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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209화 (210/226)

9화

“여기서부터는 내가 듦.”

태구는 루시아와 다이애나에게서 들것을 냉큼 빼앗았다.

아무래도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녀석이 들고 가는 게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님들은 쫓아오는 괴물들을 상대해야 함. 어차피 나나 얘는 그놈들한테 아무 힘도 못 씀.”

“우리도 못 이기는 건 마찬가진데요. 뭐.”

“어쨌든 나 먼저 감.”

들것을 머리에 인 태구는 굉장한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그런 녀석의 뒤를 따라 달렸다.

몇 번 들락거렸다고 미궁 내부의 지형이 꽤 눈에 익었다.

스윽! 척.

마지막으로 진입한 엔세데스는 일행에게 날아가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대천사들이 지척까지 들이쳤지만, 곧장 진입해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화룡왕은 그 짧은 순간에 마법 트랩 몇 개를 던져 놓았다.

원터치 방식이라 위력은 별로지만, 추격을 어느 정도 저지할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웬 폭음이 이는 게 아닌가.

퍼펑! 콰앙―!

“에? 이게 무슨 소리죠?”

“마법 트랩을 깔아 뒀는데, 들어오다가 걸린 모양이로군.”

“근데 아무도 없는데요?”

루시아의 말대로 미궁의 출입구에는 개미 새끼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엔세데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상하군. 그냥 발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오작동 아닐까요?”

“내가 만든 마법 물품에 하자가 있을 순 없다네.”

“그럼 저건 뭘까요?”

“흠……. 오작동?”

화룡왕의 대답에 루시아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 자리에 전시영이 있었다면, 십중팔구 비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 정도 배짱은 없었다.

그저 묵묵히 달리기만 할 뿐.

이윽고 일행은 공간 이동 제단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쿠르단과 DK가 주변 지형을 한창 정리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다들 왜…….”

아직 상황을 모르고 있던 DK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이럴 시간 없어요. 작업 다 때려치우고 모여요!”

루시아의 외침에 DK와 뱀파이어 무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천사들이 티레니아해를 건넌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이토록 급하게 달려온 이유는 손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모양이로군요.”

“맞아요. 얼른 공간 이동을 해야 합니다. 혹시 이거 사용한 적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쿠르단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는 제단의 비석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비석의 문양에 손을 대자 보랏빛 기운이 올라오더니, 제단을 충만하게 밝혔다.

이제 이 상태로 올라서기만 하면, 곧장 버지니아주로 날아갈 수 있을 터였다.

“됐어요. 이제 출발…….”

한데, 밝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의 눈에 괴이한 백광이 포착되었다.

어두컴컴한 미궁의 하늘을 밝히며 마기를 쭉쭉 밀어내는 거대한 서광.

일행이 제단에 올라설 시간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수 킬로미터 높이에 떠 있던 백색 무언가가 가공할 속도로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그 물체는 정확히 일행과 공간 이동 제단의 사이를 갈랐다.

쐐애애액! 쩌저저정!

지면에 작렬한 백광은 좌우로 쭉 퍼져 나가며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마치 엔세데스가 대천사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시전했던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물론 훨씬 거대하고 가까이 가면 전신이 타는 듯한 신성력이 느껴진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어, 어떻게 벌써?”

다이애나 로즈는 어두컴컴한 하늘에 나타난 빛무리를 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저 두 존재는 이제껏 블라드 유진과 함께 겪었던 그 어떤 적보다 강력했다.

화룡왕 엔세데스조차도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하기에는 늦었습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예요.”

“그래야죠.”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대천사와의 전투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교황청의 군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지금쯤 차근차근 미궁 내부로 들어오고 있을 터였다.

웬만하면 저들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지휘를 부탁합니다.”

“나한테?”

“어차피 크게 개입하지 않으실 거 아닌가요?”

“흥! 이 판국에 균형 수호는 개뿔. 나도 그냥 전력을 다해 싸울 거다. 이건 저들이 촉발한 분쟁이니, 로드도 뭐라고 못 하겠지.”

루시아가 대뜸 지휘권을 넘기자, 엔세데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적들이 숨통을 끊으러 몰려왔는데, 언제까지 원리 원칙만 따지고 있는단 말인가.

차원 개입이고 나발이고 목숨부터 부지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렇다면…….”

“피의 권능 같은 정순한 마기를 주입하면, 정신을 차릴 수도 있다고 했지?”

“네, 쿠르단의 의견입니다. 체내에 침투한 신성력을 몰아내야 한다더군요. 일종의 이독제독(以毒制毒)이죠.”

“저 녀석들 모아서 시도라도 한번 해 봐. 아예 아무 도움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렇게 일러 두겠습니다.”

“큰 건 안 바라니까, 어디 잘 보조해 보라고.”

“예.”

화룡왕의 강한 전투 의지가 느껴지자, 루시아는 살짝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유진의 근처로 이동하여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는 동안 엔세데스는 붉은빛에 휩싸여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본체로 현신하여 대천사들의 막강한 신성력에 대항하려는 것이다.

