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96화 (197/226)

21화

DK는 치열하게 돌아가는 전투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저 무지막지한 싸움에 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S급이긴 했지만, 아마르 코너는 전투보다 현혹술에 특화된 헌터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싸움을 못 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저 괴물들의 수준이 너무 높을 뿐이지.

거기다 DK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무슨 생각해?

어느새 레니가 다가와서 주변을 알짱거리며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자기 몸보다 더 큰 암청색 낫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그, 그냥 구경하는 거야.”

DK는 그녀를 주시하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레니가 웬만한 S급도 가뿐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니까.

게다가 벨티아의 현혹조차도 걸리지 않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보통 현혹술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DK보다 훨씬 강했으니,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직 공격할 낌새가 보이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근데 왜 반기를 든 거야?

“반기라니? 난 그런 적 없는데.”

―연락을 안 했잖아. 그거 배신이야.

“네가 그런 것도 알아?”

―나도 주인이랑 연결되어 있어.

레니는 블라드 유진의 하수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반자 시스템에 의해서 혈성쇄혼술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소한 내용까지 다 아는 것이었다.

“연락만 끊긴 게 아니야.”

―연결도?

“응.”

―쟤 때문에?

그녀가 가리킨 건 무지갯빛 날개를 펼친 가브리엘 대천사였다.

DK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 어쩔 건데? 다시 만났으니, 돌아올 거야?

“그러려면 조건이 있어.”

―뭔지 알 거 같아.

“그래?”

―DK는 비열하고 치사하잖아. 주인이 이겨야만 돌아온다고 할 거지?

“야, 그래도 그건 너무 적나라한 표현 아니냐?”

―그럼?

“그냥 불가항력이었다고 하자. 하수인 계약을 파기해 버린 건 저 천사가 한 짓이니까.”

―그래 봐야 본질은 변하지 않아.

“너 레니 맞아? 왜 이렇게 철학적이야?”

―철학? 그게 뭔데.

“됐다. 됐어. 어쨌든 공격할 마음은 없는 거지?”

―웅. 이상한 짓만 안 하면. 이런 거 말이야.

스각! 파스스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던 레니는 갑자기 암청색 낫을 휘둘렀다.

그러자 건물 잔해 뒤편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던 DK의 분신이 반으로 토막 나며 부스러졌다.

“으…….”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광경은 가히 보기 좋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분신이 아니었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DK는 양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절대로 허튼짓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계속해도 돼. 다음번에는 분신이 아니라 DK를 잘라 버릴 거니까.

“오! 젠장. 절대 안 할게.”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 DK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누가 이기든 여차하면 몸을 내뺄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가브리엘이 승리하는 쪽이 자유를 얻을 확률이 높아 보였지만, 결단코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레니의 낫에 목이 잘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쓰읍! 현혹술만 걸렸어도…….”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DK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 * *

루시아와 레니가 교황과 DK를 막아 주고 있을 무렵, 유진은 가브리엘과 치열하게 격돌하는 중이었다.

상대의 레벨이 무려 821이나 높았으나, 의외로 전투는 팽팽하게 흘러갔다.

권능 폭발이 적용된 천계도살검은 EX급 최대치, 3천 레벨에 해당하는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쩌저정!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시커먼 검신과 충돌한 백색 단창은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가브리엘은 날개를 쫙 펼치며 충격을 완화하더니, 그대로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강렬한 백광과 함께 공간을 잠식해 가던 마기가 한참을 후퇴했다.

타락의 기운은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천상계의 존재인가.’

천계도살검은 신성력을 잃게 만들고 영혼을 타락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천사에게는 그 위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격이 다른 존재다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사실 이만큼 전투를 끌고 온 것도 기적에 가ᄁᆞ운 일이었다.

그만큼 상대와 블라드 유진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콰아아앙!

피의 권능과 신성력이 충돌하자, 굉음과 함께 극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격전의 중심에 있던 둘은 강한 반발력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콰가가가각!

지면에 발을 댄 유진은 기다란 고랑을 만들며 쭉쭉 밀렸다.

반면에 가브리엘은 무지갯빛 날개를 펼쳐서 충격을 대부분 상쇄했다.

‘이러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패배는 확정이다.’

천계도살검은 막강한 위력을 지닌 만큼, 10분밖에 운용할 수가 없었다.

사르판 공작을 상대할 때처럼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신강림의 시너지 효과를 받고 있음에도 동수를 이루는 것이 한계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브리엘도 진심으로 싸우고 있다는 거였다.

전신에 혈관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신성력을 쏟아부었지만, 블라드 유진을 거꾸러뜨릴 수는 없었다.

―한낱 괴물 놈이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는데…….

“전선을 무시한 채 나만 노린 것 치고는 별거 아니로군.”

―뭐라?

“그럼 인간들이 어둠의 존재가 아닌 천상계를 추앙했을 거 아닌가.”

잠깐 소강상태가 되자, 그는 짐짓 여유로운 척 가브리엘을 도발했다.

상대는 불쾌한 듯, 날개를 떨치며 거친 의념을 보냈다.

―인간 따위의 찬사를 받아서 뭣 하겠는가. 이미 우린 완성된 존재인데.

“그거 쟤가 들으면 섭섭해하지 않을까?”

