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03화 (204/226)

3화

마기의 구름을 뚫고 불쑥 나타난 존재는 일행을 향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창백한 얼굴에 긴 흑발,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남.

루시아와 레니는 이미 그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어? 그때 그?”

“그렇습니다. 유진 님과 계약한……. 장본인이죠. 쿠르단이라고 합니다.”

일행을 찾아온 자는 뱀파이어 쿠르단이었다.

레니와 엔세데스 말고는 블라드 유진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놈은 말꼬리를 흐리며 정체를 감추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주군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한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쿠르단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루시아는 곧장 레니를 힐끔 돌아보았다.

유진과 동반자 계약을 맺은 그녀라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쟨 아무것도 못 해. 근데 어떻게 알았지?

“뭘 말씀이십니까?”

―안 좋은 상황.

“그야 목격했으니까요.”

하수인 계약이 상위 개체의 몸 상태까지 알려 주지는 않았다.

그저 이자는 블라드 유진이 대천사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지금 가 봐야 소용없어.

“그렇게 안 좋으십니까?”

―웅.

“알겠습니다. 그럼 뭐라도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저희도 신뢰를 얻고 싶으니까요.”

―음…….

레니는 쿠르단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계의 뱀파이어 일족은 지구의 로드와 전혀 접점이 없는 상태였다.

하수인을 자처했다고 해서 쉽게 믿음을 줄 리가 있나.

그래서 그런지 유진은 쿠르단 무리를 별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저 근처에서 대기하게만 했을 뿐.

―뭘 해 줄 수 있지?

“뭐든 가능합니다. 대신에 유진 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래. 그럼 너만 가야 해.

“물론이죠.”

쿠르단은 그와 직접 하수인 계약을 맺은 당사자였다.

하지만 유진은 이 녀석이 거느린 뱀파이어들에겐 따로 혈성쇄혼술을 걸어 두지 않았다.

괜히 무방비 상태인 블라드 유진에게 데려가면,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로드의 혈액은 하위 뱀파이어들에게 천금과도 같은 보물이니까.

그 사실을 잘 알았던 레니는 쿠르단만 데리고 마기 축출 역장을 통과했다.

“이거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직 부탁은 하지도 못했는데……. 일단 기다려 보는 수밖에요.”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레니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태구는 현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크 엘프 소녀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아무래도 저 둘은 죽이 잘 맞는 듯했다.

* * *

“음…….”

쿠르단은 낮은 침음을 내뱉었다.

침상에 누워 곱게 잠든 블라드 유진을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본능은 얼른 저 고위 뱀파이어의 혈액을 취하라고 하는데, 뭔가가 강제로 억누르는 느낌.

아마도 혈성쇄혼술을 통한 주종 계약 때문이리라.

극심한 충동이 치밀어 올랐으나,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저 두근대는 심장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릴 뿐.

레니는 그런 쿠르단을 향해서 질문을 툭 던졌다.

―뭐 좀 알겠어?

“체내에 신성력이 침투했군요. 아마 로드께서는 그 사악한 기운과 사투를 벌이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도울 방법은 없을까?

“매우 정순한 피의 권능을 주입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왜?

“그런 힘을 지닌 존재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죠. 대체 그런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적어도 지구상에서 마기를 다루는 인물 중엔 단연코 없었다.

그나마 일행 중에는 SS급이 된 레니가 가장 강한 마기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태구가 보유한 마기 또한 상당히 순도가 높았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에게는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질 떨어지는 마기를 주입해 봐야 되레 방해만 될 뿐이었다.

쿠르단의 설명을 들은 레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스스로 이겨 내길 바라는 수밖에요.”

―그래. 아마 그러실 거야.

“아직 무사하시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됐습니다. 그럼 미궁 정화에 힘을 보태면 되겠습니까?”

녀석은 유진이 사르데냐섬을 정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활약을 지켜보았으니까.

하지만 레니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긴 공략하지 않을 거야. 아마 다른 데는 정화할 텐데……. 어떻게 할지는 몰랑. 쟤들이 알 거야.

그녀는 역장의 출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루시아와 다이애나를 가리켰다.

“그럼 저쪽에 여쭈어봐야겠군요.”

―웅.

쿠르단은 곧장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블라드 유진 님의 충직한 수하 쿠르단입니다.”

“반가워요. 그나저나 도움을 주겠다고요?”

“네. 저희는 마기의 구름을 뚫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니,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좋습니다. 마침 도움이 필요했는데, 공교롭게도 딱 맞춰 오셨네요.”

“뭘 해 드리면 될까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운송이에요.”

루시아의 말에 쿠르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 무리는 현시점에서 공략대에 가장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전원이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항구까지 가는 데 전혀 무리가 없을 터였다.

힘과 체력도 매우 좋아서 물자를 옮기는 것도 거뜬했다.

물론 보급 물자의 승하차가 힘들 뿐, 운송은 차량이 하는 거지만.

어쨌거나 30인의 뱀파이어는 운송 임무를 맡기로 했다.

이번 원정에는 레니와 태구도 함께였다.

