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하필이면 이럴 때.’
가브리엘과의 전투가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었다.
파멸의 권능은 바다를 건너온 의문의 존재와 맞닥뜨리는 순간 끝나 버렸다.
그자는 황금색 빛줄기를 붙잡고 탈출한 가브리엘을 향해서 의념을 보냈다.
―고작 이런 놈에게 고전하다니, 이제 퇴물이라 불러도 되겠군.
―닥쳐라! 라파엘. 네놈에게 그딴 소릴 듣고 싶지 않다.
―그럼 잘했어야지. 지금 네 꼴이나 보고 지껄이거라.
둘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지팡이를 든 천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치유를 행하는 자, 영혼을 지키는 자, 수호자 등으로 알려진 대천사.
신의 열(熱) 라파엘.
세 쌍의 거대한 날개는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대천사 라파엘은 가브리엘이 무사 탈출한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블라드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 한낱 뱀파이어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체면이라도 차리려는 거냐? 웃기는 놈이로군.’
하지만 유진은 상대가 자신에게 지대한 신경을 기울이는 중이란 사실을 알아챘다.
스쳐 지나가는 눈빛에 은근한 경계가 담겨 있었으니까.
어찌 되었건 그는 가브리엘을 거의 소멸시킬 뻔하지 않았던가.
블라드 유진은 평범한 크기로 줄어든 천계도살검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파멸의 권능이 없다면, 대천사를 이기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살아날 구멍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약점을 노린다.’
스윽.
그는 곧장 암흑화를 시전하여 녹턴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라파엘의 시선은 검은 연기로 변한 유진의 위치를 정확히 따라왔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극강의 은신술로도 대천사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 달성을 위해 움직였다.
쉬이이익―!
―음? 서, 설마 네 이놈!
불현듯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가브리엘은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며 단창을 들었다.
지직. 지지직.
신성력이 실체화했지만, 잠깐 번득이는 백광만 비칠 뿐이었다.
거의 빈사 상태까지 갔던 것 때문인지, 대천사의 권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블라드 유진은 상당히 당황한 얼굴의 가브리엘에게 쇄도하며 천계도살검을 휘둘렀다.
쑤화아아앙―!
―이런 썩을!
놈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순간, 이미 그는 지척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단창을 내밀어 보았으나, 가브리엘은 알고 있었다.
신성력이 깃들지 않은 무기로는 천계도살검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잔재주를!
차원 균열에 휘말렸다가 기진맥진한 가브리엘 정도야 충분히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의 노림수를 간파한 라파엘이 즉각 개입하면서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콰칭―!
“크흑!”
번쩍이는 황금빛과 함께 그는 저 멀리 튕겨 나가고 말았다.
고도로 압축된 신성한 힘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라파엘 또한 가브리엘과 마찬가지로 2천 레벨 후반대일 터.
파멸의 권능 없이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생각보다 출혈이 크다.’
최후의 순간에 몸을 튼 덕분에 황금색 광선에 적중된 건 왼팔뿐이었다.
치명적인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세를 이어 갈 순 없었다.
신성력과의 힘 싸움에서 피의 권능이 패퇴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파스스스스!
블라드 유진의 왼팔에는 불이 붙었고, 새카만 가루로 변해 흩날리는 중이었다.
곧장 천계도살검을 휘두른 그는 신성력에 잠식된 팔을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그러자 더 이상 불꽃이 번지지는 않았다.
문제는 당장 왼팔을 재생성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였다.
‘정비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지.’
아니나 다를까, 라파엘은 세 쌍의 날개를 퍼덕이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유진의 위험성을 저자도 인정하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콧대 높은 대천사가 이렇게 헐레벌떡 날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간악한 종자여.
쉬이이이잉!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황금색 빛줄기는 낭창낭창 흔들렸다.
극도로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였지만, 블라드 유진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라파엘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를.
‘옆구리.’
콰칭―!
천계도살검을 내리긋자,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한쪽 팔이 없어서 방어가 취약할 거로 생각하고, 왼쪽 옆구리를 노린 듯했다.
일단 막아 내긴 했으나, 그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피의 권능을 야금야금 잡아먹으며 들어온 신성력에 육신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죽겠구나.’
적당히 강한 적수도 아니고, 무려 821레벨이나 차이 나는 상대였다.
물론 아직 라파엘의 수준은 알 수 없었지만, 대화만 들어 봐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직접 격돌해 보니, 상대는 결단코 가브리엘의 아래가 아니었다.
유진은 오른쪽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충격을 해소하려 했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반격을 펼쳤다.
스팟―!
천계도살검의 번들거리는 검날이 마치 연어처럼 불쑥 치솟아 올랐다.
―흡!
라파엘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비틀며 대응했다.
하지만 검격을 완전히 피해 낼 수는 없었다.
스핑―!
대천사의 피부가 베이자, 우윳빛 성혈(聖血)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목과 왼쪽 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라파엘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센스 하나는 좋구나. 하지만 발악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천망일뢰(天網一雷)!
취리리릿!
표정을 굳힌 대천사는 지팡이를 표홀히 휘둘렀다.
그러자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던 황금색 광선이 수십 가닥으로 쫙 갈라지는 게 아닌가.
‘승부처다.’
바로 그 순간, 블라드 유진은 깨달았다.
큰 기술을 사용하는 상대에게 빈틈이 생겼음을 말이다.
그는 끝까지 아껴 두고 있던 스킬을 꺼냈다.
