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06화 (207/226)

6화

“결국에 그들이 회복한 모양이군요.”

“이번 원정에는 교황청의 S급 헌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끝장을 볼 심산인 듯합니다.”

쿠르단은 티레니아해를 건너는 자들을 면밀히 감시했다.

대천사의 태양과도 같은 신성력 때문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성스러운 군대에 바티칸의 성검이 있다는 것도 끈질기게 따라다닌 끝에 얻어 낸 정보였다.

“전선에 계셔야 할 분이 어째서…….”

루시아는 통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동쪽을 향했는데, 아마도 언제나 헌신적이었던 요한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게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전선 방어에 힘쓰시던 분이 어째서 교황청의 행사에 동조하셨을까요?”

“교황이 죽었다지만, 저쪽은 대천사가 강림한 상황이잖아요. 거역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닐 거예요.”

“하긴 그렇겠네요.”

교황청은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숨겼다.

루시아의 다음 단계 계획은 바로 그런 대천사들의 강림 사실을 까발리는 것이었다.

저렇듯 거대한 힘을 보유했으면서도 전선은 무시하고, 섬에만 집중한다는 여론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속셈을 간파한 듯, 교황청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블라드 유진의 숨통을 끊는 게 최우선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북쪽의 인간들이 죽든 말든 어차피 대천사들만 있으면, 전선 복구야 쉬운 일이니까.

“아무래도 여기서 싸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시아는 주변을 가득가득 채운 마기의 구름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안에 숨어 있으면, 외부에서 일행의 행태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블라드 유진의 상태를 감추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환경이었다.

물론 사르데냐섬의 오염 지대는 누오로 남쪽 평지뿐이라, 일행의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태구와 레니에게 닿는 걸 보아하니, 마기를 이용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몇 빼고는 우리도 마기의 영향을 크게 받아요. 되레 교황청 측에 더 좋은 환경이죠.”

“신성력으로 마기에 저항하면서 싸울 거란 말씀이로군요.”

“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버리는 겁니다.”

“아……. 저 제단을 이용해서요?”

“네.”

루시아의 의견에 일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쓰러진 상황에서 대천사들에게 대적하는 건 어려웠다.

이번에는 다이애나와 태구가 지원해 주겠지만, 역부족일 것이다.

교황청 또한 바티칸의 성검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올 테니까.

내부에서 저항하던 성기사단은 이미 대천사들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쿠르단의 말을 빌리자면, 저들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신의 군대였다.

그런 놈들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시간을 버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블라드 유진이 깨어날 때까지 말이다.

“좋습니다.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죠?”

다이애나의 질문에 쿠르단은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이동 속도로 보았을 때, 대략 3시간 정도입니다.”

“촉박하네요. 하지만 저들은 공간 이동 제단의 존재를 모르니,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거예요.”

“좋습니다. 해 보죠. 제가 공략대의 퇴각을 맡을 테니, 나머지는 유진 님을 옮기는 데 집중해 주세요.”

루시아는 곧장 일행이 할 일을 알려 주며 공략대원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략대를 오리스타노 항구로 내려보냈다.

이탈리아 해군 장교들을 활용하여 노획한 구축함을 타고 도망칠 요량이었다.

세부적인 일들은 페르난도 칸토에게 맡겼다.

“도로를 정비해 두었으니, 빠져나가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곧장 바르셀로나로 가세요. 에스파냐와 프랑스 정부에 상황을 보고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시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어서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해 두죠.”

“하지만 상대는 교황청 아닙니까? 그냥 상식적인 선에서 대응하면, 말이 통하지 않을까요?”

“음…….”

페르난도의 질문에 루시아는 순간적으로 적절하게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긴 이런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교황청과 대천사가 자비와 온정을 발휘할 거라는 믿음.

오랫동안 인류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는 종교관이 바로 그런 생각의 원인이었다.

미궁 사태 전에도 스페인 인구의 76%가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바티칸 시국의 위상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지금은 아마도 90% 이상일 것이다.

거기다 대고 신앙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당신들의 신은 인간에게 별 관심 없고, 마족들과 똑같은 놈이라고 해봐야 반감만 사게 될 터.

그녀는 잠깐의 고민 끝에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답변을 내놓았다.

“국익을 위해서죠. 우리는 절대로 다시 나라를 빼앗길 수 없어요. 저들의 전력은 이쪽이 아니라, 전선에 투사되어야 합니다.”

“아!”

“목표가 사라지면,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감지할 거예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빠르지 않을까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10년이 넘도록 오염 지대가 되어 있었던 영토를 거론하자, 페르난도 칸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건 나라를 잃었던 자에게 특효약이나 다름없었다.

페르난도는 루시아의 명령대로 빠르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볍게 흔들더니, 마기의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쏴아아아!

