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저 압도적인 전력 앞에서 선장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저 항복하는 수밖에.
하지만 눈에 불똥이 튄 선장에게서는 백기를 내걸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이 스페인 화물선이 사르데냐섬에는 뭣 하러 가고 있는 건가.
이게 다 블라드 유진이 이끄는 스페인, 프랑스 공략대를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사르데냐섬은 이탈리아와 계약하고 정화 작업에 들어간 거였다.
“그런데 이딴 해적질을 해?”
자기네 땅을 되찾으려고 힘쓰는 중인데, 그 와중에 초를 치다니.
“이거 완전히 미친놈들 아닙니까?”
“우리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보급품을 나르는 건데요.”
승조원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탈리아를 욕했다.
―원하는 대로 교신 채널을 열어 주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응답하지 않는 건가. 1분 주겠다. 그 안에 항전 의사를 밝혀라.
뻔뻔하게도 이탈리아 구축함에서는 항복을 종용하는 무전이 계속 날아들었다.
이곳저곳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는 동안, 선장은 입술을 뒤틀어 올리며 창문 밖을 노려보았다.
속에서 열불이 터졌지만, 냉철하게 말해서 방법은 없었다.
아무 죄 없는 승조원들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갈 어리석음이 선장의 머릿속에는 존재치 않았다.
“일단 항……. 잠깐만, 저게 뭐지?”
상대측에 항복 의사를 밝히려 하던 선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항구 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버려진 산업 시설 항구에 웬 검붉은 물체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볼 때마다, 그 사람 형상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뭐, 뭐죠?”
“사람 모양이긴 한데, 엄청나게 큽니다! 몬스터가 아닐까요?”
한 승조원의 의견에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로 가득한 섬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공략대 아니면 몬스터뿐일 테니까.
하지만 항구 주변에는 미궁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가 안전지대까지 밀고 들어 온 건가?”
“아무래도 그런 느낌입……. 헉! 저, 저길 좀 보십시오!”
자연스럽게 대꾸하던 승조원은 눈을 부릅뜨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선장은 입을 쩍 벌린 채,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놈들, 탈탈 털리고 있는 것 같은데?”
* * *
“우리의 임무 목표를 털어먹으려 하다니, 괘씸한 놈들이로다.”
우두둑!
쿠르단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견시수의 목을 부러뜨렸다.
병사의 혈액을 모조리 빨아들인 이후, 시체를 바다에 그대로 던졌다.
풍덩―!
이탈리아의 구축함 위에 올라가서 인간들을 죽이고 다니는 건 뱀파이어 무리였다.
최첨단 레이더가 항시 돌아가는 중이었으나, 함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화물선의 답신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30인의 뱀파이어는 구축함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보이는 족족 인간들을 죽여 버리고, 마음껏 피를 빨았다.
“몇 놈은 살려 둬라. 특히 장교급은 말이야.”
“예, 마스터.”
하지만 훈련이 잘된 모양인지, 이탈리아 함대는 비상 상황을 금방 알아챘다.
타다다당!
선체 외부에서 대뜸 총성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두일리우스 D554. 내부 교전 발생. 긴급 지원 바람.
지휘 통제실에서는 곧장 근처 구축함에 지원 요청을 보냈다.
―여긴 도리아 D553. 외부 관측 불가. 멀린 출격. 반복한다. 멀린 출격.
그러나 바로 옆에서 살펴봐도 무슨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다른 구축함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떠올랐다.
투두두두두!
헬기는 곧장 두일리우스 함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문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유령처럼 움직이는 시커먼 인영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어? 저건! 모, 몬스터?”
그들의 정체는 쿠르단이 이끄는 뱀파이어 무리였지만, 조종사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며 병사들을 픽픽 쓰러뜨리니, 몬스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들은 총탄에 적중당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여기는 멀린, 두일리우스 함에서 몬스터 감지. 발포하겠다.
―허가한다.
수송형인 Mk3 멀린에는 기관총용 마운트가 달려 있었다.
이러면 아군 함선에다가 총질하는 게 되는 거지만, 사수의 움직임에는 망설임 따윈 없었다.
지금도 두일리우스 함에서는 병사들이 의문의 존재들에게 계속 죽어 나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들을 살리려면 구축함이 부서지든 말든 탄환을 갈겨야만 했다.
“발사!”
그런데 기관총을 발포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우우웅! 터엉! 퍼어어엉!
어디선가 거대한 물체가 다가오더니, 정지 비행 중인 헬리콥터를 냅다 후려치는 게 아닌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된 헬기는 그대로 수면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지만, 도리아 함의 지휘 통제실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것보다 더욱 놀라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구! 치이이이이!
전신에서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검은색 거인이 구축함의 앞에 나타났다.
헬리콥터를 마치 파리 잡듯 후려갈긴 건 바로 이 거인이 한 짓이었다.
괴물의 정체는 온도가 낮아진 탓에 전신이 검게 변한 태구였다.
하지만 체내가 완전히 식은 건 아니기에, 연신 바닷물을 증발시키며 자욱한 연무를 내뿜고 있었다.
녀석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구축함을 향해 말을 걸었다.
“님들 도둑임?”