―신의 큰 뜻을 한낱 피조물이 어찌 알리오.

유진이 안드레아 교황을 가리켰으나, 가브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답변했다.

“인간들을 돕지 않는 천사라……. 재미있군. 그렇다면 천상계의 존재가 지구에는 뭣 하러 온 거지? 미궁을 몰아낼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알 것 없다.

잠깐 뜸을 들인 가브리엘은 단창의 백광을 키우며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싸움은 부지불식간에 재개되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머릿속은 방금의 대화가 복잡하게 얽혀들고 있었다.

‘대천사라는 작자가 인류의 생존에 별반 관심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은 교황청이 양산하는 힐러 전력에 기대어 투쟁을 이어 가고 있지 않았던가.

이전보다 인구가 줄어들긴 했지만, 천주교를 믿는 비율은 극단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다른 종교는 거의 다 사멸할 지경이었다.

가톨릭은 신성력으로 인류를 이롭게 하지만, 나머지는 전혀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런 상황인데도 신의 가장 큰 종이 인간들을 무시한다?

솔직히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천상계의 의도를 의심해 봐야 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가브리엘과 재격돌한 직후, 유진을 전율케 한 상념이 불현듯 떠올랐다.

‘천상계와 마계, 어찌 보면 그냥 타 차원의 존재들 아닌가.’

사실상 마족들의 전초 기지인 미궁과 교황청은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뱀파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물론 인간들은 그걸 전혀 느끼지 못했을 거다.

빛과 치유의 힘은 선을 상징하고, 어둠과 파괴는 그 반대를 의미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둘 다 지구를 장악하고, 모든 생명체를 몰아낼 의도라면?

쩌어어엉!

뭔가 실마리를 찾은 듯했지만, 생각을 이어 갈 시간 따위는 없었다.

가브리엘이 유진을 갈아 버릴 기세로 단창을 휘둘러 왔기 때문이었다.

―악의 종자들을 박멸하라! 천상의 빛!

“별명 도용하네. 박멸자는 내 거라고.”

번―쩍! 쿠콰콰콰콰!

대천사의 날개에서 쏟아져 나온 백광은 이전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했다.

온 사방에 내리쬐는 빛줄기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치이익!

유진은 정말 오랜만에 피부가 타는 고통을 느껴 보았다.

항성풍 면역이 없던 하급 뱀파이어 시절에나 겪었던 발화 현상이라니.

‘정말이지 가공할 신성력이로군.’

암흑화를 시전한 그는 큼지막한 바위 뒤편으로 피신했다.

녹아내린 피부는 그제야 급속도로 복구되었다.

잠시 멈추었던 피의 권능이 제 역할을 해 준 것이다.

“푸르르…….”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 속에서 불안한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유령 군마인 녹턴 또한 신성력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괜찮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테니, 넌 이곳에 머물러라.”

“이힝.”

녹턴을 잠시 떼어 둔 그는 가브리엘의 백광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몸을 날렸다.

혹시라도 함께 있다가 녀석이 피해를 볼까 우려한 행동이었다.

바위 뒤편에 웅크린 유령 군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천계도살검을 떨쳤다.

이제 3천 레벨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육신을 강화한 스킬이 끝나기 전에 저 천사 놈의 멱을 따 버려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리라.

1천 년 전의 교황청 놈들은 블라드 유진을 죽일 방법이 없어서 봉인을 택했다.

하지만 주신의 왼팔, 지고한 대천사에게는 분명 그를 소멸시킬 능력이 존재할 터.

살기 위해서는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유진은 오른손 검지에 끼워 둔 수코의 인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30%의 신성 저항에 신격 강화의 옵션이 붙은 뱀파이어 로드의 상징.

봉인된 마지막 옵션은 EX급이 되면서 개방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걸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껏 그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 힘을 개방해야만 했다.

[강화 종료까지 남은 시간]

[1분 9초]

[1분 8초]

……

‘1분 안에 저놈을 쓰러뜨릴 방법은 없다.’

결심을 굳힌 블라드 유진은 천계도살검을 왼손으로 옮겨 쥐며 수코의 인장을 바짝 세웠다.

그러자 반지에서 시커먼 바늘 하나가 툭 튀어 올랐다.

스핑!

그는 곧장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향해 길쭉한 바늘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수코의 인장에 내장된 ‘파멸의 권능’이 발동되었습니다.]

[파멸의 권능이 발동하는 동안, 모든 스킬의 제한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무한히 생성되는 마기로 인해, 능력치 한계를 돌파합니다.]

[현재 적용된 레벨 4,000(???).]

<스킬 정보>

명칭 : 파멸의 권능

등급 : ???        위력 : ???

지속 시간 : 20분

사용 한도 : 2/5

소모 자원 : 사용 한도

재사용 대기 시간 : 7일

효과 : 스킬 제한 제거, 능력치 증폭

마기를 무한히 생성하는 마신(魔神) 그 자체가 됨.

눈앞에 주르륵 떠오른 홀로그램 글귀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지금껏 수코의 인장은 몇몇 로드를 거쳐서 유진의 손아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중에는 아마 EX급에 달하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파멸의 권능을 사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데……. 이 힘을 쓰고도 교황청 놈들에게 패배했단 말인가. 한심하기 그지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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