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01화 (202/226)

1화

상대는 누가 봐도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상이었다.

얼굴에 커다란 느낌표를 띄워 놓고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용암으로 이루어진 큼지막한 몸체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몬스터가……. 말을 해? 그것도 한국어를?”

―이상해.

“일단 물러서자. 전원 전투 준비!”

공격 의사는 없어 보였으나, 미궁에서 안일하게 대처하는 건 전멸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두 번의 미궁 성장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이 대성체 미궁은 새로 분화된 거라, 영향이 좀 적긴 했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판단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2m 남짓한 크기의 검붉은 괴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뜸 일상적인 말을 툭툭 내뱉었다.

“방금 너희들 한국말 한 거 아님? 그랬던 거 같은데?”

“넌 누구지?”

몬스터와 대화를 하게 된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루시아는 침착했다.

유진과 함께 다니며 더 괴상한 일을 자주 겪어서 그런지, 당황스러운 마음은 금방 가라앉았다.

얼마 전에는 대천사라는 지고한 존재를 둘이나 마주치지 않았던가.

그녀가 한국어로 질문을 던지자, 괴인은 팔짱을 끼며 가슴팍을 부풀렸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지. 위대한 미국의 영웅, 라바맨 태구!”

쿠웅! 쿠구구구!

녀석이 발을 구르며 몸을 가볍게 털자, 사방으로 강력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화염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듯한 퍼포먼스는 굉장히 화려했다.

물론 등장 대사는 영 구렸지만.

“아, 이거 왠지 좀 별론데. 단어 조합을 바꿔 볼까?”

라바맨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자 이윽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등장 퍼포먼스에 심취한 나머지 화염을 너무 많이 뿜어냈던 것이었다.

루시아를 비롯한 공략대는 저만치 거리를 벌리고 잔뜩 경계하는 중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야.”

―응. 불길에서 마기가 느껴져.

“아무래도 저 녀석이 이 미궁의 최종 보스인 모양이네. 준비됐어? 레니?”

―이 언니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 근데 왜 계속 언니한테 반말해? 너 혼난당.

“어어……. 에스파냐식 문화라고 할까?”

―아, 그런 거였구나? 알았어.

식은땀을 삐질 흘린 루시아는 이내 태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니의 핀잔에 당황한 것도 잠시, 지금은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고 미궁을 정화할 때였다.

“간다! 공격 개시!”

그녀는 근접 딜러에 가까운 헌터였지만, 공략대에는 더 뛰어난 탱커가 없었다.

그랬기에 루시아는 항상 메인 탱커 역할을 맡아 왔다.

강력한 뇌전의 창을 날려서 최종 보스의 시선을 끌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일엔 도가 텄다.

그만큼 그녀는 수많은 전투를 치러 왔고, 상당한 속도로 성장했다.

이제 거의 SS급에 올라서기 일보 직전이었다.

웬만한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정도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흐압!”

쿠후우웅! 파지지직!

기합과 함께 깃발 창을 내지르자, 번쩍거리는 방전구가 쏘아졌다.

루시아만의 전용 기술, 풀고르 글로부스가 펼쳐진 것이다.

한데, 그녀는 스킬을 시전하자마자 급하게 번개 구체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의외의 인물이 라바맨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다이애나 씨?”

루시아는 엉뚱한 곳에 스킬을 처박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국에 있어야 할 다이애나 로즈가 사르데냐섬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는 멍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왜 거기서 나와요?”

“그러게요? 루시아 씨는 왜 여기 계세요?”

“그야……. 우리가 토벌 중인 미궁이니까요. 여긴 사르데냐섬이에요.”

“네에에?”

루시아의 답변에 다이애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 태구와 함께 버지니아주 베드퍼드(Bedford) 인근의 대성체 미궁을 공략 중이었으니까.

다이애나 로즈는 살기 등등한 공략대원들을 돌아보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일단 저분들 좀 물려 주실래요? 굳이 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아, 미안해요.”

루시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얼른 전투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고는 보랏빛 불꽃이 올라오는 제단에 나란히 앉아, 다이애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그렇게 된 거였군요.”

“네. 제단에서 빛이 나기에 접근했더니, 이쪽으로 넘어오게 되었어요.”

서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두 사람은 금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대성체 미궁은 미국과 연결된 일종의 공간 이동 포탈이었다.

진입한 시간을 맞춰 보았지만, 격차는 거의 없는 듯했다.

사르데냐섬의 미궁이 사뭇 신기한 듯, 다이애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희는 여기가 최종 보스 방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쉽지만 이곳에는 최종 보스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이대로 두고 그냥 들락날락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려 미국과 연결되는 지름길인데…….”

“공간 이동이 어디까지 되나 이참에 확인해 보죠.”

“그럽시다.”

협의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보라색 불길이 이글거리는 제단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일단 다이애나와 태구, 둘까지는 공간 이동에 성공한 상태였다.

그럼 그보다 많은 인원은 어떠할까?

루시아는 공략대원들을 쭉 둘러보며 지원자를 받았다.