이목구비가 아무것도 없는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말로 지껄였는데,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경악할 만한 상황에서 말이다.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태구는 항구 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자식들 쌩까는데? 어떻게 할까?”
그러자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루시아가 배는 비싼 거라고 했어.
“오! 그럼 우리가 날름하면 되겠네. 인정? 응. 쌉인정.”
항구의 끄트머리에 팔짱을 낀 채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인물은 레니였다.
그녀는 그냥 함선의 가격을 알려 줬을 뿐인데, 태구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결론을 내버렸다.
녀석은 이탈리아의 구축함을 강탈할 작정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면, 그만한……. 뭐였더라? 아무튼, 님들 엿된 거임.”
덥석! 쿠구구구구!
태구는 구축함을 붙잡더니, 마치 장난감처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배를 기울여서 탈탈 털기까지 했다.
이러면 내부에서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느라,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녀석은 세 척의 함선을 마구 흔들어 전투 능력을 완전히 상실케 했다.
그러고는 거센 파도에 휘청휘청하는 중인 화물선을 돌아보았다.
“왜? 뭐, 너희도 해 줘?”
천진난만한 질문에 화물선의 선장과 승조원들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괴물에게 붙잡혔다가는 선내에서 마치 탱탱볼처럼 튕겨 다닐 것이다.
그럼 조종실은 아수라장이 될 테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대략 느낌이 왔다.
화물선도 세 척의 구축함처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으아아……. 살려 주십쇼!”
* * *
이탈리아 함대에 보급 물자를 빼앗길 뻔했지만, 선장은 가까스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화물선과 더불어 조막만 한 호위함 한 척까지도 지켰으니, 앞으로 일감이 끊길 일은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도 임무를 완수한 인물이니, 스페인 정부에서 팍팍 밀어줄 터였다.
블라드 유진의 후광을 등에 업은 스페인은 지금도 승승장구하는 중이었으니까.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장은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구해 준 일행에게 연신 인사를 했다.
―웅. 알았으면 됐어. 짐이나 실어.
“넵!”
언어와 상관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레니는 선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 남은 건 열 대의 컨테이너 화물차를 옮기는 일뿐이었다.
일행 중 운전이 가능한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이 작업 또한 승조원들이 해야만 했다.
애초에 목표 지점까지 화물차를 타고 가는 것 또한 그들의 임무였다.
레니 일행은 오리스타노에서 누오로까지 도로를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순조로울 수만은 없었다.
사르데냐는 10년이 넘도록 마기에 휩싸였던 섬.
도로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 만무했다.
일행은 거의 삼보일배하는 수준으로 잔해를 치우며 나아갔다.
―오면서 좀 치워 둘걸.
“그랬으면 제시간에 못 맞췄음. 아마 화물 다 빼앗긴 뒤에 도착했을 거임.”
―웅. 너 똑똑하네?
“내가 좀 육체파긴 한데, 한 머리 하는 편이라.”
―바로 우쭐해지는 거 보면, 안 똑똑한 것 같기도 해.
“에이. 말 바꾸는 게 어디 있음? 으랴!”
콰앙!
태구는 검붉은 용암 거인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녀석의 주먹과 발길질이 작렬할 때마다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잔해가 한순간에 박살 났다.
그냥 부서지고 튕겨 나갔을 뿐만 아니라, 무너진 바닥마저도 금세 복구되었다.
태구의 몸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빈 부분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익!
뱀파이어들은 큼지막한 통을 들고 나르며, 용암에 연신 물을 부었다.
화물차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뜨거운 지면을 식히는 것이다.
덕분에 사르데냐섬의 도로는 상당한 속도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무려 80km나 되는 거리를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꼬박 이틀이 걸리고 말았다.
“와! 이거 할 짓 못 되네.”
“주, 죽을 맛입니다.”
태구와 뱀파이어들은 거의 녹초가 된 상태였다.
전혀 지칠 것 같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무한 막노동에는 장사가 없었다.
게다가 인력으로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지 않았던가.
―쉬어. 난 애들 좀 만나고 올게.
레니는 태구와 뱀파이어 무리를 놔둔 채, 혼자 마기의 구름 속으로 진입했다.
일반인인 화물차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마기 축출 역장에 도달한 그녀는 당당하게 의념을 보냈다.
―문.
그러자 역장의 한쪽에 둥그런 출입구가 생기더니, 루시아와 다이애나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성공했어?”
―웅.
“어디 있는데?”
―저기 밖에 다 모아 놨지. 다 지브롤터에 가서 헌터는 없대.
“상관없어. 그냥 인원만 많으면 되니까. 호위 병력도 함께 온 거지?”
루시아의 질문에 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함에 타고 있던 병사들도 화물차에 실어서 데려왔으니까.
개인 화기밖에 소지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으나, 나름의 큰 의미가 있었다.
제아무리 대천사들이라고 해도 사람이 우글거리는 곳을 직접 타격하는 건 부담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이제 통신 장비도 설치할 거라서, 얼마든지 교황청의 민낯을 까발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레니의 말을 들은 루시아의 얼굴이 돌연 활짝 펴지는 게 아닌가.
“잠깐만, 어느 나라 선박이 화물선을 공격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