아무래도 뱀파이어들만 보내기에는 스페인 측과 전혀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협상 전문가로 활동했던 레니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보급을 받아 올 수 있으리라.

―다녀올게. 동생들!

“다이애나 안녕! 여기서도 영웅이 될게!”

레니와 태구는 마기 축출 역장 앞에 서 있는 루시아와 다이애나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아하하! 영웅이 된다니 저게 무슨 말이죠?”

“그……. 태구 씨가 미국에서는 되게 명성이 높거든요. 라바맨이라고 코믹스도 나올 정도예요.”

“그래요? 그래서 그 이상한 포즈를 잡는 거였군요.”

“요즘에 미는 건데, 평은 좀 갈려요. 너무 방정맞다고 말이죠.”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애들은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럼 됐죠. 뭐.”

화염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태구의 퍼포먼스를 떠올린 루시아는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 말았다.

고전 슈퍼히어로 같은 대사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얘는 안 가네요?”

“네, 레니 말로는 여기 있겠다고 했대요.”

웬일인지 녹턴은 레니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동반자 중 하나는 주인의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저들이 꼭 성공하기를 빌죠.”

“네.”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마기 축출 역장 속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그들이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 * *

바르셀로나를 떠난 화물선은 지중해를 지나, 사르데냐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대략 560km의 항해는 선원들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연일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의 연속이라, 선실에 틀어박혀 꼼짝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화물선은 차근차근 동진해 나갔다.

“오늘은 화창하네.”

“겨울만 되면 이 난리야. 어디 보자.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간만에 갑판으로 나온 선원들은 두리번거리며 사르데냐섬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평선 저 끝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물선의 목적지임이 틀림없었다.

평균 10노트의 속도로 느릿하게 움직였기에, 항해는 이틀이 넘게 걸렸다.

“엉? 옆에 저건 뭐야?”

“위험하게 섬 근처를 돌아다니는 배도 있나? 우리처럼 목숨 걸고 입도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사르데냐섬 남쪽에서 세 척의 선박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선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중해에 배가 다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베리아반도와 지브롤터를 되찾은 이후, 해양 수송은 이전보다 훨씬 활발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마기에 오염된 섬 주변에 바짝 붙은 함선이라니.

저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자칫 미궁의 분화나 이주가 함선 위로 이루어져 버리면, 한순간에 침몰할 테니까.

그러나 세 척의 함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섬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대뜸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저놈들 저거 이쪽으로 오는데?”

“우리 호위함은?”

“뒤에 있긴 해. 상대가 될지는 모르지만.”

화물선에도 전투가 가능한 함선이 붙어 있긴 했다.

하지만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스페인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새로 건국하다시피 한 나라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유럽 통합군의 장비를 노획하기는 했으나, 해군 전력은 형편없었다.

굉장히 중요한 임무였지만, 수십 년 된 2천 톤급 초계함 한 척을 달랑 붙여 준 게 최선이었다.

“저놈들 뭐야? 왜 교신이 안 돼!”

“모든 채널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저거 대체 어디 거지?”

“깃발도 보이지 않아서 그 또한 확인이…….”

“일단은 우회하도록 하지. 최대한 속도 올리게.”

“예, 선장님!”

공략대의 보급 물자를 실은 화물선은 세 척의 함선을 피해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허울뿐인 호위함으로는 상대를 견제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장은 너무도 잘 알았다.

세 척의 구축함은 만재 배수량 6천 톤을 가뿐히 넘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회피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의 목적은 명백하게 화물선인 것 같았다.

방향을 틀자마자 그대로 따라오는 모습을 보였다.

포격 거리에 들어왔음에도 계속 접근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배에 실린 물건을 노리는 듯했다.

“이 미친……. 시대가 어느 시댄데 지중해에서 해적질을!”

선장은 눈을 부릅뜨며 세 척의 구축함을 노려보았다.

이대로라면, 공략대에 전해 줄 보급 물자를 깡그리 잃게 생겼다.

하지만 선장은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저 빌어먹을 놈들로 인해, 전 재산과 신뢰까지 몽땅 날릴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떻게 붙잡은 기회인데, 무슨 짓을 해서든 화물을 지켜야만 했다.

“항구에 꼬라박아도 괜찮고, 침몰해도 상관없다! 그대로 전속 항진한다!”

“예!”

화물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연료를 전혀 아끼지 않고 미친 듯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 봐야 10노트에서 14노트로 올랐을 뿐이었다.

접근 중인 것들은 최대 속력 29노트가량의 구축함.

느릿한 화물선으로 도망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항구에 거의 다다르긴 했으나, 스페인 화물선은 꼼짝없이 포위당하고 말았다.

“젠장 여기까진가…….”

욕지거리를 내뱉은 선장은 긴장한 표정으로 초계함을 돌아보았다.

전투 준비를 마쳐 놓기는 했지만, 발포할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랬다간 대함 미사일과 함포 사격을 얻어맞고 그대로 침몰할 테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선장은 화물선을 둘러싼 구축함들의 동태를 살폈다.

이윽고 놈들은 드디어 교신을 보내왔다.

―투항하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무전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음성에 선장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썩을 마피아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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