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아……. 저들이 벌써 도착했어요!”
섬 동쪽의 백광을 발견한 다이애나 로즈는 탄식을 터트렸다.
아직 일행은 공간 이동 제단이 있는 미궁엔 진입도 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이는 교황청의 군세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루시아도 지척까지 다가온 성스러운 군대를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적어도 세 시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그걸 절반 이하로 줄여 버리네요.”
“작정하고 온 모양입니다. 이제 어쩌죠?”
“어떻게든 도망쳐 봐야지요. 얼른 갑시다!”
슈우우우! 퍼어엉!
교황청의 성자들은 신성력을 발하며 오염 지대를 찢어발겼다.
저러다가 마기의 구름은 물론이고 미궁까지도 박살 낼 것 같은 기세였다.
물론 단순히 신성력 스킬을 쓰는 거로 인해서 검은 육각 기둥이 소멸할 리는 없겠지만.
한동안 마기의 구름이 일행을 숨겨 주지는 못할 터였다.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건데, 오염 지역 덕분에 몸을 숨길 수 있다니…….”
“방금 저도 그런 생각 했어요. 참 모순적이네요.”
“저놈들이 마기를 다 없애 버리기 전에 이동해야 합니다.”
“네.”
씩씩하게 대답한 다이애나는 양손을 높이 쳐든 태구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블라드 유진이 실린 들것을 머리에 이고 조심조심 움직이는 중이었다.
“고생스럽겠지만, 부탁 좀 할게요.”
“걱정하지 마셈. 형아는 내가 지킴.”
말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엄근진 표정을 얼굴에 띄운 태구는 마치 슬라임처럼 미끄러졌다.
다리를 녹여서 뱀같이 배로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이다.
아무래도 들것에 충격이 가지 않게 하려고 저렇게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노력의 결실이 있었는지, 곤히 잠든 유진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쨌거나 퇴각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와서 신성력을 펑펑 쏴 대는 성스러운 군대가 문제였지만.
“저깁니다!”
미궁의 출입구인 검은 육각 기둥을 발견한 림일국의 외침에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 안으로만 들어간다면, 손쉽게 교황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제단의 비밀을 알아내서 미국으로 넘어오더라도 충분히 대비 가능했다.
다이애나는 선동과 날조로 정정당당하게 여론을 만들어서 성스러운 군대를 조져 버릴 작정이었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이끄는 군세는 미국 쪽으로 넘어가자마자 집중포화를 당할 터였다.
그러는 동안, 유진과 함께 드넓은 북미 어딘가로 숨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로군요.”
“예?”
“대비할 겨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긴 오늘도 저들이 예상보다 빨리 오긴 했죠.”
루시아는 다이애나의 혼잣말에 맞장구를 쳤다.
일행은 미궁의 입구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이제 육각 기둥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교황청의 추격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파공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쑤화아아아!
“으윽!”
“이건……!”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찬란한 백광에 휩싸인 두 존재가 마기의 구름을 단번에 꿰뚫는 게 아닌가.
강렬하게 번득이는 단창은 일행의 근처로 떨어져 폭발했다.
퍼어어엉!
솔직히 폭발력 자체는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았다.
다만, 단창에서 발생한 신성력으로 인해 마기의 구름이 확 밀려났다는 게 문제였다.
방금의 일격으로 일행의 위치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저기다!”
“돌격! 저 마인(魔人)들을 절대로 놓치지 마라!”
성스러운 군대는 지치지도 않는지,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밀고 들어왔다.
이러다간 공간 이동 제단은 써 보지도 못하고 붙잡힐 판이었다.
“얼른 들어가요!”
루시아의 외침에 일행은 육각 기둥을 향해서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태구가 움찔거리면서 움직임을 멈추는 게 아닌가.
“왜 그래요?”
다이애나 로즈의 질문에 녀석은 마그마를 식은땀처럼 줄줄 흘리며 답했다.
“저, 저걸 뚫고 가라고? 쌉에바임.”
태구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무래도 저 빛나는 단창 때문에 전진하지 못하는 듯했다.
녀석의 근처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레니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신성력…….
“시간 없어요. 일단 유진 님을 내려 줘!”
다급한 외침에 태구는 들것을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블라드 유진을 데리고 황급히 미궁으로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시도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번―쩍!
라파엘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황금색 빛줄기가 낭창거리며 날아든 것이다.
거대한 신성력 채찍은 일행의 진행 방향을 정확하게 가로막았다.
쿠화아아앙!
“으윽!”
“이, 이런!”
들것을 옮기던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간신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허공에 둥둥 뜬 두 대천사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튼짓하는 순간 방금처럼 엄청난 공격이 펼쳐질 터였다.
그렇다고 전진하지 않는다면 덜미를 붙잡힐 상황.
서로를 돌아본 둘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어떤 희생이 있을지라도 유진을 데리고 미궁으로 탈출할 요량이었다.
“갑시다!”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볼게요!”
철컹!
다이애나가 들것을 어깨에 들쳐 메자, 루시아는 곧장 깃발 창을 꺼내 들었다.
“너희들도 얼른 가!”
신성력 앞에 무력해진 레니와 태구에게도 단호하게 외쳤다.
일행이 탈출하는 동안,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모양이었다.
