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05화 (206/226)

5화

“이러면 계약을 지킬 이유가 없어지지 않나요?”

“그렇죠. 먼저 동맹을 깨고 우리 보급을 끊으려 한 건, 이탈리아니까요.”

“거기다 확실한 증거까지 있죠.”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이탈리아가 왜?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이 이상했던지, 레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그러자 루시아가 빙긋 웃으며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과 연결된 제단이 이곳에 있잖아. 그냥 넘겨주기에는 영 아깝단 말이지.”

―웅. 그래서 약속을 깨려는 거구나? 여길 차지하려고.

“맞아. 쟤들이 먼저 선을 넘었으니까.”

―좋아. 난 찬성.

“아직 투표 같은 건 안 했는데…….”

―좋은 거잖아? 그럼 우리가 먹어야지.

“그건 맞아.”

쿠르단이 잡아 온 이탈리아 해군 장교에, 세 척의 구축함까지.

증인과 증거는 차고 넘쳤다.

사르데냐섬을 넘겨주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 것이다.

다이애나는 포박된 이탈리아 해군 장교들을 바라보며 미래를 그려 보았다.

“당연히 문제 삼을 겁니다. 어떻게든 우릴 규탄하는 여론을 펼칠 거예요.”

국제 사회, 특히 유럽 연합은 이러한 스페인의 행위를 질책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아마 이쪽에는 신경 쓸 틈도 없을걸요?”

이탈리아가 블라드 유진과 섬 정화 계약을 맺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교황청의 요청으로 그를 유인함과 동시에, 필라흐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사르데냐와 시칠리아가 정리된다면, 남쪽에서 분화하는 미궁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튀니지에서 간혹 미궁의 파편이 날아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비규환인 전선과 비교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칠리아는 정화하지 않는 게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아마 신경 쓰여서 우릴 견제하지도 못할 겁니다.”

“통신 장비가 들어왔으니, 아예 선수를 쳐 버리는 것도 좋겠네요.”

“근데 우리끼리 이러는 것도 좀……. 미궁 정화야 유진 님께서 다 한 거였잖아요.”

“그럼 미국 쪽 미궁 정화는 잠시 중단하고, 사르데냐부터 합시다. 어차피 여긴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요.”

“정말요?”

다이애나의 깜짝 선언에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색했다.

버지니아 전선의 상황 또한 그리 좋지 않을 텐데도, 선뜻 도와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애나 로즈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유진이 잠들어 있는 천막을 가리켰다.

“유진 님을 독차지한다고 좋았죠? 후후! 하지만 앞으로는 안 될 겁니다.”

솔직히 함께 머무는 것뿐이라서 억울한 느낌이 들었지만, 루시아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하고 자그마한 마음을 잠시 접어 두기로 한 것이다.

* * *

[TF1 News. 좋은 저녁 되시고 모두 환영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의 소식은 이탈리아의 계약 위반 내용입니다. 공략대가 사르데냐섬을 정화하던 중, 교황청의 기습 공격과 이탈리아 해군의 해상 장악이 잇따랐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화물선이 처한 위기 상황과 포로들의 증언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프랑스 민영 TV 채널에서 터진 뉴스의 파장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북부 전선과 맞닿은 덴마크와 독일, 오스트리아의 여론은 마른 장작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특히 얼마 전에 나라를 잃은 체코 사람들의 민심은 그야말로 폭주하고 있었다.

“돈 왕창 부어서 블라드 유진과 계약하더니, 뒤통수를 쳐?”

“이럴 거면 우리가 먼저 접선하게 좀 놔두지. 양심도 없네.”

“이 미친 새끼들, 일부러 공략 속도 늦춰서 다 망하게 하려는 거 아니야?”

“야이! 개자식들아! 베니스 다 폭파해 버리기 전에 난민 보급부터 해!”

“베니스에서 대규모 시위한대! 뒤통수 오지게 처맞기 싫으면, 식량부터 풀어야 할걸?”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는 곧장 반대 성명을 냈다.

[오늘 발표된 사르데냐섬 사건은 조작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스페인의 뒤에 숨어 여론 조작만 일삼지 말고, 전면에 나서서 해명하십시오.]

[우리는 허가 없이 영해 내로 들어온 화물선을 저지하고, 위험 요인을 수색하려 했을 뿐입니다. 무모하게 밀고 들어온 건 스페인 민선 측이죠.]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뻔뻔한 대응은 되레 체코 국민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베니스에서 시작된 항쟁은 급기야 전선의 후위를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필라흐로 올라가는 병력과 보급이 차단되자, 전선은 순식간에 위기 상황이 되었다.

안 그래도 힘든 판국에 후방까지 신경 쓰다 보니, 도저히 전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장벽 몇 군데가 무너지자, 이탈리아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건 다름 아닌, 시위대의 강제 해산이었다.

“와! 이탈리아 새끼들 진짜 돌았나 봐. 시위대에 기관총 갈긴대!”

“이 미친놈들, 제대로 빡쳤는데? 누가 발작 버튼 눌렀냐?”

“블라드 유진이 누른 거 아님? 스페인 침공하다가 그 사람한테 발렸을 때부터 얘네 정상이 아니던데.”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해 보았으나, 체코 난민의 수효는 너무도 많았다.

상식적으로 500만에 가까운 인파를 통제하려는데, 불협화음이 안 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하나같이 이탈리아 정부에 불만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그냥 인정할 거 인정했으면 되잖아.”

