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뚜둑.
소수혈인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부서지지 않았다.
흉물스럽게 찌그러지긴 했으나, 이 정도야 피의 권능을 보충하면 금방 회복될 수준.
유진은 눈앞으로 훅 다가온 금발의 미청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성스러운 주황빛으로 휘감긴 제의와 강렬한 백광을 머금은 창, 실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이었다.
하긴 소수혈인을 박살 내며 접근한 자가 평범할 수는 없는 노릇.
전신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느낀 그는 암흑화를 시전하며 거리를 벌렸다.
스윽.
하지만 상대는 후속 공격을 펼치지 않았다.
그저 백광이 깃든 창을 휘둘러 스멀스멀 다가오던 마기를 몰아냈을 뿐이었다.
놈의 시선은 지면에 덩그러니 박힌 검은 육각 기둥을 향하고 있었다.
마기의 원흉을 새삼 처음 본 사람처럼 말이다.
‘이놈은 뭐지?’
이토록 강한 신성력을 뿜어내는 존재는 수천 년 동안 처음이었다.
순간적으로 이놈이 바티칸의 성검 요한인가 했지만, 이내 그 가정은 접어 버렸다.
고작 S급에 불과한 헌터가 내뿜는 신성력만으로 자신을 물러서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블라드 유진은 구불구불한 금발 미청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유럽에 뭔가 이상한 게 들어와서 분탕을 치고 있다.’
극열공 마즈단을 섬기는 백작급 마족 루드벨에게서 들은 이야기.
미궁 성장 사건도 그래서 벌어진 게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그 존재가 바로 이 주황색 제의를 입은 청년인 듯했다.
―재미있군. 악을 처단하는 악의 종자라니.
상대는 마치 레니처럼 의념을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넌 누구냐.”
―감히 사탄의 피조물 주제에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냐?
“컨셉질도 적당히 해야 용인되는 법인데, 좀 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잡소리 집어치우고 정체나 밝히라는 말이다. 신이 키우는 똥개야.”
―네놈……. 반드시 성령의 분노를 사게 되리라.
“치사한 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군. 신의 이름을 빌려서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다니.”
그가 교황을 가리키며 빈정거리자, 금발 미청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고작 그런 도발로 격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백광이 충만한 창으로 유진을 겨누기만 할 뿐이었다.
말 섞는 것조차도 불쾌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스피잉―!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불길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측면에서 청백색 광선이 쏟아졌다.
안드레아 교황이 들고 있던 랜턴에서 발출된 빛줄기였다.
블라드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잽싸게 몸을 피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공간이 초토화되는 게 아닌가.
마치 거대한 굴삭기가 흙을 퍼 나른 듯, 지면에 굵은 고랑이 파였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멀찍한 곳에서 나타난 유진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신의 사자라는 놈들이 뒷골목 양아치보다도 정당하지 못하군.”
―나를 한낱 미물들과 엮지 마라. 악의 종자야.
“엮이고 싶지 않으면, 합당한 태도를 보여라. 점잖은 척 위선 떨지 말고.”
―…….
그의 말에 한 방 제대로 먹은 모양인지, 금발 미청년은 교황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황급히 랜턴을 내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가브……. 형제님.”
놈이 당황하며 한 사소한 말실수.
블라드 유진은 교황이 흘린 이름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가브리엘?”
성경에 등장하는 초월적인 존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유진은 실제로 가톨릭의 흥망성쇠를 수천 년 동안 지켜본 존재였으니까.
교황의 태도로 보았을 때,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그저 세례명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는 말은 이자가…….
‘진짜 대천사 가브리엘이라는 말인가?’
천상계의 존재가 지상에 강림했다면, 극렬한 반동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족들의 입장에서는 수소 폭탄이 투하된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정말 쓸모없는 놈이로군.
금발의 청년은 안드레아 교황을 힐끔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일찌감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블라드 유진의 시선이 느껴진 모양인지, 그자는 백광이 깃든 창을 내리며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천주를 모시는 시종, 그분의 영웅이다. 악의 종자는 신성한 힘 앞에 무릎을 꿇어라.
쿵!
가브리엘이 창을 내리찍자, 백색 원이 퍼져 나가며 훌쩍 다가온 마기의 구름을 재차 몰아냈다.
림일국의 한정적인 마기 축출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신성력의 파동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으니까.
‘강하다. EX급에 올랐음에도 도저히 가늠되지 않아.’
현재 유진의 레벨은 2,005.
마계로 치면 적어도 공작급은 충분히 되는 수준이었다.
최약체긴 하지만 멸사공 사르판도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던가.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니, 기존의 다른 공작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대천사 가브리엘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적어도 마왕급은 되어야 어찌어찌 비벼 볼 만할 것 같았다.
‘지금이 딱 좋을 때로군.’
블라드 유진은 오랜만에 카이넬의 신안을 사용해 보았다.
[EX급 관조 스킬로 EX급 대천사 가브리엘을 파악합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순간 황금색으로 빛났다.
이윽고 가브리엘에 관한 정보가 눈앞에 주르륵 떠올랐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대천사 가브리엘
레벨 : 2,826
등급 : EX
종족 : 천사
종족 효과 : 자비, 복수, 묵시, 진리, 죽음
‘레벨이…….’
카이넬의 신안으로 파악한 가브리엘의 능력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종족 효과의 상세 정보나 스킬 따위를 알아내지 못한 것은 개의치 않았다.