하지만 선뜻 앞으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사실 이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국에서 지중해로 건너온 거야 우연히 될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저기가 어딘 줄 알고? 미국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게다가 저 제단을 통과한 둘 중 하나는 몬스터야.”

“우리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군. 다이애나 로즈, 저분은 S급 최상위잖아.”

“힐러 아니었어?”

“버퍼야. 근데 전투 능력도 나름 출중하다더군.”

“그럼 괜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지원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의견을 교환하던 대원들은 그렇게 딴청을 피우더니, 누군가를 곁눈질했다.

루시아가 없을 때, 스페인 헌터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페르난도 칸토였다.

얼떨결에 앞으로 나선 그자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루시아 님께서 함께 가신다고 해도 지원자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솔직히 저희 수준은 S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지니까요.”

“다이애나 씨 말로는 안전하다던데…….”

“저분 또한 S급이지 않습니까?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겁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귀한 목숨을 이런 데다 걸 수는 없겠죠.”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루시아는 페르난도를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다이애나와 태구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괜찮아요. 여러 번 오가는 모습을 보여 주면, 안전을 의심하는 이들도 줄어들 테니까요. 대규모 이동은 그때 해 봐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다이애나 로즈의 의견에 루시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인지,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셨기 때문이었다.

한데, 문득 제단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던 네 사람을 향해서 누군가가 불쑥 접근했다.

“공간 이동 그거 분신으로 실험해 보면 안 됩니까? 제 분신은 사람하고 거의 똑같은데요.”

“아……?”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원한 인물은 놀랍게도 멀찍이 떨어져서 상황을 관망하던 DK였기 때문이었다.

다이애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요. 삼성동 저택에서는 종종 뵈었는데. 그간 잘 지내셨나요?”

“예, 뭐.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럭저럭 살아는 있네요. 어쨌거나 분신으로도 되는 거죠?”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그냥 한번 해 봅시다.”

DK의 의견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사람보다 분신을 보내는 편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잘못되었을 때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되고.

하지만 분신 실험에도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근데 그럼 잘 됐는지 확인은 어떻게 해?

“…….”

문득 던진 레니의 질문에 일행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미국 버지니아주 베드퍼드에서 사르데냐섬까지는 무려 7,300km.

북대서양을 한 번에 건너고도 지중해 중심으로 더 들어와야 하는 거리였다.

그 먼 곳까지 DK의 분신이 이어질지도 의문이었지만, 확인할 방법 또한 전혀 없었다.

여기나 거기나 미궁 내부임은 확실한데, 무슨 수로 통신을 한단 말인가.

일행은 전원 DK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왜 그렇게 보세요? 예?”

“아무래도 분신만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지 않나요?”

“그건…….”

“분신이 멀리 떨어졌을 때, 어디까지 느끼실 수 있죠?”

“……정확하게 재 보진 않았지만, 몇 킬로미터 정도면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럼 안 되겠네요?”

“네.”

DK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분신과 함께 직접 저 제단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심코 오른편을 바라보았던 DK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레니가 암청색 단검을 손아귀에 생성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자그마한 단검 형태지만, 언제 거대한 낫이 되어 목을 노려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 아니야! 나 이상한 생각한 적 없어.”

―현혹술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 내가 다 알아.

“야, 너 그런 한자어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말 돌리지 마. 그랬지?

“크, 크흠!”

―혼나?

은근한 압박에 DK는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결국에 녀석은 제단 앞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레니가 계속 등을 떠밀고 있었으니까.

“알았어! 간다고! 가!”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도 같이 갈 거니까.

“엉? 나 혼자 가는 거 아니었어?”

불현듯 튀어나온 말에 DK는 고개를 홱 돌렸다.

다른 일행 또한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레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념을 보냈다.

―뭘 믿고 이 사람만 혼자 보내? 그냥 안 돌아오고 거기서 자유롭게 활동할 놈인데.

“아하!”

“그런 깊은 뜻이!”

루시아와 다이애나가 동시에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면서 말하자, DK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아니, 언제부터 내 신뢰도가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내가 어? 진 연합체에서 얼마나 활동을 많이 했는데.”

―몰라서 물어? 도망치려고 했어? 안 했어?

레니가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자, 녀석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물러섰다.

“그렇다고 라임까지 맞춰 가면서 압박하냐? 알았어. 알았다고!”

―네가 알긴 뭘 알아? 배신자.

“저기요. 이 꼬마의 어휘력이 언제부터 이렇게 상승했는지 아시는 분?”

DK의 질문에 대답한 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다이애나 로즈였다.

“그거 특정 대상에게만 그러는 거 같은데요? 잔머리 그만 굴리고 이제 들어가시죠?”

“옙.”

화사한 꽃처럼 아름다운 웃음이었지만, 그녀의 일침은 무시무시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DK는 제단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천군압쇄로 분신을 만들었다.

슈슉! 슈슈슈슉!

수도 없이 늘어나는 인형을 본 태구는 얼굴에 커다란 원 두 개를 띄우며 중얼거렸다.

“와! 이거 다중 환영분신술이잖아? 쟤 어디 마을 사람이야?”

물론 녀석의 말을 이해하는 일행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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