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제껏 파멸의 권능은 딱 두 번 사용되었다.
아마도 1천 년 전, 쇠퇴의 길을 걸을 때 시전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뱀파이어는 멸망을 면치 못했다.
승리를 거둔 거라 판단하고, 축배를 너무 일찍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리가 없었다.
일족이라고는 이제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나마 비슷한 존재인 쿠르단은 하수인이 되었으니까.
‘두 번 다시 그런 불상사는 없다.’
블라드 유진은 당시 일족의 수뇌부보다 더욱 거대한 적과 마주한 상태였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대천사라는 저 괴물을 거꾸러뜨리려면, 온 정신을 한 점에 모아야만 했다.
“후우. 가자.”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녹턴이 불현듯 솟구쳐 올랐다.
이제 신성력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번―쩍! 쿠콰콰콰!
그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곧장 수십 줄기의 백색 광선이 날아들었다.
저 신성력의 파장에 적중당했다가는 피부뿐만 아니라, 육신이 녹아 없어질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가브리엘이 쏘아 보낸 백광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이전보다 한층 거대해진 천계도살검으로 튕겨 낼 뿐이었다.
콰칭! 쩌정!
에너지 덩어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빛줄기는 굉음과 함께 궤도가 바뀌어 엉뚱한 곳을 때렸다.
이윽고 무수히 쏘아지던 신성력이 일순간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전신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기에 밀려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가브리엘은 당황한 것 같았다.
천상계의 존재인 자신이 한낱 뱀파이어에게 밀릴 리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브리엘은 유진을 보자마자 극명한 실력 격차를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로 레벨 차가 큰 상대와 싸우는데, 밀린다는 게 어찌 말이 되겠는가.
터어어엉!
―크어억!
급기야 천계도살검이 방어막을 뚫고 들어와 가브리엘의 몸에 직접 닿기까지 했다.
고도로 압축된 마기와 신성력이 격돌한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충격파가 터져 나와 공간을 집어삼켰다.
대천사의 육신조차도 제대로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
가브리엘은 돌풍 앞의 낙엽처럼 휘돌다가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쉬이이익! 쿠우웅―!
물론 대천사가 고작 지면에 처박혔다고 유명을 달리할 리는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가브리엘은 녹턴을 타고 유유히 날아다니는 블라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지저(地底)에서 올라온 악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확실히 대천사는 다르군. 천계도살검이라면, 천상계의 존재도 벨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로 오만한 이름이로다.
천계도살검의 명칭을 듣게 되자, 가브리엘의 잘생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름 자체가 천상계를 쪼개 버리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대천사의 몸에서 발현되는 신성력이 한층 더 짙어졌다.
분노가 악의로 실체화한 듯한 느낌이었다.
―악의 종자에게 내릴 심판은 소멸뿐!
츠츠츠츠츠!
가브리엘의 무기는 더 이상 단창이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되었다.
창날의 크기가 수십 배나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숫제 빛의 기둥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주신의 권능이 네놈을 정화하리라!
대천사는 괴성을 지르며 가공할 기세로 짓쳐들어왔다.
무지갯빛 날개는 그저 펼쳐져 있을 뿐이지만, 비행 속도는 가공할 수준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써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예상했다는 듯이 가뿐하게 천계도살검을 휘둘렀다.
눈이 시릴 만큼 강렬한 백광과 블랙홀처럼 시커먼 기운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픽―!
놀랍게도 예상했던 굉음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바람 빠지는 듯한 작은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하나, 그 결과는 결단코 가볍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극한까지 벼려진 두 에너지가 충돌하자,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발생되었다.
너무도 강대한 힘의 격돌로 인하여 차원이 찢어져 버린 것이다.
시커먼 암흑 공간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마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 이건!
화들짝 놀란 가브리엘은 크게 선회하며 균열을 살펴보았다.
유진 또한 녹턴의 방향을 틀면서 마기를 살짝 흡수하여 감별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둘 다 이 차원이 어디로 연결되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마계로군.”
순수한 마기가 이토록 대량으로 생성되는 곳은 당연히 마계뿐일 터였다.
느닷없는 차원의 연결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두 세계의 기운이 격돌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어그러뜨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가브리엘 또한 그 거대한 힘에 휘말리고 말았다.
―차하앗!
하지만 대천사의 능력은 대단했다.
날개에서 쏟아진 신성력은 붕괴한 차원의 경계를 봉합하고, 마기를 완벽하게 차단해 냈다.
그러자 두 세계의 격돌이 금방 취소되었다.
이윽고 가브리엘은 불편한 표정으로 블라드 유진을 응시했다.
―네놈…….
차원 봉합은 대천사에게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도움이 있어서 균열을 쉽게 닫을 수 있었다.
반대편에서 유진이 찢어진 차원의 경계를 잘 붙들어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브리엘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네놈의 운명은 변함없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난 봐달라고 도와준 게 아니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나?
“그건 알아서 생각하라고. 약탈자여.”
―야, 약탈자?
“다른 차원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보니, 너도 마계 놈들과 별반 차이가 없더군. 저 친구를 보라고.”
