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일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키에리 라비에스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런 기세도 발하지 않았는데, 블라드 유진은 거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역시 마왕인가.’
순간적으로 카이넬의 신안을 쓰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 마왕과 싸울 것도 아니고, 재사용 대기가 한 달이나 되는 스킬을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유진은 키에리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계약 조건은?”
“시원시원해서 좋군. 간단해. 최후의 순간이 도래하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거로.”
“최후의 순간?”
“마계와 천상계의 침공 의지가 꺾일 때. 그 정도면 이 싸움의 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부탁이 뭔지 궁금하군.”
“그리 어려운 건 아니야. 거절해도 되고.”
“…….”
다른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에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반적인 계약은 상대의 행동을 강제하기 마련이었다.
쿠르단을 비롯한 뱀파이어 무리와의 계약 또한 충성과 보호를 동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키에리 라비에스의 제안은 느슨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어떤 바보가 저런 계약을 한단 말인가.
한데, 일방적으로 자신이 유리한 조건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오늘 처음 본 상대가 아닌가.
‘물론 피로 연결이 되어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도 먼 친척은 그냥 남이 아니었던가.
블라드 유진은 마왕의 저의가 뭔지 유추할 수 없어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의 기색에 키에리는 자신의 가슴팍을 통통 치며 답답함을 피력했다.
“지금 이거저거 따질 때야?”
“……하긴 그렇군. 내가 뭘 가릴 처지가 아니지.”
“그럼 받아들이는 거다?”
“좋아.”
“진작에 그럴 것이지.”
퉁명스러운 한 마디를 툭 내뱉은 그녀는 유진의 지척으로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입에서 새빨간 화염을 쏟아 내는 게 아닌가.
‘이건…….’
불꽃이 피의 권능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극도로 정순한 힘의 원천이라,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잠깐 멈칫한 사이, 키에리는 블라드 유진의 입술을 그대로 덮어 버렸다.
아무래도 공기 중으로 새어 나가는 피의 권능을 최소화하려는 모양이었다.
“어익후!”
“크흠흠!”
“…….”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태구와 DK, 쿠르단은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반면에 레니는 델레오 아르마를 뽑아 들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아줌마가 누구 입술을 노리는 거야!
“마기 주입에 필요한 절차야. 너도 알잖아.”
―난 몰라! 이 성추행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태구는 마그마를 진땀처럼 뻘뻘 흘리며 레니의 발악을 말렸다.
이럴 때 보면, 정신 연령은 태구 쪽이 더 높은 것 같았다.
물론 평소에는 반대였지만.
잠시 후, 키에리 라비에스는 권능의 주입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났다.
드디어 치료가 완전히 끝난 모양이었다.
번―쩍!
블라드 유진이 눈을 뜨는 순간, 시뻘건 광선이 앞으로 쭉 쏘아졌다.
그저 안광일 뿐이라 파괴력은 없었지만, 일순간 드러난 기도는 대단했다.
그는 반개한 눈으로 주르륵 떠오른 홀로그램 글귀를 읽고 있었다.
[진정한 피의 제왕 ‘키에리 라비에스’의 권능이 주입되었습니다.]
[레벨이 500만큼 상승합니다.]
[수코의 인장에서 진정한 힘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멸의 권능이 고유 스킬로 등록되고, 관련 페널티가 상당 부분 완화됩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신격이 지고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2,505
등급 : EX(Lv. 1,501~3,000)
종족 : 진정한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신
<스킬 정보>
명칭 : 파멸의 권능
등급 : ??? 위력 : ???
지속 시간 : 1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재사용 대기 시간 : 1시간 30분
효과 : 스킬 제한 제거, 능력치 증폭 극대화
마기를 무한히 생성하는 마신(魔神) 그 자체가 됨. 마왕의 권능으로 강화된 상태.
키에리의 권능을 받은 효과는 굉장했다.
레벨이 500이나 오른 것도 대단했지만, 그보다는 파멸의 권능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게 확 끌렸다.
게다가 정보창을 보아하니, 스킬 자체도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대천사를 끝장낼 수도 있겠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유진은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중인 전방을 가만히 응시했다.
엔세데스와 루시아, 다이애나는 그야말로 분투하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구와 레니, 쿠르단을 비롯한 뱀파이어 무리.
이들은 대천사의 영향력 때문에 나서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놈이 하나 보였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신성력에 치명적이지도 않잖아?”
“아하하……. 괜히 나섰다가 혈성쇄혼술이 또 깨질까 봐서요.”
DK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턱도 없는 변명을 주절거렸다.
“됐다. 너흰 저것들이나 막아.”
유진은 마기의 구름을 뚫고 접근 중인 성스러운 군대를 가리켰다.
어느새 교황청의 군세는 공간 이동 제단 근처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넵! 알겠습니다.”
냅다 거수경례를 붙인 DK는 나머지 일행을 이끌고 이동했다.
그들을 보내고 나자, 제단 앞에는 블라드 유진과 키에리만 남게 되었다.
“이제 어쩔 작정이지?”
“난 그냥 구경이나 할래.”
마계의 지구 침략도 반대했던 마왕다운 대답이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쭉 걸어 나갔다.
그런데 문득 지면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검붉은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푸르르르!”
유진의 그림자 속에 잠자코 숨어 있던 녹턴이었다.
“그래.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갑다. 오랜만에 날아 볼까?”
“이히히힝!”
녀석의 등에 오른 그는 전장의 중심으로 쾌속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 * *
번―쩍! 콰칭!