티레니아해를 건너는 중인 이탈리아 함대.

기함의 갑판 위에는 은빛 갑옷을 입은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문 입술까지.

교황청 성기사의 표상이라고 할 법한 인물.

그자는 바티칸의 성검이라 불리는 자였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요한은 문득 허리춤에 찬 검을 내려다보았다.

스르릉.

손잡이를 잡고 슬쩍 당기자, 번득이는 예기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홀로그램 글귀가 눈앞에 불쑥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 광진(光進)의 성검 엘―그룸

등급 : EX

내구도 : EX

효과 : 마기 저항 30%, 신성 강타 발현 10%, 마기 축출, 매우 높은 공격력

검에 적중될 때마다 신성 강타 발현 확률이 5%씩 상승함. 발현 시, 신성력 돌풍이 부채꼴로 퍼져 나감.

엘―그룸은 미궁 사태 중반부터 요한과 쭉 함께한 무기.

성자 중에서 가장 성취가 높았던 요한에게 교황청이 내린 성물이었다.

EX급답게 옵션은 굉장했다.

하지만 S급의 끝자락에 올라선 지금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과분한 아이템이었다.

요한은 엘―그룸의 힘을 모두 끌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명확한 업적도 세우지 못했으니까.

“전선을 밀어내지도 못하는 놈한테 성물은 무슨……. 차라리 블라드 유진 그자에게 가야 할 물건이지.”

자조적인 혼잣말을 쏟아 냈으나, 바티칸의 성검을 칭송하는 이는 많았다.

솔선수범하여 전선에 나가는 건 솔직히 대단한 일이었다.

교황청이 힐러 장사를 한다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하는 데에, 가장 큰 방패로 작용했으니까.

물론 그런 결과를 바라고 선의를 베푼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몸 던져 싸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

“신세 참 처량하구나.”

자신의 명성이 안드레아의 잇속을 챙기는 데 이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후, 요한은 교황청에 돌아가지 않았다.

애타게 자신을 찾는 성기사단 또한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목줄에 묶인 개처럼 끌려와 사르데냐섬 토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한의 심정은 참담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전선에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러나 바티칸의 성검에게 작금의 상황을 벗어날 재간은 존재치 않았다.

한데, 수평선을 바라보는 요한의 뇌리에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란한가 보군.

문득 시선을 돌려보니, 세 쌍의 날개로 온몸을 감싼 라파엘이 서 있었다.

“……고귀한 사자시여.”

요한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대천사는 바티칸의 성검이 교황청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요한은 전령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신성력을 통해서 천상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대천사의 강림이라니.

그런 게 가능했다면, 이토록 큰 희생이 있기 전에 도와주지 않고 뭘 했단 말인가.

한낱 유언비어라 치부하고 전선에 나서려는데, 불현듯 라파엘이 찾아왔다.

바로 그 순간 바티칸의 성검은 깨닫고 말았다.

신성력을 지닌 존재는 상위 개체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당시 당황한 요한에게 라파엘은 이렇게 읊조렸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을 위한 조치다. 가톨릭교회가 교황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건 예법과 운영 또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냐며 소리쳤지만, 음성은 터져 나오지 못했다.

라파엘의 신성력이 심신의 제어권을 빼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브루스 올 마이티를 보면, 신의 권능을 얻고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조종할 수는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영화는 그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산물일 뿐이었다.

실제로 대천사는 육신뿐만 아니라, 요한의 마음까지도 굴복시켰으니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 때문인지, 바티칸의 성검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지금은 라파엘이 별다른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천주의 가장 큰 사자가 함께하고 있다. 어째서 공포를 느끼는 거지?

대천사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인간적인 감정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신의 힘을 직접 운용하게 되었으면서 뭐가 불만이냐고 묻는 듯한 태도.

모든 것이 바티칸의 성검에게는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상대는 상위 개체고, 자신은 그저 신의 가장 낮은 시종 중 하나일 뿐이니까.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고, 이 땅을 지배할까 두렵습니다. 그들은 벌써 10년이 넘도록 전 세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디 그분의 아들딸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굽어살피소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대는 대업에만 집중하라.

“…….”

라파엘의 담담한 대답에 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기계처럼 그저 믿으라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바티칸의 성검은 총기가 사라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참담한 표정을 숨기며 대답하자, 대천사는 그제야 뒤돌아서 갑판을 벗어났다.

불안에 떠는 성자들을 독려하려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움직임이 없던 요한은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시뻘겋게 물든 얼굴과 핏발 선 눈.

신음을 흘린 바티칸의 성검은 힘겨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릇된 가르침이라도……. 따라야 하는 겁니까?”

어느새 요한의 시선은 수평선 위쪽의 맑은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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