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200화 (201/226)

25화

일행을 가로막은 인물은 사르데냐섬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DK였다.

가브리엘에게 혈성쇄혼술이 제거당한 이후, 이자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래라면 교황의 끄나풀 짓이나 하면서 간신히 연명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죽었고, 두 대천사는 DK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웬만한 정보는 이미 다 뽑아 먹었으니, 교황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라고 던져 준 거였으니까.

어쩌다 버려지게 된 DK는 갈팡질팡하다 결국 일행에게로 복귀하는 걸 택했다.

물론 루시아는 이놈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 작전 중 이탈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교황을 감시하다가 가브리엘 대천사에게 피랍당한 거니까요.”

DK는 나름 논리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루시아는 블라드 유진이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이자가 곁을 떠났다고만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설득하기 어려울 수밖에.

억울함을 피력한 DK는 멀뚱멀뚱 서 있던 레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봐, 친구. 설명 좀 해 달라고.”

―뭘?

“적으로 만났지만, 난 널 공격하지 않았잖아. 그렇지?”

유진이 대천사들과 격돌했을 때의 상황을 들먹이자, 흑발 소녀의 뾰족한 귀가 쫑긋 세워졌다.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진난만하게 반문했다.

―현혹술이 안 걸려서 그런 거잖아. 비열하고 치사한 DK.

“야, 너무하네! 애초에 공격할 생각도 안 했다고. 진짜야! 그냥 저쪽 편에 있는 척만 한 거라니까?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

―되게 필사적이네.

“간신히 탈출했는데, 내가 고향 말고 어딜 가겠어.”

―DK도 고향이 있었어?

“당연하지! 난 말이야. 남미의 아름다운…….”

―주인의 고향은 헝가리인데.

“사, 사실 정신적 고향을 말하는 거였어. 당연히 대부님의 곁이 고향이지. 아하하!”

레니와 DK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아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현시점에서 저자를 받아들이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한 번 배신한 인물은 언제든지 깃발을 바꿀 수 있으니까.

“됐어요. 이제 그만…….”

그녀는 끝없이 이어지려 하는 둘의 대화를 끊으려 했다.

한데, 이야기를 나누던 레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그래도 주인이 졌는데 돌아온 건 정상을 참작할 만하네.

“저, 정상…….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레니 똑똑해. 얼마 전에는 협상전문가도 했다고. 엣헴!

“와아! 대단하네.”

레니가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자, DK는 눈물의 똥꼬쇼를 하며 비위를 맞췄다.

이윽고 만족한 표정이 된 다크 엘프 소녀는 루시아를 올려다보며 의념을 보냈다.

―합격.

“아니, 대체 기준이 뭐야?”

―내 기분이 좋아. 합격!

“나 참…….”

―어차피 처결은 주인이 할 거야. 그때 하수인 계약을 다시 해도 되고.

“그래. 알겠어. 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녀는 DK를 흘겨보며 엄중하게 경고를 날렸다.

“허튼짓하면 창을 세로로 꿰어 버릴 거예요.”

“예? 무슨……? 세로요?”

“일명 꿰뚫기 형(Impalement)이라고 하죠? 조심하세요.”

“그, 그럼요. 절대로 수상한 짓 안 하겠습니다.”

왠지 탐탁지 않았지만, 레니의 결정으로 DK는 일행에 잔류할 수 있게 되었다.

* * *

DK를 받아들인 건 공략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현혹술과 천군압쇄는 대규모 전투에서도 빛을 발했으니까.

“확실히 좋은 능력이긴 하네.”

루시아는 작게 주억거리며 전황을 쭉 훑어보았다.

공략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임에도 미궁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일부 몬스터들은 서로 죽일 듯이 치고받았으며, 나머지는 DK의 분신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대난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공략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유진 님처럼 그냥 지나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네. 천천히 제압해 보자고.”

―웅.

블라드 유진이야 몬스터 웨이브가 터지든 말든 유유히 빠져나갈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놈들을 모조리 찢어발기는 것도 가능했다.

그저 귀찮아서 건드리지 않을 뿐.

하지만 공략대에는 그런 지고한 은신술이 없을뿐더러, 정화된 지역에 몬스터가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었다.

루시아는 레니와 함께 선봉에 서서 부하 몬스터들을 정리했다.

“하필이면 변검귀라니…….”

―얘네 좀 귀찮아.

레니는 개성 인근에서 변검귀를 몇 번 접해 본 적이 있었다.

이놈들은 카멜레온이나 문어를 아득히 뛰어넘는 위장 능력을 보유한 몬스터였다.

상대하기가 무지하게 까다로워서, 웬만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물론 그건 오염 지대를 넘나드는 헌터의 입장이었다.

정화를 위해서 미궁에 들어온 공략대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변검귀가 미궁 밖으로 나돌면 더 귀찮아질 터였다.

게다가 어차피 몬스터 웨이브를 최소화해야 하니까, 다 잡아 죽이는 게 정석이었다.

“맡겨만 주세요. 미끼 던지는 거야 제 전문이죠. 딸려 오는 족족 족치시면 됩니다.”