[EX급 스킬 ‘시공투절(時空透切)’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시공투절’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시공투절의 지속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스핏!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향해서 내질러진 천계도살검이 자취를 감추었다.
곧이어 수십 가닥의 기다란 빛줄기를 휘두르던 라파엘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어느새 그자의 복부에는 시커먼 불꽃을 뿜어내는 검날이 쑤셔 박힌 상태였다.
초월적인 육신을 지닌 대천사라 해도 예상치 못한 일격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크, 크아악!
자신의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기운이 체내로 깊숙이 들어온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성력에 왼팔이 날아간 유진 또한 극도의 통증을 느꼈으니까.
한데, 잠깐 멈칫하던 라파엘은 이내 가공할 속도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쿠후우우웅!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을 무시한 채, 기술을 그대로 이어 간 것이다.
천망일뢰의 황금빛 기운이 블라드 유진을 노리고 쇄도해 들어왔다.
그는 얼른 시공투절을 해제하며 천계도살검을 회수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천계도살검’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공교롭군.”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었지만,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차선책을 꺼내 들었다.
스이잉! 쩌저저정!
다섯 줄기의 소수혈인을 시전하여 날아든 빛줄기를 빠르게 쳐 낸 것이다.
하지만 고작 오른팔만으로 그 많은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천망일뢰의 궤도를 하나하나 바꿀 때마다 무시무시한 충격이 그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결국에 대여섯 개의 황금색 빛줄기가 블라드 유진의 몸을 관통하고야 말았다.
쩌저저정!
“커헉!”
* * *
―안 돼!
비명에 가까운 의념을 발한 건 유진과 대천사의 전투를 지켜보던 레니였다.
루시아는 교황을 견제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니와 DK는 그저 적당히 거리만 유지했기에, 유진의 위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황금빛 기운이 그의 육신을 꿰뚫는 순간, 그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어? 야, 잠깐만! 너 거기 가면 죽어!”
DK가 반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레니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츠츠츠츠츠!
암청색 기운에 휩싸인 다크 엘프 소녀는 그야말로 폭주하는 중이었다.
고작 S급 최상위에 불과한 동반자가 EX급으로 추정되는 대천사에게 덤벼들다니.
이건 솔직히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정신을 잃어 가는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 문득 홀로그램 글귀가 주르륵 떠올랐다.
[‘다크 엘프 최후의 암살자 레니’가 폭주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레니의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현재 등급 : SS+]
SS급은 901에서 1,500레벨까지를 의미했다.
뒤에 플러스 기호가 붙었으니, 레니의 능력치는 거의 EX급에 근접한 수준일 터였다.
슈화아악! 콰칭!
―끄으으! 또 다른 악의 종자가!
천계도살검에 복부를 꿰뚫린 라파엘은 그녀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암청색 낫은 대천사의 머리통을 쪼개 버릴 기세로 연신 허공을 갈랐다.
푸확!
결국에 라파엘은 유진의 몸을 꿰뚫고 있던 천망일뢰를 회수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레니를 떼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어! 죽어! 죽어!
그녀는 거친 의념을 마구 터트리며 대천사를 압박했다.
하지만 결정타를 먹일 수는 없었다.
큰 부상이 있다지만 상대는 대천사.
게다가 차원 균열에 휘말렸던 가브리엘이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상태였다.
―곤란해 보이는군.
―상부상조 좀 하지? 내게 목숨을 구원받은 걸 벌써 잊은 건가?
―그럴 리가. 근데 자네도 곱게 도와주지는 않았잖아?
―닥치고 얼른 이 악의 주구나 떼어 내게!
―후후후. 그러지.
빈정거리면서 라파엘을 놀리던 가브리엘은 단창에서 백광을 쭉 뽑아냈다.
측면에서 거대한 신성력이 짓쳐 들어오자, 레니의 파상 공세는 힘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능력치가 높아졌어도 상대는 무려 두 명의 대천사였으니까.
결국에 힘에서 밀린 그녀는 지상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턱!
어디선가 한 마리의 유령 군마가 날아와 레니를 가뿐히 받아 내는 게 아닌가.
―녹턴?
“이히히힝!”
그녀를 태운 녹턴은 대뜸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허공에 시뻘건 선을 그으며 쏘아졌다.
쿠화아아아!
좌우로 쫙 번져 나간 불길은 순식간에 가브리엘과 라파엘을 덮쳤다.
―흥! 이딴 원소력이 통할 것 같으냐?
―저 군마도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군. 하나같이 다 비슷한 종자들뿐이로다.
―얼른 처리하고 가세. 할 일이 많아.
―그러지.
무지막지한 스킬이었지만, 두 대천사에게는 별 타격이 없는 듯했다.
간단하게 발산한 신성력에 불길이 딱 멈춰 버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녹턴 또한 공격이 먹힐 걸 상정하고 스킬을 펼친 건 아니었다.
그저 이 거대한 화염이 시야를 차단하는 동안, 지면에 떨어진 블라드 유진을 구할 목적이었다.
두두두두두! 척!
유령 군마가 그의 근처로 접근하자, 레니는 델레오 아르마의 형태를 큼지막한 뜰채처럼 바꾸었다.
저걸로 유진을 건져 올려서 이곳을 빠져나갈 요량이었다.
―귀여운 짓거리를 하는구나.
그러나 두 대천사는 그런 녹턴의 노림수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백색 단창과 라파엘의 황금색 지팡이가 각각 도주 중인 셋을 조준했다.
신성력을 발하여 한꺼번에 쓸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터져 나온 외침에 그들은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