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주입하고 있는 거 맞아?”
“안 보입니까? 여기 쭉쭉 들어가고 있잖아요.”
“차도가 전혀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DK는 낑낑대는 쿠르단을 향해서 핀잔을 주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대화는 거침없었다.
DK가 붙임성 좋은 성격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아예 종족이 다른 쿠르단은 영 마음에 안 드는 듯했지만.
아마 일행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면, 피를 쪽 빨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도 도울게.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가 없자, 보다 못한 레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녀 또한 마기를 다룰 줄 아는 종족이니,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태구는 심드렁한 이모티콘을 얼굴에 띄우며 늑장을 부렸다.
“사방 천지가 다 마기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함?”
―제어할 수 있으면, 넣어 보든가.
“그러넹.”
―잔말 말고 와서 도와. 어차피 저 괴물들하고 싸울 것도 아니잖아.
“응. 쌉인정.”
어쭙잖은 실력으로 대천사에게 덤볐다간 한 줌의 흙이 되어 흩날릴 게 뻔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태구는 쿠르단의 옆으로 가서 마기 주입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으나, 블라드 유진은 여전히 깨어날 줄을 몰랐다.
“으어……. 나쥬겅.”
―이거 힘드네.
마기를 과도하게 방출했더니, 레니와 태구는 금방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쿠르단 또한 진작에 주입을 멈추고, 부하들을 순서대로 돌리는 중이었다.
서른 명이 넘는 뱀파이어가 달려들었지만,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젠장…….”
쿠콰콰쾅! 퍼엉―!
그러는 동안에도 전황은 점점 좋지 않게 치닫고 있었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휘두르는 성물은 이곳까지 닿을 정도로 강렬한 신성력을 뿜어냈다.
다크 엘프나 뱀파이어, 몬스터로 구성된 일행은 몸서리치며 눈치를 봐야만 했다.
“곤란한 모양이네.”
한데, 난데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퍼뜩 고개를 돌리자, 자비단의 백색 갑옷을 입은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진한 갈색 머리칼, 뇌쇄적인 표정과 야릇한 눈빛이 특징적이었다.
“거기서 멈춰라.”
―정체를 밝혀라.
레니는 곧장 여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태구 또한 이글이글 타오르는 마그마를 분출하며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렸다.
여차하면 냅다 킹받는 펀치를 날려 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쭉 걸어왔다.
그러자 레니가 델레오 아르마를 휘둘러 접근을 차단하려 했다.
후웅!
하나, 거대한 암청색 낫은 허공만 갈랐을 뿐이었다.
치직! 치직!
여자는 마치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텔레비전의 화면처럼 전신이 깜빡거렸다.
찰나의 순간에 몸을 움직여서 레니의 공격을 피해 내고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 초월적인 기예에 일행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상대의 몸놀림이 가공할 수준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유진의 곁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쿠르단이 앞으로 불쑥 튀어 나가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대뜸 여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군주시여.”
“날 알아보나 보군.”
“피와 어둠의 권속이 어찌 군왕을 몰라볼 수 있겠습니까?”
“어디 보자. 네놈들 모두 서약을 철회했구나? 어쩐지 주군이라 부르지 않더라니.”
“그것이…….”
난데없는 상황에 DK와 레니, 태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여인과 뱀파이어 녀석이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으니까.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답답했던 모양인지, 태구는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DK는 일단 들어 보자는 제스처로 태구를 제지했다.
“군주께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저희가 서약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피의 계약이 저절로 해제된 것이지요.”
“하긴 그럴 만도 할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르긴 했지.”
쿠르단의 해명에 여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문득 시선을 들것에 누워 있는 블라드 유진에게로 옮겼다.
“새로운 주군은 어떻더냐?”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는 꽤 괜찮은 녀석 같았는데. 마왕으로 등극해도 될 정도로 말이야.”
“그런 불경한 말씀을…….”
“입에 발린 소리는 됐어. 그나저나 적의가 너무 강한데? 설명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시간이 너무 없군.”
여인은 스멀스멀 살기를 뿜어내는 중인 태구와 레니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쿠르단이 은밀하게 DK와 시선을 맞췄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설득은 제가 하겠습니다.”
“고맙군.”
여인이 곁을 지나치자, 쿠르단은 일행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고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저분은 진정한 피의 제왕, 마계의 지배자 키에리 라비에스 님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뱀파이어의 시초라고 할 수 있죠.”
DK와 태구는 어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레니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블라드 유진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 외에는 그저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헌터 정도로만 인식했다.
혈액의 갈증과 항성풍 취약점이 완전히 사라져서, 뱀파이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아아? 그랭? 어쨌거나 이 아줌마는 적이 아니라는 거지?