엔세데스에게 써 봤을 때도 비슷한 결과였으니까.
하지만 놈의 레벨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블라드 유진도 경험해 봤듯이 2천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성장이 극단적으로 느려졌다.
이제 웬만큼 강한 상대와 싸워 이겨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21 차이, 어려운 상대로군.’
싸워 이기기란 그리 녹록지 않을 터였다.
괴상한 랜턴을 든 교황과 DK까지 동원된 걸 보면,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탈리아의 움직임이 좀 이상하긴 했다.
전선은 아직 본토에 닿지도 않았는데, 너무 빨리 꼬리를 내려 버린 것이다.
그토록 극렬하게 유진을 규탄하던 국가에서 말이다.
독일 또한 저자세로 나왔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 패착이었다.
이런 곳에 난데없이 가브리엘 대천사를 데리고 올 줄이야.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차원문은 어떻게 열었지?’
토리노의 수의로 차원문을 개방하려면, 반드시 엘―칼릭스의 성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물건은 그가 갖고 있지 않았던가.
블라드 유진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교황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놈에게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신성력의 파동을 생성하던 가브리엘이 움직였다.
스팟!
맨 처음 그를 기습했을 때처럼 공간을 뛰어넘으며 한순간에 접근한 것이다.
‘이런……!’
쩌어어엉!
유진은 소수혈인의 그물을 만들며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하지만 백광이 깃든 창은 피의 권능을 가뿐히 찢어발기고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저 무지막지한 신성력의 창날에 꿰뚫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솟구친 시커먼 칼날이 가브리엘의 창을 튕겨 냈기 때문이었다.
콰칭―!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천계도살검’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생각보다 영향력은 미미합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백광이 깃든 창날과 충돌했지만, 천계도살검의 외형은 멀쩡했다.
아무래도 소수혈인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다 보니, 매우 강한 신성력이라도 버틸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문구가 별로네.’
이제껏 천계도살검을 시전하면, 그 위용에 놀란 자들의 반응이 꼬박꼬박 튀어나왔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얼굴은 담담했다.
마치 마기 따윈 아무리 강해 봤자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 상대는 천계도살검과 격돌하고도 별반 피해가 없는 것 같았다.
―불쾌한 기운이로다.
“당연하지. 천계 놈들을 토막 칠 무기니까.”
―흥. 그딴 게 가능할 성싶으냐? 얌전히 목을 내놓거라. 악독한 자여.
쿠후우웅!
가브리엘이 단창을 휘젓자, 그 궤적을 따라서 반짝이는 백색 물결이 일었다.
신성력의 파도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리꽂혔다.
워낙 면적이 넓다 보니, 피할 공간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발 디딜 틈이 없어도 솟아날 구멍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녹턴.”
“푸르르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유령 군마는 유진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등에 올라탈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그는 녹턴의 다리를 붙잡고 날아다녔다.
이윽고 신성력의 해일을 벗어나자, 그제야 자세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블라드 유진에게 청백색 광선이 마구 쏘아지는 게 아닌가.
스피잉! 스피잉―!
공중으로 도망친 그를 향해서 안드레아가 랜턴을 발동시킨 것이다.
간신히 파도를 벗어났는데, 이제는 신성력 레이저라니.
녹턴은 곡예비행을 하며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청백색 광선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콰칭! 치지지지직!
“어딜!”
루시아의 깃발 창이 날아들어 교황을 견제했기 때문이었다.
번득이는 구체가 사방으로 번개를 쏘아붙이며 떨어지자, 안드레아는 황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몸이지만, 그자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분명 일신상의 변화가 있었으리라.
교황은 불쾌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스페인의 암사자로군. 괜히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심판의 불벼락이 이베리아반도까지 미칠지 모르니.”
“더러운 수작은 잘 꾸며도 협박에는 재능이 없으시네. 근데 뭐 어쩌라고?”
“뭣이?”
“불벼락은 얼어 죽을. 힐러 공급을 죄다 끊었으면서 설설 기기를 바란 건가? 아예 그냥 싸우자고 선전 포고를 하지 그래?”
루시아의 말에 안드레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저 논리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교황청은 힐러 공급의 대가로 막대한 재물을 받아 챙겼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힐러를 보내 주지 않는다면, 그 혜택들은 끊어지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찬사가 악담으로 변하는 것도 필연이었고.
“그 건은 우리도 할 말이 없지 않다. 그대들의 나라는 이제 안전하지 않은가.”
“그게 교황청 덕분은 아닐 텐데?”
“……더욱 시급한 쪽으로 병력을 돌리는 건 합당한 이치지. 전선이 위험하지 않나.”
“미궁 성장 사건 이전에도 공급을 끊었잖아. 우리가 힐러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아니고, 빼 갈 이유가 없었는데?”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게 뭔데?”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녀의 추궁에 교황은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히 교황청이 힐러 공급을 줄이는 건 뻔한 속내였다.
돈을 더 내놓지 않으면, 전선 방어에 필수적인 인력을 축소하겠다는 의도.
지금까지는 아무도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스페인을 비롯한 몇몇 국가는 바티칸 시국이 아니라, 블라드 유진의 힘으로 평화를 되찾는 중이었으니까.
루시아는 가브리엘과 대치 중인 그를 향해서 크게 소리쳤다.
“걱정하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하세요. 이 새끼는 제가 맡을게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유진은 슬쩍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루시아의 눈빛은 교황을 불살라 버릴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말이 안 통하면, 몸의 대화를 나누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