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99화 (200/226)

24화

―별 희한한 상황을 다 보겠군.

―천주의 등불을 보유하고도 패하다니, 이게 무슨……. 혹시 네놈, 저들의 첩자였더냐?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루시아에게 제압당한 안드레아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투는 처음이라…….”

―정말이지 하등 쓸모없는 놈이로구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잘 알았습니다.”

교황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대천사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수십 년간 성직자의 길만 걸어온 인생이었다.

그런 자가 창날에 목이 꿰뚫릴 위기를 몇 번이나 겪어 봤겠는가.

물론 시절이 하 수상하여 성직자라도 목숨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철저하게 보호되기 마련이었다.

한데, 안드레아의 간청에도 두 대천사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군. 굳이 다 늙은 놈을 각성시켜서 써먹어야 하나?

―사도(使徒)야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알아서 모일 테니, 그중 출중한 놈을 뽑아도 되겠지.

―최근에는 요한이라는 자가 마음에 들더군.

―나도 그래.

이미 차원문은 열었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잘 아는 상황이었다.

굳이 저런 덜떨어진 놈을 교황이랍시고 데려다 부릴 이유는 없었다.

물론 안드레아의 정치력은 인정할 만했지만, 지금은 별로 필요치 않았다.

―원한다면 죽이거라.

“대, 대천사님……!”

스산한 눈빛을 한 가브리엘의 말이 떨어지자, 교황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루시아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설마 최고위 성직자를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래도 어찌 자신을 따르는 자를…….”

전선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스페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루시아는 너무도 정직한 인물이었으니까.

게다가 저들은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제, 제발!”

안드레아가 애걸했으나, 두 대천사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교황이 어떻게 되든 도주하려던 블라드 유진을 잡으려는 요량이었다.

레니와 녹턴의 활약으로 그는 이미 저 멀리 이동한 상태였다.

―흥! 그런다고 도망칠 수 있을 줄 아느냐?

가브리엘은 곧장 단창에서 백광을 뿜어내며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라파엘은 잠시 루시아와 안드레아를 힐끔 돌아보았다.

왜 아직도 죽이지 않았나 하는 표정이었다.

“미친…….”

돌연 적으로 만나긴 했으나, 그녀는 교황의 명줄을 끊을 마음이 없었다.

스페인과는 냉랭한 상태였지만, 교황청이 인류를 지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으니까.

굳이 안드레아를 죽여서 껄끄러운 결과를 낳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쯧! 우유부단하기는.

후웅! 쐐애애액!

대천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황금빛 광선이 낭창거리면서 날아들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고 기세등등했던지, 루시아는 감히 쳐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회피 동작을 펼쳤다.

하지만 애초부터 라파엘의 공격은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콰직! 푸쉬이이!

갑옷을 단번에 꿰뚫은 금색 섬광은 기이한 각도로 구부러지더니, 교황이 들고 있던 랜턴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라파엘에게로 되돌아갔다.

“커허어어…….”

털썩! 쿵!

낮은 신음을 흘린 안드레아는 지면에 얼굴을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 일격에 즉사한 것이다.

“…….”

그 놀라운 광경에 루시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덤빌 텐가.

라파엘은 그런 그녀를 향해서 무미건조한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루시아는 사리 분별이 빠른 사람이었다.

머릿속으로 파고든 상대의 음성에서 별다른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창날을 들이밀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을 듯했다.

휘리릭! 쿵.

깃발 창으로 지면을 가볍게 찍으며 어깨를 으쓱하자, 라파엘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직 뜨끈한 교황의 시체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가브리엘과 합류하려고 세 쌍의 날개를 펼친 바로 그때였다.

“콰우우우우!”

어디선가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사르데냐섬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살기에 라파엘은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거대한 붉은 동체, 위협적으로 생긴 뿔과 이빨,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

상황을 관망만 하던 엔세데스가 불현듯 현신하며 드래곤 피어를 내지른 것이다.

블라드 유진을 뒤쫓은 두 대천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훌쩍 물러섰다.

―엘칸 차원에서 왔다던 레드 드래곤이로군.

―에너지가 모자라서 빌빌대고 있던 거 아니었나?

―의외로 팔팔한 모습인데……. 최근 신변에 변화가 있었나?

―돌파구를 찾았을지도 모르지.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화룡왕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엔세데스가 지구로 온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껏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게 드래곤의 맹약 때문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미안한데, 여긴 내 땅이라서 말이야. 더 이상 접근하는 건 불허한다.

엔세데스는 기세를 뿜어내며 위협했다.

두 대천사는 화룡왕보다 자신들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레벨 격차가 무려 400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블라드 유진을 상대하느라, 진을 빼고 말았다.

가브리엘은 차원 균열에 휘말려서 죽다 살아났고, 라파엘은 천계도살검에 직격당했다.

이 상태로 오랫동안 활동하는 건 불가능한 데다가, 엔세데스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곳이 언제부터 네놈의 땅이었지?