은빛 갑옷에 거대한 깃발 창을 든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천신과도 같았다.
지직! 지지직!
새하얀 천에 뇌전의 기운이 치솟고 있을 무렵, 대천사들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쯧쯧! 무모한지고.
―불쌍하구나. 괴물 놈에게 너무 오랫동안 세뇌되었어.
―그때 그 염탐꾼 녀석처럼 말이지? 그럼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체내의 마기를 날려 줘야겠군.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빈정거리듯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각자 무기를 치켜들었다.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박살을 내 버릴 기세였다.
이를 악문 루시아는 곧장 에네르지아 디스쿠스를 준비했다.
그녀가 지닌 가장 강력한 공격 스킬이었다.
아마 대천사들에게는 별 타격을 주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미 대천사들의 공격은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투웅! 쉬이이익!
마치 자주포에서 발사된 탄환처럼 가브리엘의 단창이 맹렬한 기세로 쏘아졌다.
“크아압!”
루시아는 천둥과도 같이 우렁찬 기합을 지르며 깃발 창을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Dimension Divide Shelter).”
핑―! 콰칭!
바닥에 빛나는 녹색 선이 쭉 그어지더니, 번득이는 광망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 가브리엘과 루시아의 중앙에 큼지막한 방어막이 생성된 것이다.
직사각형의 투명한 판에 닿자, 놀랍게도 백색 단창의 형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
충격에 대비하고 있던 그녀는 작은 탄성을 흘리며 그 기이한 현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튀어나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표정이면, 참 볼 만했을 텐데 말이야. 아쉽구먼.”
“……엔세데스 님?”
루시아의 근처에 불쑥 나타난 건 화룡왕이었다.
엔세데스는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에서 녹색 빛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아마 가브리엘의 단창은 이 레드 드래곤이 막아 낸 모양이었다.
“영지를 돌고 왔는데, 이 꼴이더군. 저놈들이 또 쳐들어온 건가?”
화룡왕은 성스러운 군대를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네.”
“좀 더 일찍 대응하지 못했나 보네.”
“아무래도 유진 님이 이런 상태라, 생각보다 늦어졌습니다. 엔세데스 님이 오셔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루시아는 기대 가득한 눈으로 화룡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엔세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있어 봐야 결과는 변하지 않아. 멀쩡한 상태의 저들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
화룡왕은 적과 자신의 무력 격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평시라면 허세를 부릴 만도 했지만, 지금처럼 위급할 때는 장난 칠 시간 따윈 없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걸 명심해.”
“네, 알겠습니다.”
엔세데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을 본 루시아는 잽싸게 들것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해도 블라드 유진을 막 다룰 수는 없었다.
체내에 침투한 신성력과 싸우는 중인데, 함부로 건드렸다간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다이애나와 루시아는 조심조심 미궁 입구로 진입했다.
“너희들도 얼른 가.”
―웅.
“수고링.”
화룡왕은 남은 일행에게도 고갯짓했다.
강렬한 신성력에 의해 주눅이 들어 있던 레니와 태구도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라는 마법이 신성력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림일국까지 지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엔세데스는 마법을 거두었다.
“젠장, 기껏 얻은 마나를 다 쓰게 생겼네.”
마법이 해제되자, 찬란한 백색 기운이 마치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신성력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는 화룡왕조차도 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괜히 이곳에 있다가 대천사들의 무기에 당할까 싶어서, 엔세데스는 얼른 일행의 뒤를 따랐다.
쿠콰콰콰콰!
화룡왕의 도움으로 일행 모두가 미궁으로 들어간 직후, 대천사들이 도착했다.
디멘션 디바이드 쉘터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냅다 날아온 참이었다.
―흥! 그리로 도망치면, 우리가 못 쫓아갈 성싶으냐?
가브리엘은 백색 단창을 휘두르며 육각 기둥으로 돌진하려 했다.
한데, 라파엘이 앞을 가로막으며 제지하는 게 아닌가.
―잠깐.
―왜 그러지?
―안에 무슨 함정이 펼쳐져 있을지 모른다.
―그런 것 정도야 다 분쇄하면 되지 않나?
―지난번에도 우리를 방해했던 레드 드래곤이 저들과 함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으음…….
확실히 이계에서 온 레드 드래곤의 존재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룡왕은 대천사들보다 수준이 낮은 거로 보였다.
하지만 EX급에서는 오로지 레벨만으로 강약이 판가름 나지 않았다.
기실 한참 아래인 블라드 유진도 가브리엘을 거의 이길 뻔하지 않았던가.
잠깐 고민에 잠겼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럼 다른 놈들부터 먼저 집어넣어 보면 되겠지.
―좋은 의견이로군.
―거기 너. 이리로 와 보거라.
가브리엘은 어느새 미궁 근처까지 돌격해 들어온 교황청의 병사 한 명을 지목했다.
옷차림을 보니 자비단의 힐러인 듯한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최전방까지 나와 버린 모양이었다.
“네?”
불안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표정은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시커먼 육각 기둥을 가리켰다.
―천주의 신자여. 적의 땅에 가장 먼저 들어가 깃발을 꽂아라. 그 영광을 네게 주겠노라.
자비단의 힐러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공손하게 답하며 명령에 따랐다.
“예, 고귀한 사자시여.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