츠츠츠츠! 쿠웅! 쿵!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레드 드래곤의 거체가 드러나자, 느릿하게 접근하던 대천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도마뱀 녀석.

가브리엘은 스산한 눈빛으로 화룡왕의 전신을 훑으며 백색 단창을 빙글빙글 돌렸다.

―기어코 진짜 실력을 드러내게 만드는구나.

엔세데스는 대천사들을 향해서 거친 의념을 보냈다.

그러자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불쾌한 표정으로 움찔거렸다.

아무리 레벨 차이가 난다고 해도 화룡왕은 쉽사리 거꾸러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나 드래곤 피어는 대천사의 위엄으로도 완벽하게 막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대천사들 또한 섣불리 공격을 퍼붓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것이리라.

―이건 네놈들이 시작한 싸움이다.

상대가 머뭇거리자, 엔세데스는 냅다 선제공격에 나섰다.

루시아의 말대로 성스러운 군대가 몰려들기 시작하면, 싸움은 어려워질 테기 때문이었다.

쿠화아아아아!

[‘화룡왕 엔세데스’의 드래곤 브레스가 전개됩니다.]

[드래곤 브레스는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일순간 동결합니다.]

[이 일대의 스킬 사용이 30초간 차단됩니다.]

쫙 벌어진 화룡왕의 아가리에서 시뻘건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거대한 불기둥처럼 쏘아진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는 허공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화염에 내포된 거대한 힘은 일대의 에너지 흐름을 완벽하게 동결시켰다.

하지만 대천사들이 시전한 백색 방어막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드래곤 브레스의 장악력보다 장막의 에너지 결속력이 훨씬 높은 모양이었다.

―으음…….

화염을 모두 뿜어낸 엔세데스는 낮은 침음을 흘렸다.

거의 최대치로 전개한 공격이었으나, 마나만 소모했을 뿐 별반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화룡왕의 예리한 감각은 그 사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대천사들이 브레스를 무력화한 방법까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멀쩡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윽고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마나의 파동이 완전히 사라지자,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곧장 성물(聖物)을 휘두르며 엔세데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불이라……. 뜨끈하군. 그럼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성화(聖火)의 따스함을 전파해야겠구나.

―받아라! 엘―플레임!

찌이이잉! 슈후우욱!

두 대천사가 각자의 무기를 마주치자,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백색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성스러운 불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주변의 마기와 대비되는 순백의 불꽃은 자연스럽게 일렁이며 함박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성화에 담긴 힘은 섣불리 손대지도 못할 정도였다.

화룡왕의 드래곤 브레스보다 훨씬 강하게 주변의 에너지를 장악하는 중이었으니까.

그저 동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아, 이거 마나 더럽게 많이 드는데…….

쏟아지는 수천 개의 성화를 포착한 엔세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기다란 목을 가눴다.

뒤편에는 어떻게든 유진을 깨워 보려고 마기를 주입 중인 일행이 있었다.

아마 자신이 몸을 피하면, 저들은 성화에 직격당하고 말 터였다.

“막아야 합니다! 에네르지아 디스쿠스!”

“수호의 진언!”

번―쩍! 파지지직!

루시아의 깃발 창이 허공에 뇌전을 뿌리고, 다이애나 로즈의 손에서 하늘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수호의 진언’이 시전되었습니다. 권역 내의 아군 전체에 20분간 이로운 효과가 부여됩니다.]

[충격을 흡수하는 방어막이 생성됩니다.]

일시적으로 아군을 보호하는 광범위 버프가 시전되었지만,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거로는 턱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화를 요격하기 위해서 쏘아진 에네르지아 디스쿠스는 허망하게 쪼개져 버렸다.

고도로 압축된 뇌전 에너지의 집약체임에도 불구하고, 무력하게 파훼된 것이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은 루시아는 재차 깃발 창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성화 다발을 제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후우우웅!

날개를 쫙 펼친 엔세데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게 아닌가.

―음?

―오호?

일순간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눈에 이채를 띨 정도였다.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

화룡왕이 시전한 것은 미궁 밖에서 대천사들의 공격을 차단했던 방어 마법이었다.

차원을 뚝 잘라 가름으로써 공격이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궁극의 방어막.

녹색 빛의 장막에 닿은 성화들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지만 대천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한낱 유리장이지.

―에너지 효율이 매우 낮아 보이는데, 그거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겠나?

―흐흐흐. 우린 성화를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는데 말이야.

찌이이잉! 슈후우욱!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단창과 지팡이를 재차 맞부딪쳤다.

그러자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성화가 생성되더니, 일대에 불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할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는 촘촘한 공격이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멀쩡해?

엔세데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새하얗게 하늘을 뒤덮은 성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보다 낮은 수준의 방어 마법으로는 저 빌어먹을 백색 불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시전한다고 해도 구멍이 숭숭 뚫려 버릴 터였다.

굳이 실험해 보지 않아도 드래곤의 지고한 통찰력이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마나를 몽땅 털어서라도 막아야겠군.

화룡왕은 어쩔 수 없이 재차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를 준비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뒤편에서 강력한 빛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현신한 엔세데스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만큼 고도로 농축된 에너지였다.

―크윽! 이, 이 기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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