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게……. 되네?”
“그러게요. 잘만 되는데요?”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살짝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제단을 바라보았다.
DK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한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단은 수백 개체의 분신뿐만 아니라, 잡동사니 또한 완벽하게 이동시켰다.
마기에 물든 바위나 바싹 마른 초목 같은 것들이 바로 실험에 쓰인 잡동사니였다.
그것들은 DK와 함께 미국으로 가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이 제단이 만능은 아니었다.
“재사용까지 1시간 정도 측정되는군요.”
“좀 걸리긴 해도 이보다 빠른 이동 수단은 없을걸요? 아마 되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긴 재사용 대기가 길 뿐이지, 이동은 한순간이니까요. 이거 이탈리아와의 계약을 재고해 봐야겠는데…….”
“무슨 계약이요?”
한창 버지니아주 전선 확장에 열중하던 다이애나는 최근 유진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유럽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전혀 몰랐다.
루시아는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유진 님을 공격한 건 바티칸 시국이니, 이탈리아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나요?”
“네. 서로 엄청난 영향력을 주고받긴 해도, 엄연히 다른 나라죠. 아마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긴 할 텐데, 증거를 찾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여길 이탈리아에 넘겨주는 건 되게 아깝네요.”
스페인과 미국이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면,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낼 터였다.
블라드 유진의 존재로 인하여 몇몇 나라는 긴밀한 협력 관계로 발전했으니까.
특히 한국과 스페인, 미국, 영국 등은 굳이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활발하게 협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거듭된 미궁 성장 사건으로 만남이 좀 뜸했지만.
루시아는 이 제단을 손에 넣은 이후의 상황을 그려 보았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인력과 물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창구라니.
이런 미친 혜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일단 이 일은 불문에 부치죠. 아마 완벽하게 막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괜찮을 겁니다.”
그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헌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사르데냐섬의 통신 시설이 모조리 파괴되었기에, 휴대 전화는 무용지물이었다.
몇몇이 위성 전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걸 차단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유진 님인데……. 그분을 옮기자니, 위험 부담이 더 커질 것 같아요.”
“그렇겠죠. 우리가 여길 벗어날 때를 교황청에서 호시탐탐 노릴 테니까요.”
다이애나는 대략적인 이야기만 듣고도 상황을 매우 정확하게 짚어 냈다.
블라드 유진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가브리엘과 라파엘 또한 상당한 피해를 보고 말았다.
아마 곧바로 쳐들어오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놈들은 재정비가 끝나는 순간, 그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루시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두 대천사에게서 유진을 향한 명백한 악의를 느꼈으니까.
“그분을 뵙는 게 우선이겠네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요.”
“아, 엔세데스 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치유 능력 같은 건 걸어 봤자 소용이 없다네요.”
“그래요? 하긴 외상은 전혀 없다고 하셨으니…….”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점점 저도 버티기가 힘드네요.”
“네.”
미궁에서 워낙 오래 머무르다 보니, 루시아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마기가 체내로 침투한 탓이었다.
S급인 그녀가 이렇게 느낄 정도면, 다른 헌터들은 슬슬 고통이 찾아올 때가 되었다.
고농도의 마기에 노출되면, 온갖 부정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역시나 공략대원들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몇몇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구토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루시아는 서둘러 공략대를 이끌고 대성체 미궁을 빠져나갔다.
* * *
“아아……. 유진 님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 줄이야.”
다이애나 로즈는 아련한 눈빛으로 침상에 누운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에 루시아는 코를 찡긋거렸다.
괜스레 자신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좋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한번 만져 보겠어?”
하지만 이어진 다이애나의 말에 루시아는 하마터면 그대로 자빠질 뻔했다.
“으엑? 대체 뭐라는 거예요?”
“그냥 손이라도 잡아 보려고……. 저 그렇게 이상한 여자 아니에요.”
“아, 그런 거죠?”
“네.”
정상적인 해명이 없었다면, 유진의 곁에 무릎 꿇고 앉은 그녀를 끌어냈을 터였다.
그런데 다이애나 로즈의 손길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뺨을 만져 보려는 모양인지, 대뜸 얼굴 쪽으로 손을 뻗은 것이다.
파지직!
“앗! 따가.”
유진과 접촉하자마자 다이애나는 황급히 물러나고 말았다.
강력한 에너지의 파장이 발생하여 그녀의 몸을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루시아가 받쳐 주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질 뻔했다.
암자색 스파크가 튀는 순간, 전신의 힘이 쭉 빠져 버렸으니까.
“고마워요.”
“아이템인지 스킬인지는 모르지만, 자체적인 방어 능력이 있나 봐요.”
“정말이지 혼수상태에서도 쉽지 않은 남자네요.”
“훗. 그러게요.”
다이애나 로즈는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강렬한 반응을 보아하니, 엔세데스의 말처럼 치유 능력을 써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잠시 고요하게 잠든 그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막사를 나섰다.
블라드 유진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기에는 작금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관건은 누가 먼저 회복하냐겠군요.”
“아무래도 대천사들이 더 빠르지 않을까요? 피격은 유진 님이 훨씬 많이 당하셨으니까요.”
“그렇겠죠. 근데 엔세데스 님은 어디 가셨나요?”
“영지를 돌아보려나 봐요. 얼마 전에 다녀오셨는데, 아마 마음이 조급해지신 거겠죠.”
