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차피 너는 쓸 데도 없잖아? 그냥 적선하는 셈 치고, 몇 개만 줘.”
“인간들보다 더 못한 걸 만들어 왔군. 자네 드래곤 맞아?”
“아, 이건 시제품이라서 그런 거라니까? 재료만 충분하면, 변환 효율을 올릴 수 있어.”
“그 재료라는 건 어디서 얻지?”
“그야 내 아공간…….”
“영기 소모할 생각하지 마.”
블라드 유진이 선수를 치자, 엔세데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 다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시아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프랑스 서부를 평정하고 사르데냐섬까지 오는 내내 저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화룡왕은 끈질기게 질문했고 그는 철벽처럼 요청을 다 튕겨 냈다.
반복되는 무한 루프에 질릴 만도 하건만, 쳇바퀴 같은 대화의 흐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일행은 사르데냐섬 남부의 오염 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확장 속도가 너무 빠르군. 역시 저항이 없어서 그런 건가.”
고작 일주일가량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도 기껏 확보한 땅이 죄다 마기에 물들고 말았다.
맹렬하게 분화한 미궁으로 인해 섬의 절반 이상이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미궁 분포는 달랐으나, 다시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와는 달리 유진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존재했다.
전선이 축소됨에 따라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에는 헌터 병력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그는 세 국가에서 차출한 헌터들을 마치 친위군처럼 데리고 다녔다.
이제 일일이 몬스터 웨이브를 박살 낼 필요 없이, 저들에게 포위 공격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여기가 좋겠군. 설치해.”
“예, 대부님.”
림일국은 능숙하게 마기 축출 역장을 펼쳐서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헌터들은 익숙하게 줄을 서서 출입구를 통과했다.
포르투갈 헌터들은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줄줄이 따라 들어갔다.
말로만 듣던 역장을 처음 본 탓이었다.
“갈수록 병력이 늘어나는 것 같네요.”
루시아는 왠지 허망한 표정으로 헌터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전선에서 활동할 때는 아무리 기를 써도 모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따르는 이들의 수효가 우후죽순 늘어났다.
아무래도 블라드 유진의 명성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게다가 안정적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하고, 짭짤한 보상도 획득할 수 있었으니까.
“이탈리아에도 병력 좀 내놓으라고 할까 봐. 편하고 좋네.”
“이러다 헌터 군대가 되겠어요. 빈 땅에다가 나라라도 세우시는 거 아니에요?”
아프리카나 중동, 남미 등지에서는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러 나라가 통합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게 다 미궁 확장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는 강력한 비인가 헌터가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유진의 명성과 힘이라면, 아마 세계 최강 대국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귀찮게 그런 걸 뭐 하러?”
루시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블라드 유진다운 대답이었으니까.
마기 축출 역장도 구축했으니, 이제 미궁 정화에 나설 차례였다.
두 사람은 곧장 미궁 입구를 찾아서 오염 지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투우우우웅!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에서 강력한 파장이 터져 나오더니, 마기의 구름이 휙 쓸려 나가는 게 아닌가.
“이건…….”
이질적인 감각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유진과 루시아는 동시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기를 밀어낼 정도로 강력한 파장은 섬의 동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신성력이로군.”
“예? 그럴 리가요. 이런 현상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마기와 신성력은 정반대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대척점에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성력이 마기의 구름을 쓸어 버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티칸의 성검, 요한이 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교황청 힐러들의 힘만으로도 오염 지대를 정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림일국이 만드는 역장이 귀중하게 취급되지 않았던가.
루시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파장을 바라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확실해.”
“마기를 몰아내는 게 가능하다 쳐도 갑자기 왜일까요? 지금 같은 시기에 말이죠.”
그녀의 말대로 신성력 파장의 등장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어차피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는 블라드 유진이 정리하기로 계약된 지역이었다.
2차 미궁 성장 사건으로 전선이 어지러운 지금, 저게 뭐든 중앙 유럽으로 파견되어야 정상이었다.
마기를 날려 버릴 수 있다면, 장벽 전투에서 크나큰 도움이 될 테니까.
“일단 날 부르는 것만은 확실하군. 여기까지 와서 저러는 걸 보면 말이야.”
“접근하실 건가요?”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어.”
신성력 파장의 의도는 확실했다.
마기의 구름을 싹 없애서 시야를 확보한 다음, 블라드 유진이 서 있는 곳으로 쭉쭉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마 그에게 뭔가 볼일이 있으리라.
“돌아가서 상황 알리고, 대비하라고 일러둬.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알겠습니다.”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루시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섬의 동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마기 축출 역장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신성력의 파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콰칭―!
반사적으로 소수혈인을 뽑아낸 그는 눈앞으로 다가온 무언가를 빠르게 쳐 냈다.
경쾌한 움직임이었지만, 위력만큼은 결단코 가볍지 않았다.
묵직한 힘의 파동이 공간을 뒤흔들더니,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와 지면을 마구 헤집었다.
그저 단 한 번의 격돌일 뿐이었지만, 주변에 가해진 여파는 엄청났다.