“아, 마왕이면 마기가 엄청나게 센 거 아님? 그거 주입하면 형아가 멀쩡해지겠는데?”
―그래? 그럼 저 여자를 쥐어짜서 주인 몸에 마기를 넣어 주자.
키에리의 정체가 밝혀졌지만, 둘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저분이 주군을 고쳐 주시긴 할 건데, 그렇다고 쥐어짠다는 표현은 좀…….”
쿠르단이 표현을 정정했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키에리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치료하는 걸 구경할 뿐이었다.
혼자 남은 쿠르단은 뱀파이어 수하들을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저렇게 수긍이 빨라? 쟤네 생각 있는 거 맞아?”
“…….”
* * *
“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물음표를 가득 띄운 태구의 머리통이었다.
녀석은 목을 길게 빼고 수직으로 블라드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깨어나자마자 태구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봐야만 했다.
“재수도 없군.”
유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임은 틀림없었다.
신성력과의 지독한 사투 끝에 간신히 연명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몸을 일으키려 하자, 누군가가 잽싸게 등을 받쳐 주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울먹울먹한 눈망울의 레니가 있었다.
“고생 많았겠구나.”
―웅. 주인 왜 이제 살아났어?
“후우……. 적들이 너무 강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사르데냐섬의 미궁이야. 여기 이 아줌마가 살려 줬어.
손끝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상당히 빡친 표정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줌마라니? 본녀를 그따위로밖에 지칭하지 못하겠느냐?”
첫 만남부터 꽤 털털한 모습이었지만, 블라드 유진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것이다.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여인의 전신을 훑더니,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황금색 팔찌의 표면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뾰족한 두 개의 삼각형 아래에 그려진 두 개의 타원.
일족을 상징하는 인장이었다.
“키에리 라비에스……. 최초의 뱀파이어.”
“호오?”
유진의 중얼거림에 여인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이토록 단박에 맞힐 줄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날 알다니 신기하군. 우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을 텐데?”
“그냥 찍었다.”
“뭐?”
“날 살릴 만큼 정순한 마기. 이만한 피의 권능을 보유한 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게다가 키에리 라비에스는 오랫동안 실종된 상태. 마계가 아무리 넓다고 하나, 마족들이 찾지 못했을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역시 내 손자의 손자의 손자야.”
“……그 정도로 세대를 오래 거친 건가?”
“아니, 나도 몰라. 여기 계보가 어찌 이어져 왔는지 알게 뭐람. 내가 다시 지구로 돌아온 건 얼마 전인데 말이야.”
상대는 자신이 키에리 라비에스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난데없이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모양인지, 키에리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궁금한가 보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간단해. 난 다른 차원을 통폐합하는 걸 반대했거든.”
“왜지? 이득이 되니까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
“이거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음……. 지구를 예로 들면 말이야. 마계가 타 차원을 잡아먹는 건 일종의 국가 통일과도 같아.”
“마계에서도 손해를 감수하는 합병이란 말인가.”
“바로 그거야. 지구에까지 마기를 공급하려면, 마계도 허리가 휠 수밖에 없겠지? 물론 성공한다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어. 그런데 만약 실패했을 때는?”
“피해가 막심하겠지. 그러고 보니, 엘칸 차원도 제대로 집어삼키지 못하지 않았나?”
“이야! 되게 똑똑한데? 거기까지 유추하다니 말이야. 엘칸에서는 절반의 성공만 얻었어. 암흑 제국까지는 먹어 치웠는데, 신성 교국은 도무지 넘볼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지구로 시선을 돌린 거지.”
“그런데 여기도 만만치 않았나 보군.”
“그래, 맞아. 저걸 좀 보라고. 천상계 놈들이 눈독을 들이는 바람에 일이 어렵게 되었어. 거기다 너라는 변수도 존재했고.”
키에리 라비에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엔세데스와 루시아, 다이애나가 기를 쓰고 대천사들을 막는 장면이었다.
“음…….”
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육신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신성력을 몰아낸 상태야. 멀쩡히 돌아갈 리가 없지.”
“그렇군.”
작게 주억거린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키에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개책을 찾는 거로구나?”
“뭘 해 줄 수 있지?”
“내가 지닌 피의 권능이라면, 네 몸을 순식간에 정상으로 되돌리는 게 가능해. 근데 내가 왜 그래야 할까?”
“날 살려 낸 이유와 일맥상통하겠군.”
“역시 내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
“잡설은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
블라드 유진의 단호한 말에 키에리 라비에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이내 표정과 분위기를 싹 바꾼 채, 오른손에서 시뻘건 기운을 생성시켰다.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을 정도로 강력하고 정순한 피의 권능이었다.
그녀는 곧이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약 하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