화룡왕은 사르데냐섬에 오기 전, 이베리아반도와 프랑스의 영지를 다 돌고 온 상태였다.
아마 지금 가 봤자 별반 성과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먼 길을 떠났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해도 엔세데스 또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영기를 모아서 아공간을 열면, 유진에게 큰 도움이 되는 거니까.
하지만 하루가 훌쩍 지났는데도 그는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마기 축출 역장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수십 명의 공략대원들이 각자 텐트를 쳐 놓았기에, 역장 내부는 비좁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시아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큰일이군요. 이 상태로 버틸 수 있는 건 이제 이틀뿐이에요.”
사르데냐섬 공략대는 딱 나흘 치의 식량밖에 가져오지 않았다.
그 안에 충분히 정화가 끝나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존 블라드 유진의 속도라면, 이틀 안에 마무리될 일이었다.
하지만 대천사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모든 게 어그러져 버렸다.
“어떻게든 보급 물자를 가져와야겠네요.”
“그러려면 우리가 오리스타노로 마중을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오리스타노(Oristano)는 사르데냐 자치주 서부의 작은 도시였다.
산업 시설 항구를 끼고 있어서, 물자를 받기에 적합했다.
공략대는 섬 중앙의 도시, 누오로(Nuoro) 인근에 있었으니까.
문제는 당장 이곳을 비울 수가 없다는 거였다.
옮기는 거야 둘째치고, 혼수상태인 유진을 두고 어딜 가겠는가.
그러다가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또 쳐들어오면?
그땐 손 써 보지도 못하고 그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지금보다 인원을 훨씬 많이 모아서, 건드릴 수 없도록 집단의 덩치를 불리는 게 시급했다.
“일단은 오리스타노로 파견할 인원부터 뽑아야겠네요.”
“가는 길이 험난할 텐데, 소수 인원으로 될까요?”
다이애나의 말대로 사르데냐섬은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미궁 공략을 하다 말았으니, 분화와 몬스터 웨이브가 시도 때도 없이 발생했다.
정화된 땅을 다시 마기로 오염시키려는 강한 힘이 스멀스멀 차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달랑 소수 인원만 보냈다가는 십중팔구 전멸당할 터였다.
루시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략대의 텐트를 힐끔거렸다.
사실 저들 중에 믿음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예는 전선에 나가야 하니까, 이런 곳에 데려올 만한 인원은 쭉정이뿐이었다.
종종 A급이 있긴 했지만, 공략대의 핵심 전력을 외부로 돌리긴 어려웠다.
여차하면 싸워야 하는 인원이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쯤, 문득 희한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야, 너 재밌다.
“내가 또 한 드립 함. 입은 없지만 잘 나불대지. 어때?”
―쿠히히.
“히히힝. 푸르르르!”
루시아와 다이애나가 목격한 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중인 세 존재였다.
레니와 태구, 녹턴은 놀랍게도 마기의 구름 속을 유유자적 거닐었다.
셋 다 인간이 아닌 데다가 마기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저 피해를 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기를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세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루시아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불현듯 옆을 돌아보자, 다이애나 로즈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맞추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림일국 씨 부르죠?”
* * *
“나 참, 갑자기 왜들 들락날락하시려는 건지. 자, 열었습니다.”
후웅!
림일국이 출입구를 만들어 주자,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마기 축출 역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역장은 마기뿐만 아니라, 모든 에너지의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을 지녔다.
그 말인즉, 그 어떤 존재도 마음껏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했다.
새삼 림일국의 특별함과 유진의 눈썰미에 감탄하며, 두 사람은 마기 축출 역장을 나섰다.
“이거 봐라. 우헤헤!”
태구는 복부에 네모난 창을 만들어서 레니가 볼 수 있는 간단한 영상을 틀어 주었다.
물론 녀석이 창작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피부의 그을음으로 표현해 냈을 뿐이었다.
마치 무성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꺄하하.
레니는 깜찍한 고양이와 쥐 캐릭터를 보고는 신나게 웃었다.
아무래도 태구의 선택이 소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 같았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녹턴과 함께 레니는 캐릭터들의 추격전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그런 셋의 근처로 루시아와 다이애나가 접근했다.
“이 뒤로는 기억이 안 남.”
―어떻게 됐는지 몰라?
“응. 몬스터 때려잡느라, 바빠서 TV를 못 봄.”
마침 영상이 끝난 시점이라, 두 사람은 레니와 태구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얘들아.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니?”
―얘들? 어디! 언니한테.
레니는 고사리 같은 손을 허리에 얹으며 호통쳤다.
하지만 작은 체구와 오밀조밀한 얼굴 때문에, 위압은커녕 귀엽기만 했다.
―야야, 너도 얼른 나이 밝혀.
다크 엘프 소녀는 십폭마귀의 다리를 툭툭 치며 지원 사격을 요청했다.
그러자 태구도 괜히 헛기침하며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엣헴! 나는 최소 천 년 넘게 살았음. 나이부심 부릴 만하쥬?”
요구 사항이 있었던 루시아와 다이애나는 이들의 장단에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예이. 예이.”
“인정합니다요!”
두 사람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레니와 태구는 팔딱거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냥 이런 역할극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조금이나마 놀아 줬으니,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그런데 입을 열려던 루시아는 잠깐 멈칫하더니,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웬 인형이 불쑥 솟아나는 게 아닌가.
“말씀 좀 묻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