성자회주 빅트리치오는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요한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바티칸의 성검은 교황청의 유일한 S급 성기사, 신도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는지라, 예의상 의견을 물어본 거였다.
그러자 요한은 영혼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답했다.
“제 의견이 필요한 시점인가요? 여기서 퇴각하자고 하면, 돌아갈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근데 뭘 묻습니까? 그냥 하던 대로 전부 죽이고 불사르면 되지요. 그게 교황청의 방식인데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 말이 틀렸다면, 반박해 보십시오. 괜히 말꼬리나 잡지 마시고.”
“…….”
날카로운 답변이 날아들자, 성자회주는 성기사단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바티칸의 성검은 기본적으로 성기사단에 속한 존재.
율령 상으로는 신임 단장인 오렌시오에게 지휘권이 있었다.
하지만 요한에게 명령을 내릴 간담을 지닌 성기사가 어디 있으랴.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인데 말이다.
당장 바티칸의 성검에게 쓴소리를 했다간 주변의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성기사 중에는 요한을 믿고 따르는 인물이 많았으니까.
물론 대천사가 곁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크흠! 천주의 사자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지체할 이유가 없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 그래요. 그냥 따르면 되는 겁니다. 천상계의 명인데요.”
성기사단장과 성자회주는 괜히 대천사들을 거론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요 성기사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요한의 신망이 두텁다고 해도 대천사의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내 성스러운 군대는 성자회주의 주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블라드 유진을 둘러싸고 마기를 주입하는 중인 어둠의 존재들에게로 말이다.
척! 척! 척!
발맞춰 걸어가는 교황청 병력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들이 뿜어낸 신성력으로 인해 마기가 절로 걷힐 정도였으니까.
점차 시야가 잘 확보되자, 성스러운 군대는 목표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확실한 악의 종자들이다!”
강력한 마기를 품은 자들은 신성력 방어막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내 성기사단장 오렌시오는 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성기사단 돌격!”
“이, 이런……!”
성자회보다 더 많은 전공을 차지하기 위해서 냅다 선수를 쳐 버린 것이다.
빅트리치오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퍽!
은빛 무언가가 날아들더니, 지면에 쑤셔 박히며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했다.
“거기까지!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