DK는 이미 천군압쇄를 시전하여 몬스터 무리에 숨은 변검귀를 찾아내고 있었다.

수백이나 되는 분신이 아니었다면, 공략대는 맨몸으로 변검귀의 기습에 대비해야 할 터였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솔직히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별로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아. 부탁하지. 차앗!”

푸확―!

그녀는 분신을 쫓아서 위장을 해제한 변검귀의 몸통에 깃발 창을 꽂아 넣었다.

그 일격을 기점으로 공략대의 몬스터 낚시가 시작되었다.

변검귀의 수효가 워낙 많았기에, 작전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DK의 활약으로 종일 걸릴 일을 고작 몇 시간 만에 해낼 수 있었다.

공략대는 파죽지세로 중간 보스까지 처죽이고, 금방 미궁의 끝에 도달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 봐도 최종 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척이 없어. 이럴 순 없는데…….

“그러게.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더 이상 살펴볼 곳도 없고 말이야.”

루시아와 레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간 수많은 미궁을 공략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혹시 미궁 군체와 관련이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럼 모를 리가 없어. 군체는 아예 대놓고 연결되어 있거든.

“그럼 최종 보스는 어디로 간 거지?”

―섬에 마기가 가득 차지 않았으니, 이주는 아닐 거야.

“내 생각도 그래.”

중지를 모아 보았지만,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작은 실마리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은 미궁 내부를 몇 바퀴 더 돌아보기로 했다.

“여기 좀 와 보실래요?”

그런데 문득 저 멀리서 DK가 일행을 부르는 게 아닌가.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레니를 힐끔 돌아보았다.

“언제 저까지 갔대?”

―아까 슬금슬금 이탈하는 거 봤어.

“함정일 가능성은?”

―움……. 없어. 뭘 발견해서 가 본 것 같은데.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한가.”

레니는 별 의심 없이 DK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미약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두우웅!

“뭐지?”

루시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헌터들은 아무 문제 없이 뒤따라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현장에 도착하자, DK와 레니가 뭔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게 뭔데?”

―보라색 불이야. 되게 반짝거려.

칼륨의 불꽃 반응이 보랏빛에 가깝긴 했다.

하지만 눈앞의 화염은 그보다 훨씬 진한 색이었다.

솔직히 보라색 종이를 불꽃 모양으로 잘라 놓고 밑에서 바람을 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가까이 다가갔는데,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

“신기하죠? 이런 색상의 불꽃은 처음 보는데요. 왠지 여기……. 무슨 제단 같지 않습니까?”

DK의 말을 듣고 보니, 두 개의 화로와 낮은 단상이 눈에 확 들어왔다.

가운데다 제물을 바치고 화로에 불만 켜면, 장엄한 의식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저 보라색 불꽃을 어떻게 일으키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불 한번 붙여 볼까요?”

DK는 차갑게 식은 반대편 화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최종 보스에게로 가는 길이 열릴지도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데…….”

꽤 솔깃한 의견이었으나,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아직 미궁의 전역을 다 돌아본 것도 아니거니와,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공략대를 이끌고 수색을 재개했다.

하지만 최종 보스는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자꾸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변검귀만 공략대를 괴롭힐 뿐이었다.

아마 DK의 분신이 미끼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생각보다 피해는 컸을 것이다.

SS급인 레니조차도 놈들이 기습을 펼치고 나서야 종적을 알아챌 정도였으니까.

“저기……. 루시아 님?”

“왜 그러지?”

“아무래도 불을 붙여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한창 수색하던 도중, 문득 DK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사실 그녀 또한 마음이 그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미궁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근거도 없이 의견을 낸 게 아니었다.

“저길 보십시오.”

DK가 가리킨 곳에는 횃불이 떨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색상은 보랏빛이었다.

화로에서 타오르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이러면 진짜 안 붙여 볼 수가 없겠는데?”

―해 보자. 어차피 남은 선택지도 없잖아?

“그건 그래.”

불을 붙이기로 마음을 먹긴 했으나, 대책 없이 허투루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루시아는 제단 주변으로 공략대를 정밀하게 배치했다.

어떤 놈이 튀어나와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 진형을 갖춰 놓는 것이다.

DK에게는 분신을 최대한 많이 뽑아 둘 것을 주문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그녀는 횃불을 주워 들었다.

아무런 연료가 없음에도 보라색 불꽃은 잘만 타오르고 있었다.

“시작합니다.”

“넵.”

루시아는 비장한 얼굴로 화로를 향해 횃불을 내밀었다.

그러자 화염이 마치 다리 달린 화초처럼 폴짝 뛰어서 넘어갔다.

이윽고 두 개의 화로에는 보랏빛 불이 붙게 되었다.

화르르르륵!

순간, 뭔가 강렬한 반응이 있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몇 배로 커지더니, 제단의 중앙으로 보라색 기운이 몰려든 것이다.

공략대는 긴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빙글빙글 돌던 보랏빛 덩어리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큼지막한 검은색 느낌표가 달린 구체에서 난데없이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엥? 님들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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