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07화 (208/226)

7화

드르르륵! 쿵!

“빨리 내려! 항구부터 장악한다!”

교황청의 병력을 실은 이탈리아 함대는 사르데냐섬 동쪽의 아르바탁스(Arbatax)에 상륙했다.

그들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버려진 도시, 토르톨리(Tortolì)를 지나 곧장 누오로로 향했다.

마기의 구름은 섬 중심에만 있었기에, 블라드 유진의 위치를 특정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왜 저곳의 미궁만 정화하지 않고 남겨 두었는지는 의문이나, 성스러운 군대는 망설임 없이 진군했다.

그들에게 의문 따위는 존재치 않았으니까.

“장애물은 무시하고 들어간다. 전진!”

성기사들의 선두에서 지휘하는 사람은 안토니오가 아니었다.

교황청 내부에서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던 모양인지, 성기사단장이 바뀐 상태였다.

게다가 이제껏 베일에 가려졌던 성자회주(聖子會主)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성기사단과 성자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는 중이었다.

이제껏 미친 듯이 대립각을 세워 온 자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중심에는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있었다.

안드레아 교황이 죽었지만, 교황청은 구심점을 잃지 않았다.

대천사의 존재로 인하여 기존보다 더욱 강력한 체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같잖은 짓을 해 놓았군.

―이런다고 우리가 껄끄러워할 줄 알았나 보지?

―아마 치료하는 중일 터. 지금이 적기다.

―아, 그렇겠군. 내 지혜의 신장(神杖)에 제대로 당했으니.

누오로의 오염 지대를 감지한 두 대천사는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렸다.

블라드 유진이 마기 속에 숨어서 힘을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느리군. 배는 꽤 견딜 만했는데, 이건 뭐 굼벵이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도로 사정이 워낙 열악하잖아.

―호오? 강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인간 세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군.

―고작 이런 거로 뭘. 방금 기사단장이 보고했는데, 모를 리가 없지.

―농담이야. 진지하게 반응하는 게 재미있네.

―체통 좀 지켜. 인간들이 보고 있으니.

―크흠!

대천사들은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느릿하게 날아갔다.

눈앞은 온통 폐허가 된 도로였지만, 교황청 병력의 진군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성기사와 성자의 신체 능력은 웬만한 A급 헌터의 수준을 가뿐히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힐러들이 조금 뒤처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아무래도 전투 병력보다는 체력이 다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빅트리치오.

“예, 사자시여.”

―속도가 너무 느리구나. 후미로 가서 힐러들을 독려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라파엘의 명령에 성자회주는 황급히 발걸음을 늦췄다.

직접 행렬의 후미로 이동하여 명령을 전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뒤편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 점잔빼더니, 너도 답답했나 보지?

―오해하지 말게. 자네가 너무 투덜거리니까, 좀 달래려고 보낸 거 아닌가.

―얼씨구? 이걸 내 탓을 한다고?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서로 시답잖은 의념을 보내며 아웅다웅했다.

물론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느릿하게 날아가는 중이었고, 의념만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두 대천사가 소리 없는 말싸움을 벌이는 사이, 빅트리치오는 행렬의 후미로 이동한 상태였다.

“자비단장(慈悲團長).”

자비단장은 교황청 내부의 힐러들을 통솔하는 직책이었다.

평소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인원 배정이야 그저 정책에 따르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성전을 치러야 할 때는 힐러 전체를 지휘해야만 했다.

자비단장 미트리오는 성자회주와 나란히 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주님.”

그러자 빅트리치오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힐러들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진군 속도가 너무 늦군.”

“하지만 이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가는 도착하자마자 탈진할 겁니다.”

“어쩔 수 없어. 이번 작전은 속전속결이 생명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지금도 상당히 무리하는 거라…….”

“천주의 사자들께서 불편해하신다네.”

“후우!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고귀한 분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지.”

“뒤처지는 자들은 단계적으로 회수하면 되니, 진군 속도를 높이십시오.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고맙군. 수고하게.”

성자회주가 선두로 치고 나가자, 자비단장은 거북한 얼굴로 힐러들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는 힐러들.

그런 부하들을 보고 있자니, 불편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천대를 받아 보았겠는가.

교황청의 힐러라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데다가, 금이야 옥이야 보호하려 드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하지만 현재 교황청은 블라드 유진을 타도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대천사라는 구심점에 똘똘 뭉쳐서 말이다.

예전이라면 의견 제시라도 해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진군 속도를 올린다. 뒤처지는 자는 징계하고, 능력을 보이면 후하게 포상할 것이다. 달려!”

자비단장은 전투 병력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힐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점점 본대에 붙지 못하는 인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꽤 이색적인 커플이 있었다.

어떻게든 본대와 합류하려던 남녀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 뒤로 처졌다.

남자는 기진맥진한 여자의 곁에서 제자리걸음 하며 작게 빈정거렸다.

“이봐. 에리코. 힘내라고.”

“헉헉! 죽기 일보 직전인데, 대체 뭘 어떻게?”

“자힐이라도 해. 그럼 버틸 만해질지도 모르잖아.”

“호흡이 달리는걸! 허억, 헉. 무슨 수로! 흐엑……. 회복하냐? 너 바보야?”