―크으윽!
하늘에서 번득인 백광과 함께 엔세데스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레드 드래곤의 거체가 밀릴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를 들어 올렸지만, 타이밍이 다소 늦어 공격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 버리지 못했다.
―뭐지? 이건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야?
방금 화룡왕에게 날아든 일격은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것이 아니었다.
단창과 지팡이에서 뿜어진 황금 채찍은 방어막이 확실하게 막아 내고 있었으니까.
엔세데스의 당혹스러운 의념이 전해졌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백색 단창의 폭격을 피해 내는 데에 온 정신을 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투두두두둥!
화룡왕이 잽싸게 방어막을 내려 주자, 그제야 잠시 숨돌릴 틈이 생겼다.
“헉! 헉! 뭐가 날아왔어요?”
―방금 예상 궤적을 벗어난 공격이 있었다. 충격이 상당하더군.
“그래서 갑자기 저희에게 날아든 것들이 많아졌군요.”
―그래.
“그냥 가브리엘 저놈이 던진 창은 아니고요?”
―전혀 다른 곳에서 날아들었어. 기척도 없이 말이야.
“또 다른 적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무래도 기분 탓은 아닌 듯한데…….
워낙 불의의 일격이라, 엔세데스도 살짝 긴가민가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잡설이나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천사들의 공격은 너무도 맹렬한 데다가, 이제 교황청의 군대가 지척까지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합류한다면, 어찌어찌 막아 내고 있던 백중세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거 큰일이로군.
“잠깐만요. 저거 우리 일행 아닌가요?”
그런데 문득 다이애나가 오른편을 가리키며 외쳤다.
투사체를 막으며 슬쩍 시선을 돌려 보니, 블라드 유진을 지키던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DK가 천군압쇄로 수많은 분신을 만든 덕택에, 마치 두 개의 군대가 격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더 곤란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경호를 최소한으로 낮춘 모양이었다.
―유진은……. 안 보이는군. 어디다 숨긴 건가?
“그랬으니 우리 편이 저렇듯 자유롭게 활동하는 거겠죠?”
―일단은 싸움에 집중하지. 이러다가 방어가 뚫리겠어.
“알겠습니다. 방어 스킬 돌았어요. 이제 잠깐 방어막을 해제하셔도 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스팟!
엔세데스가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를 없애 버리자, 미리 합을 맞췄던 두 사람이 전면으로 나섰다.
“갑니다! 흐아아압! 풀제트라 데펜시오(Fulgétra Dēfénsĭo)!”
“수호의 진언!”
백색 깃발을 온몸에 칭칭 감은 루시아가 뛰쳐나가자, 곧장 다이애나의 방어 버프가 날아들었다.
치직! 치지지직!
뇌전에 휩싸인 루시아는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물론 물질보다는 에너지가 더욱 빠르게 흡착되었다.
쉬쉬쉬쉭! 터더덩!
가브리엘이 던진 단창이 몽땅 빨려와서 충돌하자, 수호의 진언이 단번에 깨졌다.
하지만 아직 루시아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풀제트라 데펜시오가 부여한 방어 능력이 충격을 모두 상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천사의 공격을 막아 낼 정도로 우수한 차단력을 보여 주었으나, 사실은 하자가 많은 스킬이었다.
지금처럼 초반을 버텨 줄 보호 버프가 있을 때만 사용 가능했다.
이유는 풀제트라 데펜시오에 첫 타격을 아예 방어하지 않는 페널티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걸 썼다가 한 방 맞고 골로 가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거의 봉인해 둔 스킬이었지만, 다이애나 로즈가 함께할 때는 달랐다.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지금처럼 모든 투사체를 다 집어삼키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으으으! 더 이상은 못 버텨요!”
한계까지 대천사들의 공격을 막아 내던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 차례로군.
그러자 곧장 엔세데스가 나서며 방어막을 둘러 주었다.
하지만 이내 화룡왕은 허탈한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허! 빌어먹을……. 도무지 공격할 수가 없잖아?
방어하는 것도 벅찰 지경이라, 반격은 꿈꿀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완급 조절을 하면서 버프를 돌리던 다이애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자연의 비약 하나만 있으면, 가능하긴 한데요.”
―당장 방어막에 쓸 마나도 없는데, 비약을 어떻게 꺼내? 게다가 지금은 못 해. 아공간을 여는 건 상당히 섬세한 작업이거든.
“아, 그런가요?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저 괴물들은 지치지도 않나?
엔세데스의 말대로 대천사들은 무수히 많은 공격을 쏟아 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묵묵히 투사체들을 던져 낼 뿐이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슬슬 지쳤을 텐데, 근접전으로 가도 되지 않나?
―괜히 들어갔다가 낭패 보는 건 아닌지…….
―어차피 지금은 블라드 유진도 없지 않나?
―아직 저 레드 드래곤의 진짜 능력도 모르는 상황이다. 무리하는 건 위험한 판단이야.
―한 방 제대로 맞고 골골대더니, 간이 작아졌군.
―그러는 너야말로 먼저 나가지 그래?
―미안하지만 난 원거리 취향이라.
―하!
라파엘이 황금빛 채찍을 회수하며 빈정대자, 가브리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전에 안전한 공략을 합의하고 작전대로 하는 중인데, 저딴 망발이라니.
내로남불이라는 인간들의 말이 문득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직도 뚫지 못했나?
어디선가 쩌렁쩌렁 울리는 의념이 날아와 두 대천사의 뇌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