라파엘의 질문에 화룡왕은 입에서 불을 뿜어내며 답했다.

―방금 내가 영지를 개척했거든. 그러니까 이제 이곳은 내 영토란 말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 몸의 대화로 풀어 볼까? 난 내 땅에 들어온 침입자를 용서하지 않는데.

―방금 들어간 저 악의 종자들은 뭐냐?

―쟤들은 내 손님이고.

―제멋대로군.

―내 땅이니까 내 마음대로지. 계속 개소리 지껄일 거면, 한판 붙든가.

엔세데스의 강경한 대처에 두 대천사는 서로를 힐끔 바라보았다.

사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입장에서도 이 이상 무리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기껏 차원문을 통과하여 지구로 내려왔는데, 계획을 실현하기도 전에 소멸당할 수는 없었다.

눈빛으로 빠르게 의견을 교환한 그들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의념을 남긴 채 몸을 돌렸다.

―다음번에는 그런 억지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당장 몸의 대화로 풀어 보자니까? 아니, 대천사씩이나 되어서 쫄리세요? 쫄리면 뒈지시든가.

―…….

두 대천사와 루시아는 드래곤의 얼굴에도 표정이라는 게 있단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가브리엘과 라파엘은 곧장 동쪽으로 날아가더니, 급가속하며 바다를 단숨에 건넜다.

이곳에 더 있어 봐야 엔세데스의 도발적인 언사만 들을 테니, 빨리 사라지는 게 상책이었다.

블라드 유진을 처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일단 어찌어찌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교황의 시체를 들쳐 메고 일행에게로 돌아온 루시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유진의 상세가 매우 나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전신을 꿰뚫은 황금빛 빛줄기 때문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스스로 잘랐다지만 휑한 왼팔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뿌예지는 것 같았다.

이미 블라드 유진을 간호 중인 레니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루시아는 가방에서 휴지를 찾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으실 거야.”

―알아.

“그래. 깨어나실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보자.”

―웅.

하지만 그의 의식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유진이 깨어나지 않자, 일행은 자체적으로 미궁 공략에 나섰다.

왠지 이탈리아가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속단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르데냐섬을 전부 정화할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루시아와 헌터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도 했고.

단지 섣불리 블라드 유진을 옮길 수 없었기에, 주변의 대성체 미궁 하나만 정화할 요량이었다.

SS+급이 된 레니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과업이었다.

“얼른 저걸 정화하는 게 좋아. 보급도 보급이지만, 그들을 막으려면 사람이 많은 게 좋거든. 그동안 엔세데스 씨가 유진 님을 지켜 주실 거야.”

그녀는 스페인과 프랑스에 병력을 요청해서 이 근방을 아예 둘러쌀 작정이었다.

대천사가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대놓고 대학살을 일으키지는 못할 테니까.

―알았어.

레니를 설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룡왕 또한 유진을 보호해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림일국의 마기 축출 역장도 있으니, 미궁 공략을 하는 동안 그가 위해를 입을 가능성은 적었다.

교황청에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가 300km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잘 부탁드려요. 다녀오는 동안은 술 좀 줄이시고요.”

“어허! 난 술 없으면 일 못 해.”

“평소에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냥 계속 드시던데요?”

“아, 어차피 난 잘 취하지도 않는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해롱거리시는 거 몇 번 봤거든요?”

“잘 취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잘! 무슨 일 있으면, 알코올쯤이야 그냥 날려 버릴 수 있어. 그러니 얼른 갔다 오기나 해.”

“공략하는 동안, 술 안 마시면 마오타이주 한 병을 드릴게요. 중국 고량주예요.”

“오호?”

꽤 오랜 기간 함께 다니다 보니, 루시아는 엔세데스를 다루는 법을 매우 잘 알았다.

이 변덕 심한 레드 드래곤은 이제껏 맛보지 못한 술로 꼬이는 게 최고였다.

화룡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른 버번위스키의 뚜껑을 닫았다.

마침 옥수수 테크트리의 술에 점점 질려 가던 차여서, 매우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설마 약속을 어기시지는 않겠죠?”

“그럴 리가 있나. 이 긍지 높은 드래곤을 뭐로 보는 거야?”

“그럼 나중에 봬요.”

“얼른 다녀오라고.”

엔세데스는 아예 술상을 싹 치우고는 책과 함께 침상에 드러누웠다.

정말로 술을 마실 마음이 없는 듯한 모양새였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루시아는 헌터들을 이끌고 마기 축출 역장을 빠져나갔다.

다소 위험하긴 했지만, 유진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궁을 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기의 구름을 뚫고 대성체 미궁으로 접근하려던 중, 일행은 의외의 인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당신은?”

처저저적!

짙은 마기 속에서 불현듯 만난 사람이 우호적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연히 스페인과 프랑스의 헌터들은 즉각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손을 들어 일단 그런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상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우리 앞에 나타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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