그는 허공에 술상을 띄워 놓은 채, 코냑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중인 엔세데스를 가리켰다.
화룡왕은 엘칸 차원의 존재.
다른 차원의 일에 너무 많은 관여를 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선을 정해 두었다.
드래곤의 규율 때문이긴 하지만, 얼마나 신사적인가.
하지만 천상계가 하는 짓거리는 솔직히 마계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여길 싹 밀어 버리고 천상계처럼 만들려고 하는 거 아닌가? 그럼 마족들과 다를 바 없지.”
―지구가 천상계로 변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천주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그걸 누가 원하지?”
―당연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원한다.
“나는 원하지 않는데. 내 동료들도 네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말이야.”
―그럴 리가 없다.
“물어봤어?”
―…….
“질문 한번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원할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지?”
블라드 유진의 지적에 가브리엘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무지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천상계의 목적은 마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저 접근 방법이 다소 온건할 뿐.
“약탈자, 위선자.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좀 꺼져.”
스핏―!
천계도살검은 마치 뱀과 같이 구불구불하게 휘며 대천사의 육신을 노렸다.
강력한 팩트 폭행에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가브리엘은 단창을 놀려서 검격을 쳐 냈다.
그저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닌 듯했다.
쿠구구구구!
마기와 신성력이 격돌하자, 재차 차원이 찢어질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서로의 공격을 받아 낼 때, 단계적으로 충격을 분산했기 때문이었다.
차원 균열을 만들지 않기 위한 일종의 기교였다.
‘역시 만만한 놈은 아니로군. 이걸 보자마자 그대로 따라 하다니 말이야.’
충격 분산은 유진이 먼저 한 거였다.
가브리엘은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 처음처럼 에너지를 한 점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내 그와 마찬가지로 완급 조절을 해냈다.
결단코 레벨만 높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전투 감각이 뛰어나군. 하지만 바로 그게 네놈을 죽음으로 내몰 원인이 될 것이다.’
슬슬 파멸의 권능 또한 지속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결판을 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유진은 차원 균열이 발생한 이후, 일부러 완급 조절을 시작했다.
고단수의 기술을 보여 주면서 상대가 따라 하기를 유도한 것이다.
그가 기교를 뽐내자, 가브리엘은 콧방귀를 뀌며 가뿐하게 충격 완화술을 펼쳤다.
하나, 여기까지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쿠구궁!
‘지금!’
격돌의 충격파를 상대가 단계적으로 해소하려는 순간, 블라드 유진은 한 점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러자 타이밍을 빼앗긴 가브리엘은 균열 발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차핫!”
그는 이례적으로 기합까지 지르며 천계도살검을 내리눌렀다.
대천사의 지척에서 차원 균열이 발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브리엘은 두 세계의 격돌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유진은 상대를 가격한 반발력으로 차원 균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더불어 대천사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온갖 스킬을 퍼부었다.
천계도살검뿐만 아니라, 소수혈인에 폭사까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쉬쉬쉬쉭! 콰지직!
―크아아악!
차원의 대격돌에 휘말린 가브리엘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제아무리 대천사의 육신이라도 저 거대한 에너지의 수축 앞에선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잘 가라.”
그는 정신없이 얻어맞고 차원 대격돌에 휘말려 가는 상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가브리엘이 소멸하고 나면, 그때 차원을 봉합할 작정이었다.
이걸 이대로 놔뒀다가는 지구와 연계된 차원들이 뒤섞이며 대혼란이 시작될 것이다.
마계와 천상계가 어찌 되든 유진이 알 바 아니었지만, 지구와 엘칸 차원의 붕괴는 살짝 저어되긴 했다.
엔세데스도 자못 놀란 모양인지, 술 마시는 걸 멈추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개입하여 차원 붕괴를 막을 작정인 듯했다.
“됐어. 걱정하지 마.”
그는 그런 화룡왕을 향해서 손을 들어 보인 뒤, 대천사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저 멀리서 엔세데스의 외침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그게 아니야!”
“뭐가?”
“저길 보라고!”
블라드 유진은 화룡왕이 가리킨 곳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수평선을 가로지르며 이쪽을 향해 접근하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그는 천계도살검을 생성하며 파멸의 권능을 끌어 올렸다.
한데, 비행하던 백색 물체가 급격하게 가속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번쩍이며 사라졌다가 코앞에서 나타나는 수준이었다.
스팟!
지척까지 다가온 물체는 가브리엘과 상당히 흡사한 외형의 미청년이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큼지막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천사.
그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지팡이의 수정구로 유진을 가리켰다.
찌이이잉!
공간을 격하고 쏘아진 금색 광선은 가공할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급격하게 회피 동작을 펼쳤기에, 적중당하지 않았음에도 전신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다.
그런데 광선은 그를 쫓아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쭉 날아가더니, 차원 대격돌에 휘말린 가브리엘과 연결되는 게 아닌가.
‘날 공격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자를 구원하기 위해?’
황금색 광선에 적중당한 가브리엘은 점점 균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가브리엘이 무사 탈출할 판이라, 블라드 유진의 마음은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장 천계도살검을 휘둘러 새로 나타난 천사를 공격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멸의 권능’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