“돈을 퍼부어서라도 유진을 부리고 싶다 이거겠지. 다 자존심 때문 아니겠어?”

“세계 최강의 헌터를 샀으면, 전선에다 올려 보내라고, 이 등신들아! 필라흐 전선 무너지면, 곧장 너희들 본토인데 뭘 믿고 배짱부리는 거야?”

“본토에서는 사람이 뒈지든지 말든지, 부자들만 데리고 섬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 아님?”

“염병! 그래서 섬부터 정화해 달라고 한 거야?”

이제는 아예 유언비어까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체코 난민은 슬로베니아 쪽으로 밀어내고, 우디네와 알프스산맥 사이에 새로운 장벽을 건설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진에게 자꾸만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지금 블라드 유진이 사르데냐섬을 점령하고 있지? 아예 거기다 새로운 나라를 세워 버려!”

“그래! 이탈리아의 땅을 빼앗아라!”

“이놈들은 어째 정부도 마피아 수준이냐?”

“역시 얘들에게 뭔가 큰 역할을 맡기면 안 됨. 식민지도 제대로 못 만들던 놈들한테, EU 수장 자릴?”

되레 사르데냐섬을 잘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자, 루시아는 곧장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 * *

사르데냐섬은 스페인과 프랑스,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엄청난 속도로 복구되는 중이었다.

아직 입도 제한이 있었지만, 이제 인프라가 없어서 허덕이는 불모지는 아니었다.

통신과 도로 복구는 물론이고, 공략대가 머무를 숙소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루시아와 다이애나, 태구, 레니의 활약으로 미궁은 차근차근 정화되어 갔다.

하지만 일행에게는 아직 가장 큰 고민이 남아 있었다.

“다 좋은데, 문제는 이분이로군요.”

“그러게요. 영 안 깨어나시는군요. 제가 떠날 때까지도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쩌죠? 언제까지 여기 머무를 수는 없으실 텐데요.”

다이애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르데냐섬의 미궁을 공략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블라드 유진이 거의 다 처리해 놓은 상태라, 몇 개만 치워 버리면 끝이니까.

게다가 태구의 완벽한 탱킹 덕분에 공략대의 피해는 없다시피 했다.

느리지만 미궁 공략이 차근차근 된 터라, 유진의 건재함을 위장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마 대천사들이 회복하더라도 섣불리 덤비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계속 속일 수는 없었다.

당하고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닌데, 앞으로도 쭉 공식 활동은 없을 테니까.

“괜찮으시겠어요?”

“버지니아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물자 지원은 계속해 드릴게요.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고요.”

“감사합니다.”

다이애나는 블라드 유진과의 재회도 얼마 즐기지 못한 채, 미국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얼른 돌아오라는 독촉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의 부재가 너무 길긴 했다.

“여긴 인간들이 없어서 별로 재미가 없네. 나도 갈 거임.”

태구 또한 기존에 유진이 내려 두었던 명령대로 미국행을 택했다.

여기서 레니랑 노는 게 좋긴 했지만, 그래도 녀석은 슈퍼히어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전선에서 몬스터를 깨부수고 인간들의 환호성을 듣는 게 너무도 그리웠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멀리 나가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괜찮아요. 여길 다 비우면, 유진 님은 누가 지키나요? 우리끼리 알아서 갈게요.”

“네, 그럼 다음에 뵙죠.”

루시아와 다이애나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레니와 태구도 서로를 슬쩍 바라보았다.

―또 올 거임?

“이욜! 내 말투 따라 하는 거임?”

―웅. 재밌음.

“공간 이동 제단 있으니까, 심심할 때마다 넘어옴.”

―내가 여기 없으면 어떡함?

“전화하면 되지. 님폰없?”

―없쪄.

“와! 폰도 없음? 레알 너무하네. 하나 구해 달라 하셈. 형아는 자고 있으니, 저 언니한테 부탁하면 되겠네.”

―언니 아니고 동생.

“끠끠끠! 그래. 동생.”

레니가 검지를 까딱거리며 정정하자, 태구는 괴상한 소리로 웃어 댔다.

“자, 문 엽니다.”

인사가 끝나자,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림일국은 마기 축출 역장에 출입구를 만들었다.

다이애나 로즈와 태구는 시커먼 육각 기둥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슉! 스윽!

마기의 구름을 뚫고 불쑥 모습을 드러낸 인형들이 일행을 순식간에 둘러쌌다.

난데없는 포위망에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죠?”

“떠나시기 전에 잠시 이야기 좀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앞길을 막은 존재는 바로 쿠르단이 이끄는 뱀파이어 무리였다.

그들은 오리스타노 항구 작전 이후, 사르데냐섬 전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혹시나 지난번과 같은 사고가 있을지 모르니, 정찰병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이동 속도가 워낙 빠른 데다가 박쥐로 변신까지 가능하다 보니, 이런 일에는 제격이었다.

어쨌거나 뱀파이어들은 일행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들어나 보죠. 안 가고 여기 있을 테니,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요.”

다이애나 로즈는 살짝 다급한 느낌의 쿠르단을 진정시켰다.

루시아도 뱀파이어들의 반응이 이상했던 모양인지, 림일국을 향해서 슬그머니 신호를 보냈다.

일단 마기 축출 역장을 닫으라는 의미였다.

스윽.

출입구가 사라지는 동안, 쿠르단은 일행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단 한 마디를 전하는 거였지만,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티레니아해에서 대천사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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