블라드 유진의 바로 옆에 큼지막한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그가 수십 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힐끔 쳐다보는데, 전방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뱀파이어 놈 주제에 한가락 하는구나. 그러니 지금껏 그렇게 콧대를 높일 수 있었겠지.”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
문득 시선을 돌리자, 은빛 갑옷을 입은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더라?”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상대는 눈을 부릅뜨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거머리 같은 놈이? 봉인을 풀어 준 은인도 몰라보다니!”
“스타일이 너무 변해서 말이야. 이제 교황이 아니라, 성기사라도 하려는 건가. 안 어울리는 갑옷은 뭣 하러 입은 거지?”
“닥쳐라! 천주께서 내려 주신 신성한 물건을 망령된 놈이 함부로 거론하다니!”
“미친 늙은이 컨셉은 여전하군.”
놀랍게도 강력한 무언가를 쏘아 보내 그를 공격한 인물은 안드레아 교황이었다.
그자는 평소와 달리, 성스러운 광채가 서린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손에 든 고전적인 형태의 랜턴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는 중이었다.
‘저기서 발현된 거겠네.’
유진은 직감적으로 랜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저게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나, 신성력을 발출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지금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푸른 불꽃에서 고농도의 에너지가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네놈을 처단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해할 수 없군. 인류를 위해서 날 깨운 거 아니었던가?”
“구해 오라는 성배는 어디다 팔아먹고, 마음대로 봉인을 부숴? 그러고도 그딴 말이 나온단 말이냐!”
“아,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확실히 빡칠 만한 일이겠지.”
지금껏 그가 안드레아의 의도대로 움직여 준 건 딱 두 번뿐이었다.
한국의 대규모 미궁을 정화한 것과 토리노의 수의를 탈환했을 때.
그 외에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교황의 입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말이다.
아마 내부적으로 상당한 저항이 있었을 터였다.
블라드 유진이 안드레아의 휘하에 있지 않다는 건, 이제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를 지그시 노려보던 교황은 슬쩍 입술을 뒤틀어 올렸다.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지. 그걸 굳이 따지지는 않겠다.”
“호오?”
순간적으로 유진의 눈빛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항상 권력욕과 조급함으로 번들거리던 안드레아의 얼굴에 여유가 흘렀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접하지 못한 기색이라,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뭔가 있다.’
분명 교황을 이토록 변화시킨 무언가가 주변에 존재할 터였다.
예기치 못한 만남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추론은 해 볼 수 있었다.
저자의 자신감을 증폭시킬 만한 건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가장 확실한 건 천상계와의 차원문이다. 하지만 엘―칼릭스의 성배는 내 손에 있으니까 그건 불가능하고.’
세트 아이템이 모이지 않으면, 토리노의 수의는 효과를 발현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차원문은 아닐 터였다.
두 번째로 가능성은 크지만, 다소 석연치 않은 가설이 있긴 했다.
감각을 확장하며 주변을 돌아보던 블라드 유진은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기묘한 고주파 음과 함께 마기에 부식되어 가던 근처의 창고 건물이 대번에 폭발했다.
삐이이―! 콰아앙!
초열지옥 역풍이 부지불식간에 펼쳐진 것이다.
충격파가 터져 나와 주변을 휩쓸자, 허공이 일렁거리며 무언가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남자의 형상은 상당히 익숙했다.
“DK?”
창고 건물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애초에 그곳에 존재하지도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벨티아의 현혹으로 천군압쇄의 분신들을 감춰 두었던 모양이었다.
“여,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초열지옥 역풍에 터져 나간 분신은 절반 정도.
나머지는 똑같이 손을 흔들며 입을 모아 외쳤다.
어떻게 혈성쇄혼술을 제거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이 포섭당한 건 확실했다.
천군압쇄로 은근히 유진을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DK의 회유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고작 이런 거로 저자의 자신감이 충만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안드레아는 권력욕의 화신이 아니었던가.
교황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영혼도 팔 정도로 집착이 심한 놈이었다.
고작 신성력이 깃든 갑옷에 DK만 믿고 저딴 행동을 한다?
현재 블라드 유진의 위세가 어떤 수준인데,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론 신성력을 발출하는 랜턴이 있긴 했지만, 그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마 교황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터였다.
권력에 눈이 멀었을 뿐이지, 멍청한 자는 아니니까.
분명 어딘가에 또 다른 안배가 존재하리라.
피의 권능을 끌어 올리며 분신의 수와 위치를 가늠하던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스윽. 스피잉―!
암흑화를 시전하자, 시커먼 연기가 휘날렸다.
유진의 신형은 옆으로 쭉 미끄러지듯 수십 미터나 나아갔다.
안드레아가 들고 있던 랜턴에서 강력한 빛줄기가 예고도 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이미 예상했기에, 받아치기보다는 회피를 택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그의 코앞으로 새하얀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블라드 유진은 열 줄기의 소수혈인을 펼쳐서 시뻘건 그물을 만들었다.
쩌저저정!
예기치 않은 기습이었으나, 대처는 완벽했다.
문제는 백색 물체가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그물을 찢으며 짓쳐 들어왔다는 거였다.
“……!”