“크크! 말하는 것 좀 보소. 성직자가 그래도 되는 거야? 근데 세례명이 왜 에리코지? 보통은 남자가 하는 거 아닌가?”

“뭐래. 나도 너처럼 그냥 외부 인력이거든? 이건 그냥 내 이름이라고.”

“어차피 입단할 때 약식으로 세례받잖아.”

“이름하고 똑같아서 그냥 에리코로 했다. 말 좀 그만 걸어. 알렉산데르 이 멍청……. 그러고 보니, 너도 똑같잖아? 알레한드로.”

“발음이 다르잖아. 발음이.”

“닥쳐!”

숨을 고른 에리코는 가슴을 펴며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그러자 방어구에 숨겨져 있던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가 살짝 드러났다.

알렉산데르는 눈썹을 들썩이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더우면 좀 벗지, 그래?”

“누구 좋으라고?”

“당연히 나 좋자고 아니겠어?”

“어허! 수위가 좀 세시네?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징계야.”

“뭐 어때?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거 봐. 다 골로 가 버렸다고.”

문득 뒤편을 돌아보자, 바닥에 널브러진 힐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스러운 군대는 아르바탁스에서 누오로까지, 대략 75km를 1시간 안에 주파하고자 했다.

산술적으로 따져도 시속 75km로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그것도 무거운 방어구를 걸친 채로 말이다.

물론 헌터들이라면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길도 온전치 앉은 오르막 산길을 그렇게 질주하는 건, 힐러들에겐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지쳐 쓰러질 수밖에.

솔직히 여기까지 따라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요즘 힐러들은 근성이 없어요.”

“너도 힐러면서 그딴 소리 하냐?”

“난 원래 딜러였거든?”

알렉산데르는 원거리 딜러였다가 운 좋게 치유 스킬을 익히면서 힐러가 된 경우였다.

이 녀석은 그날로 곧장 헌터를 때려치우고, 자비단에 지원 서류를 넣었다.

교황청 힐러로 활동하면, 안전과 높은 수익을 보장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알렉산데르는 다른 힐러보다 체력이 꽤 좋았다.

“업어 줘?”

“됐어. 만지려고 그러는 거 다 알아.”

“에이. 나도 힘든데 설마 그러겠냐?”

“응. 넌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쳇!”

“그렇게 관심 있으면, 데이트 신청하든지. 왜 만날 추파만 던지냐?”

“그럼 자비단에서 쫓겨나거든. 난 사랑을 좇아 모든 걸 던지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서 말이야.”

“자랑이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정도 호흡이 돌아오자, 그들은 이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알렉산데르는 징계와 포상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에리코의 곁에 남았다.

말과는 달리, 하는 짓은 꽤 로맨틱한 녀석이었다.

질주하는 듬직한 남자의 옆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그녀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속도를 올렸다.

“어어? 너 그러다가 또 퍼진다!”

“그럼 네가 들쳐 메고 가면 되겠네!”

알렉산데르와 에리코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본대를 쫓아갔다.

쿠우우웅! 번―쩍!

두 사람이 누오로에 도착했을 때, 성스러운 군대는 이미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마기의 구름을 신성력으로 쫓아내며 길을 뚫는 것이다.

그러자 미처 대피하지 못한 블라드 유진의 일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저거 봐! 저자가 미궁 박멸자인가 봐!”

들것에 실려 도망가는 그를 발견한 알렉산데르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저자만 잡을 수 있다면, 자비단장 같은 엄청난 자리를 꿰차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힐러가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창백한 유진의 얼굴을 확인한 에리코는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알렉산데르가 다가와 어깨를 살짝 쳤다.

“뭐가 좋지 않다는 거야? 우리가 쌉바르고 있구먼.”

툭!

무심코 건드렸는데, 문득 그녀의 맨살이 알렉산데르의 손에 닿았다.

언제나 전신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에리코였는데, 미친 듯이 달려오느라 옷이 꽤 흐트러진 탓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직―!

뭔가 따끔한 통증이 올라온 걸 느끼자마자 에리코의 살갗이 쭉 벗겨지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섬뜩한 감각이 팔을 타고 전달되었다.

“어? 이건…….”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느낌에 알렉산데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심신을 옭아매는 사악한 기운,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마기가 그녀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왔다.

뚝! 뚜둑!

이윽고 에리코는 고개를 기괴하게 꺾으며 알렉산데르를 바라보았다.

“너……. 너 왜 그래?”

“뭐가?”

“팔에서 이게 나왔잖아.”

“그래서?”

“교황청 힐러에게서 마기가 흘러나오는 게 말이……! 되, 되냐고.”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에 놀란 알렉산데르는 마치 복화술을 하듯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에리코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찢어진 피부를 어깨에 대충 붙였다.

츠츠츠츠!

그러자 마기가 새어 나오던 부위가 말끔하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방금의 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질린 듯한 알렉산데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녀석을 만났는데, 좀 아쉽게 되었네.”

“이거 병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돌아가서 자비단장님께…….”

“쿨한 놈 아니었나? 난 그래서 네가 좋았는걸.”

“뭐, 뭐?”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근데 이제 별로네. 그래도 작별 인사는 해 줄게. 잘 가.”

스잉! 콰직―!

손에서 검붉은 칼날을 생성한 에리코는 알렉산데르의 목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려, 마기의 구름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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